한국사 미스테리                출처:경향신문

                                   문화재 3.6 분과위원 조유전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 식민사학의 뿌리마저 워낙 깊고 재야사학의 이설(異說)까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30년간 무령왕릉을 비롯,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경주 월성해자·감은사지 등 현장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월 3회씩 펼쳐지는 조유전 선생의 역사기행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한곳 한곳의 유적, 한점 한점의 유물을 단서로 펼칠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조유전씨 약력

▲1942년 경남 마산생 ▲66년 서울대 고고학과 졸업 ▲69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촉탁(임시직) ▲71년 무령왕릉 발굴 ▲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시절 안압지·황룡사지·감은사지·월성·황남대총·천마총 등 주요 발굴 조사 주도한 뒤 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유적조사연구실장을 지냄 ▲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취임, 2002년 정년퇴직 ▲현 문화재위원 3·6분과 위원 겸임

                                                                               

[한국사 미스터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1974년 11월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로 주변의 논밭에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작업은 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서둘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연못 준설작업하던중 발견-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발굴조사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목제의 양물 즉 남근 모조품이 있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안압지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곤란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인데 한자 다섯치였다 하니 40㎝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인데 여덟치였다고 하니 20㎝가 넘어 랭킹 2위인 셈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남근은 17㎝가 넘었으니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로서는 랭킹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언이다. 아무튼 이 양물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어언 3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이 남근 모조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된 모습을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이나 다름없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남근숭배·놀이기구說등 용도 분분-

남근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岩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儀式)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불교 도입전 신라 성문화 개방적-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 역시 신앙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 속해있는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 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 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이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고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 신라시대 유물에 나타난 성행위의 토우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이 국가종교로 공인하고 있는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의 성기나 성행위의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기로 봐서 ‘內室 자위용’ 유력-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이 성행했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 모럴이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은 분명 실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 고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하게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 모조품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궁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관 련 기 사
]전곡리 발굴 산역사 배기동 교수

“구석기도 재미있는데 말이야”. 배기동(52·한양대 교수)은 자신만 만나면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스승(삼불 김원룡 선생)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삼국시대 마구(馬具)가 전공이었던 배기동에게 “전곡리서 뼈를 묻으라”는 스승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출토예가 없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출현은 그만큼 스승을 흥분시켰고 애제자에게 그 과업을 물려준 것이었다. 1993년 11월14일 전곡리 현장. 타계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삼불(三佛) 선생의 장례식이 열렸다. 배기동을 비롯한 제자들은 스승의 유해를 전곡리 유적에 뿌렸다. 추모 1주년 기념식 때는 삼불의 기념비를 세웠다.

“당신께서는 한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전곡리 유적은 어른(삼불)의 최고이자 마지막 발굴인 셈이었으니까요”. 79년 서울대 조교로 전곡리 발굴에 참여했던 배기동은 미 버클리대 유학 이후인 86년부터 전곡리에서 스승의 뜻을 받들어 뼈를 묻기로 했다. 청춘을 바친 전곡리에서 사랑도 얻었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79년 1차 발굴 때 숙명여대 대학신문 사진기자로 전곡리 현장을 찾은 여인(장명엽씨·49)을 ‘꾀어’ 결혼에 골인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부부는 현장에서 먹고 자면서 발굴에 정열을 쏟았다. 겨울밤을 부부가 보낼라 치면 부부의 몸은 꽁꽁 얼었고 개 짖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다. 하루는 작업을 돕던 군부대 포클레인이 유적을 파고 있었을 때 부부는 ‘혹 포클레인이 유적을 파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1m 앞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클레인의 삽이 파낸 흙더미 속에 냄비같은 물체가 3개 들어있었다.

한국전쟁 때 설치해놓은 듯한 대전차 지뢰였다. 만약 포클레인 삽이 지뢰를 찍었다면 부부는 공중분해 됐을 터였다. 며칠 뒤 군부대에 의해 폭파된 지뢰의 폭발음은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스승의 유업을 이어받은 배기동은 친지들의 도움과 수천만원의 사재를 털어 자료관을 만들었고 해마다 5월초(올해는 5월3~5일)에는 연천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펼친다. 스승과 제자가 이어 지키는 27만년의 역사가 재현되는 것이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4월 28일 15:56:07

[한국사 미스터리](2)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2000년 11월초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한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은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신문은 미야기현 기마다카모리 유적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구석기 유적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로써 잇단 발굴을 통해 70만년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유적 노이로제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 한국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7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준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한반도에는 있는데 일본에 없을 리 없다”고 초조감을 드러낸 일본학자들이 구석기 유적 찾기에 혈안이 된 것이다. 이런 일본 학계의 좌절감에서 비롯된 게 바로 후지무라의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구석기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연천의 전기 구석기 유적 발굴은 우리나라에 고고학이란 학문이 도입되고 난 이후 가장 큰 학문적인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8년 한탄강변서 美軍이 발견-

◇미군이 발견한 주먹도끼=1978년 4월. 동두천에 주둔중인 미공군 기후예보대에 군무하던 그렉 보웬 병사는 평소에 사귀던 한국여성과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다. “이게 뭐지?”. 여인은 이상하게 생긴 차돌 하나를 주워 보웬에게 흔들어보았다. 자연석 같기도 하고,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웬 병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던 김원룡 교수에게 이 주먹도끼를 보냈다. 돌멩이 하나에 담겨진 한반도 27만년전의 역사가 한 외국인 병사에 의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차돌을 쥔 김원룡 교수는 즉각 프랑스에서 구석기를 전공한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채집되는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 즉,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의 형태가 프랑스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 중기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유사함을 확인한 뒤 현지조사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다. 이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 약 1백50만년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백50만년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년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년전)·중기(10만년~4만년전)·후기(4만년~1만년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때까지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에서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에 정설로 굳어져 있었으니 전곡리 전기 구석기 유적의 확인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27만년전 전기 구석기 유적 유력-

◇불꽃튀기는 연대논쟁=난리가 난 학계는 김원룡 교수를 발굴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등 6개 기관 합동으로 학술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연대를 비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유적의 연대가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는 20만~30만년전이라는 걸 신빙할 수 있느냐는 백가쟁명의 논쟁이 쉴사이 없이 이뤄졌다. 공동발굴 참가 대학박물관의 교수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고고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같은 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각자 주장이 엇갈려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헷갈리게 했다. 한마디로 열악했던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발굴이었던 것이다.

결판이 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세계적인 구석기 연구의 권위자를 초빙해 ‘판정’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리한 논쟁 4년만인 82년 8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김원룡 교수의 추천을 받아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는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J.D Clark) 교수를 초빙하게 되었다. 전곡리 유적을 방문한 클라크 교수는 주먹도끼 등을 관찰한 후 아프리카 전기 구석기시대인 아슐리안기인 생고안 구석기 형태와 유사성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클라크 교수는 “아프리카 생고안 구석기는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지만 전곡의 구석기 유물은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서도 후기에 속하는 27만~26만년전일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전곡리 구석기의 연대문제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가장 핵심은 전기냐 후기냐로 압축됐는데, 말하자면 20만~30만년전과 4만~5만년전의 주장으로 엇갈렸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수십만년이 왔다갔다 하는 연대관의 천양지차라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최초 발견으로부터 25년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는 동안 11차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아울러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은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자리매김되었고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는 세계 고고학지도에 남북한을 통틀어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지난 기간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의 구석기 연대 논의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될 것이다.

-‘신의 손’ 후지무라 몰카에 들통-

◇돌아버린 일본, 비참한 악수(惡手)가 된 자작극 연출=전곡 구석기 유적의 조사는 이웃 일본 고고학계에 엉뚱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의 구석기 유적이 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는 데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 결과 81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자자리기(座散亂木) 유적에서 약 4만년전의 구석기를 발굴해 일본 최초로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밝혀졌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한 문제의 도후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그후 계속해서 20만년전~40만년전~50만년전~70만년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잇달아 발표해 일본에서는 ‘신의 손’으로 알려질 정도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주도해왔다.

이러한 구석기의 발굴은 일본 구석기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뒤질 수 없다는 그릇된 사관에 젖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고 세계 역사상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에 일본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이 후지무라의 자작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곡 구석기 유적의 발굴은 이와 같이 일본을 자극해 일본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작극을 연출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동시에 일본 교과서 왜곡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우월주의적 황국사관이 낳은 결과임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마이니치 신문의 유적조작 폭로가 없었다면 일본의 구석기 왜곡은 영원한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이와 같이 고고학이 문화우월주의에 편승하면 조작극에 희생될 소지도 있다는 교훈을 남겼고 아울러 고고학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관 련 기 사]尺보면 고구려?

-목제유물 발굴 계기 삼국논쟁 가열-

지난 2000년 7월3일 오전 10시쯤, 후텁지근한 날씨를 식혀주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던 이성산성 발굴현장.

“여기 좀 보이소”. 인부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적막을 깼다. 훗날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목제 유물”이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양대박물관 발굴단 현장책임자였던 유태용씨는 연구 끝에 이 자를 ‘고구려 자(尺)’로 비정했다. 파손부분을 붙여 미터자로 재본 결과 36.1㎝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자의 길이가 35.6㎝. 눈금이 끝에서 0.5㎝ 간격을 두고 시작하고 있으므로 발굴된 자의 실제길이는 35.6㎝로 딱 맞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자는 전체 세 구간으로 돼있는데 첫 구간은 5개의 치(寸)로, 각 치는 푼(分)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번째 구간 역시 5개 치로 나뉘어 있었으나 눈금을 세분하여 표시하지 않았고 나머지 한 구간엔 아무런 눈금도 없었다. 이 고구려자의 전체길이를 1자로 본다면 1자는 15치이고 1치는 2.37334㎝가 되는 것이다(1자 35.1㎝를 15치로 나눈 수치). 이에 대해 당시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고건축 전문가 김동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지금도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척과 이 자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고 똑같은 간격으로 눈금이 그어져 있다”면서 “이는 고구려자가 틀림없다는 얘기”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심광주 한국토지박물관 학예팀장은 우선 발굴된 목제의 깎인 형태가 똑바르지 않은 점을 두고, “도량형은 국가형성과 건축의 기본인데 도량형의 기본인 자를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또 요즘의 자처럼 0.5㎝ 떼어놓고 눈금이 시작된다는 말도 억지이며 눈금이 시작되는 부분이 일부 멸실됐고 눈금 또한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15촌이 1자라는 것은 고구려 도량형이 15진법이라는 것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는 “단순한 목간을 만들기 위해 다듬어놓은 부재일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이외에도 “고구려가 15진법을 쓴 이유는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자의 길이를 늘인 것”이라는 주장서부터 자가 아니라 단순한 저울추일 것이라는 추측까지…. 이렇듯 자 한점을 둘러싼 싸움까지, 이성산성과 그 출토유물을 둘러싼 논쟁은 촌치의 양보가 없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5월 05일 16:02:13

[한국사 미스터리](3)하남 춘궁동 二聖山城

경기 하남 춘궁동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에 서면 왜 이곳이 요충지인지를 알 수 있다. 서북쪽으로 그 유명한 아차산과 함께 한강이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오고 동남쪽으로는 하남시의 평지가 코앞에 보인다. 1,500~2,000년전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피를 말리는 싸움을 벌인 곳. 정상에 서면 아직도 그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 이 산성은 누가 쌓았고 누가 사용했을까. 1986년 지대한 관심 속에 첫 발굴을 시작했으나 17년이 지난 지금에도 초축국(初築國)이 어디냐는 처절한 ‘3국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후손들에 의한 ‘삼국 대리전’이 쉼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6년 첫 발굴후 ‘初築國 논쟁’-

◇삼국의 치열한 각축지=표고 209.8m, 총둘레 1,925m, 내부면적 4만7천2백평인 이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성이다. 이 성을 두고 조선 후기 학자인 홍경모는 온조 고성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실학파의 거두 다산 정약용과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이병도가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 교산동 일대를 백제초기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비정함으로써 고대사학계에서는 대부분 이 설을 따라왔다.

더구나 ‘이성(二聖)’이란 백제시조인 온조, 미추홀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비류(秘流) 두 임금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과 관련되어 한성백제는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 즉 지금의 충남 공주(公州)로 비운의 천도를 함으로써 수도를 잃었다. 고구려에 일시 점령당했던 백제의 도성은 그 후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이 신라수중으로 들어가면서 한강 쟁탈전은 최후로 신라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본다면 하남시 중심에 해당하는 춘궁동과 교산동 등이 백제의 도읍지가 되고 평지를 감싸고 한강변에 연한 이성산성 역시 한성백제 때 축조된 산성으로 보는 것이 일견 매우 타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정약용·이병도 "백제 하남위례성" -

◇“어! 왜 신라 유물만 나오지?”=영락한 이성산성의 옛터는 1980년대 들어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경기 하남시가 향토 사학자들의 열정을 등에 업고 산성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 백제문화를 규명키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86년 이성산성에 대한 학술발굴조사가 하남시의 주선으로 한양대박물관 주관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 산성이 백제성임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발굴결과 출토되는 유물이 대부분 신라시대 유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기대했던 백제시대의 유구와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지금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발굴 담당자보다 오히려 발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만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백제가 쌓은 백제산성이라는 주장에 고구려가 쌓은 고구려 산성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어 결국 고구려·신라·백제 성이라는 주장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각기 나름의 논리를 앞세우고 있어 어느 주장이 바른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한 지역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을 10여차례나 계속하고도 계속 논란중인 발굴현장은 아마 이 이성산성이 처음일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조사를 통해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의 정리를 통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소모적인 논쟁을 끝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제 아닌 신라·고구려 유물 발굴-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백제=98년까지 6차례의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산성내의 각종 건물터와 연못 등의 규모가 확인되고 아울러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토기 등이 지금까지 알려진 6~7세기 신라시대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글자가 쓰인 목간에 戊辰(무진)이란 간지(干支)가 608년으로 신라시대 목간임이 밝혀져 이성산성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그런데 99년 제7차 조사에서 중국 당나라에서 사용한 자(唐尺)가 출토됨으로써 축성에 사용된 길이 계측 도구가 밝혀지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성 주장을 뒤엎을 자료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8차 조사에서 고구려에서 사용된 고구려자(高句麗尺)와 고구려 관직인 욕살(褥薩)이 쓰인 목간이 출토되었다고 발굴단이 공개함으로써 이 산성이 고구려와 관계있는 고구려 산성일 가능성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산성의 진정한 축조세력은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가 또다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2001년 제9차 발굴조사에서는 동문터와 성벽 일부가 조사되었다. 가파른 위치에 마련된 동벽과 동문터의 규모가 밝혀졌으나 백제유물은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현장지도회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발굴지도위원의 한 사람인 모 대학 교수가 “백제산성이 분명한데 발굴을 잘못해 엉터리 발굴이 되었고 출토된 백제유물은 공개하지 않고 숨겼으니 앞으로 이 대학에 발굴조사를 맡겨서는 안된다”고 공식 회의석상에서 폭언을 퍼부은 것이다. 이른바 ‘백제파’의 강한 반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제10차 조사때 성벽의 동벽과 동문지 일대를 추가 조사하였으나 역시 백제유구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현단계 발굴로선 "신라 것" 유력-

◇“이성산성은 결국 신라가 축조했다”=현재 발굴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현재 남아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시대 축조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우선 백제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유구와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출토유물 가운데 명백하게 시대를 알 수 없는 경우 삼국시대로 표기한 예는 있다. 그런데 이는 백제도, 신라도 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해석에 따라 백제유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의 백제유물이 수습되었다고 바로 백제시대로 속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벽조사에서 수습된 선사시대 유물인 돌로 만든 홈자귀(有構石斧)나 돌도끼(磨製石斧)가 출토되었다고 선사시대 산성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성산성은 마지막 배수의 진이 아닌, 한강을 넘어 남으로 접근하는 상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임이 분명하다.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줄기차게 주장해온 교산동의 이른바 ‘백제 왕궁터’ 역시 발굴 결과 백제시대의 유적이 아닌 통일신라 후기에서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되었던 건물터로 밝혀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한차원 높게 생각해보자. 즉, 현존하는 산성을 누가 쌓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아전인수격인 주장은 역사왜곡의 전주곡임을 알아야 한다.

고고학은 소설이 아니다.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해석해서는 잘못 역사왜곡의 주범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발굴조사는 어디까지나 정확한 발굴을 통해 정확한 자료를 학계에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다. 그 유적의 성격은 발굴담당자가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학자는 그 자료를 가지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논문으로 남기면 된다. 선학들이 남긴 논문을 후학들이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한 단계 학문이 성숙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고고학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 련 기 사]‘7일 전쟁’으로 한성 함락한 장수왕

“우승(愚僧)을 어리석다 말고 쓰시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몰래 도모하려 간첩을 물색하자 승려 도림이 응모했다. 장수왕이 기뻐했다.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국 백제를 칠 다시 없는 기회가 될 터.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때 유시(流矢)를 맞고 전사하지 않았던가. 거짓 죄를 짓고 백제에 도망온 도림은 바둑을 좋아하는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도림은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그를 상객(上客)으로 받들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바둑으로 두터운 신임을 얻은 도림의 마각이 서서히 드러난다.

“대왕의 나라는 하늘이 베푼 험요(險要)입니다. 그런데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고 선왕의 유해는 노지(露地)에 가매장돼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하류에 무너집니다”. 도림의 참언에 속은 개로왕은 백성들을 동원, 궁전수축 등 대역사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나라의 창고가 비고 인민이 곤궁해졌다.

“이제 됐다”. 475년 9월, 도림의 보고를 들은 장수왕은 군사 3만을 일으켜 왕도(王都) 한성을 포위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네 길로 나뉘어 협공하고, 바람을 이용하여 불질러 성문을 태우니 항복하는 이가 속출했다. 개로왕은 어쩔 줄 모르다 서쪽으로 도망갔다. 한성은 ‘7일 전쟁’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 등은 도망간 개로왕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세 번 절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은 뒤 죄를 책망했다. 그런 뒤 왕을 아차성 밑에 결박하여 끌고 와 살해했다. 왕을 욕보이고 죽인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인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이들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 7일 전쟁을 기록한 뒤 조국을 배신한 걸루와 만년을 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오자서가 (초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덕(德)이 아니다. 걸루 등이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고 적병을 인도하여 전군(前君)을 결박하여 죽이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도다”

‘삼국사기’를 읽으면 한강을 둘러싼 1,500여년 전에 펼쳐진 그 극적인 전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100년간의 와신상담과 피어린 복수, 그리고 첩보·심리전이 가미된 7일간의 전쟁….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이 전쟁이 끝난 뒤 백제는 남으로 쫓겨갔고 고구려는 대제국의 기틀을 완성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5월 19일 16:02:58

[한국사 미스터리](4)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上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홍수가 쓸고간 자리에서 백제시대 제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제의 청동제 초두 등 중요 유물이 발견되어 총독부 박물관에 신고된 것이다. 일제는 즉각 이 토성을 ‘풍납리 토성’으로 불렀고 광복 후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사적 지정 범위는 일제시대 지정된 범위 그대로였다. 즉 잔존하고 있는 토성벽만 지정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벽 내부는 아무런 조사 없이 급속적인 개발로 말미암아 도시로 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지정 보호받고 있는 범위가 성벽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속은 버리고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백제의 경우 BC 18년 건국 이후 사비시대인 부여에서 660년 멸망할 때까지의 약 700년 역사 가운데 한성백제 약 500년은 망각한 채 겨우 200여년간 버틴 공주와 부여만을 백제로 알고 있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철통같은 기존학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일 뿐”=1964년, 필자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스승인 삼불 김원룡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편들이 나왔다.

선생은 이 결과를 정리하여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초기백제인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1967년 발표했다. 말하자면 김원룡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백제의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고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쌓을 만한 힘이 있었을 리 없고 한성백제가 명실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랬으니 작은 시굴 구덩이에서 나온 백제유물을 인정할 리 만무였다.

그 기존학설이란 국사학의 태두 이병도 박사가 1933년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사성(蛇城)”이라고 비정(批正)한 것을 뜻한다. 이 백제본기 기록은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풍납리 지명은 원래 ‘배암(蛇)들이 마을’이 ‘바람들이’로 말이 바뀌었고 이 ‘바람들이’ 지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풍(風)은 ‘바람’, 납(納)은 ‘들이’이기 때문에 풍납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병도 박사의 주장은 광복 후에도 어느 누구의 반대의견 없이 통용되어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이것은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며, 그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분석, 이를 옛 기록에 대입해 새롭게 해석한 노력이 곧바로 암초에 걸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뿌리깊이 내려져 있는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새로운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상건물터, 움집인 수혈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 흔적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그랬으니 몽촌토성이 AD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패망한 4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성과는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풍납토성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던 사이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벽 일부만 제외된 채 성벽의 안팎은 도시화되면서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와 경제성장에 따른 주택 재개발이 풍납토성 내부에도 불어닥쳤다.

◇기적처럼 부활한 한성백제=잃어버린 한성백제의 한(恨)은 그다지도 깊었나 보다. 1996년말,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함께 토성의 정밀실측을 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다시 백제의 혼을 일으켰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호벽을 치고 기초 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 이교수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 4m 이상이나 팠는 데도…. 기존 주택건물은 파봐야 2m 정도였기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백제유물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이 지하 깊숙이 묻힌 백제를 깨웠으니…. 이교수는 즉각 필자에게 숨이 멎을 듯한 목소리로 “나왔어요”하고 더듬거리며 발견사실을 알렸다.

1997년 새해벽두부터 난리가 났다.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다.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다. 조사의 성과는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아울러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環壕)유구를 비롯,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밝혀진 것이다.

필자도 발굴조사 현장을 참관하고 출토 수습된 유물들을 보면서 백제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 이후 백제유적 최대의 발견·발굴이었다. 그것은 1964년 당시 학생신분이지만 최초 발굴에 참여한 필자가 문화유산관련 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손 한번 못 써보고 도시화가 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신대 박물관의 발굴에서도 역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서울대 박물관이 참여한 위치에서는 백제시대와 관련되는 아무런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백제가 발견됐으나 발굴이 끝나자 아파트 건축은 이뤄졌다. 어쨌든 이 발견은 서곡에 불과했다. 필자가 민속박물관장 근무를 마치고 1998년 친정인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돌아온 뒤부터 더욱 엄청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사 미스터리](5)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下

1998년 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서 풍납토성 성벽 학술발굴단장이 되었다. 성벽 안쪽에서 한성백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백제인들이 쌓은 성벽의 축조방법도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발굴이 시작된 것이었다.

◇연인원 1백만명이 동원되어 쌓은 토성=“높이는 한 6~7m 정도나 될까. 폭은 한 10여m?”. 애초에 발굴단은 현존하는 성의 모습으로 볼 때 그 정도려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와. 이게 뭐야”. 발굴기간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판축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 폭 40m 이상에 현존 높이 9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추정 최대높이는 15m. 토목학자들은 성의 축조에 연인원 1백만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이라고 보았다. 발굴조사 결과 토성은 늦어도 AD 3세기 전후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왕권에 준하는 강력한 절대권력이 없이는 둘레 3.5㎞에 이르는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백제는 한성백제시대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대사 전공학자들 가운데 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조심스럽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해온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잇달아 발견되는 왕성의 흔적=또 한번의 낭보가 인근 경당연립 신축부지에서 날아왔다. 한신대 박물관 발굴 결과 불과 1,000여평의 조사면적에서 한성백제 유물·유구가 터져나왔다.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와당·초대형 옹·중국제의 도자기·중국동전인 오수전·‘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500상자 분량이 넘었다. 말머리뼈와 대부명 토기 등은 국가 주도의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중국제 토기류는 활발한 대외교섭의 증거이다.

조사진행 과정에 얻어진 뜻밖의 성과에 따라 건축 당사자와 조사기관 사이에 발굴기간 및 발굴조사비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발굴이 중단됐다. 2000년 5월13일,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토지보상에 대한 원칙도 없는데다 발굴비까지 늘어나자 재건축 사업을 담당한 조합장의 지시로 노출시켜둔 백제 유구를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백제가 테러당했다’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신문보도가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가닥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재개발을 통한 건축행위는 봉쇄됐고 다만 지하유구가 파손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소규모 건축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산너머 산.

◇잘못된 시굴의 뼈아픈 교훈=성벽내 한성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의 보존원칙은 큰 틀에서 마련되었으나 성벽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표산업이 을축년 대홍수로 쓸려나간 풍납토성의 서벽 밖에 새로운 사옥건물을 짓기 위해 2001년 9월 학술기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굴을 맡은 모 대학박물관에서 지하 5m 아래로 개흙층을 확인했지만 이것은 해자로 볼 수 없으며 단순히 한강물의 범람방지를 위한 제방시설이나 제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운 것이다. 도성이나 주거지와는 관련없는 시설이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개흙층 내에서는 문화재가 전무하다는 것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견대로 제방시설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성벽안에서 밝혀지고 있는 주거터 등 수많은 백제 유구와 유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또 조사기관의 주장대로 한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과 관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백제시대 살았던 성안의 생활공간을 보호하는 시설임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합당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도성이나 사람이 사는 주거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범람을 막는 제방의 의미밖에 없다는 의견이었으니 한마디로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런 문화재가 없다”니 건축공사는 계획대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사를 강행하기 위한 터파기 공사때 문화재 유무를 확인하려 입회한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백제시대 문화층이 있음을 확인했다. 공사는 중단됐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본격 발굴한 끝에 풍납토성 서벽과 관련된 해자추정 유구가 발견되었다. 삼표산업 부지는 당장 보존됐다.

◇모습 드러낸 해자(성을 보호하는 도랑)=지난 3월12일 열린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필자는 삼표부지, 즉 유실된 서벽의 성벽 외부에서 하상 퇴적층과 함께 오랜 동안 물이 고여 썩었던 결과로 보이는 뚜렷한 흔적이 노출돼있음을 보았다. 마치 시궁창 냄새처럼 풍기고 있는 발굴현장을 보고 직감적으로 해자 시설의 물이 오랜 동안 썩으면서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했다.

지난 1999년 필자가 동벽의 일부를 해부하는 발굴조사시 주위 여건상 외부의 해자 시설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았던 해답을 찾는 순간이었다. 해자와 관련시설로 보이는 노출된 자갈층에서 백제토기편과 함께 조선시대 백자편도 수습되고 있다는 설명. 결국 이 시설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구한 기간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회의결과 아무도 ‘해자 추정 의견’에 이의가 없었고 이구동성으로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문만 있었다. 인공이든, 자연이든 이 유구는 풍납토성의 해자시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모 대학 박물관이 최초 시굴조사때 조금만 신중했다면 건축주인 삼표산업에서 공사를 강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자시설이 없었다는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시간은 물론 조사에 따른 추가비용도 지불하게 해 이중으로 손해를 입혔다. 시굴기관의 잘못된 의견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교훈으로 남겼다.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풍납토성의 성립시기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잇단 발굴결과에 이 풍납토성이 기원 전후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늦어도 2세기 경에는 완성되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한성 백제는 초기부터 강력한 왕국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왜곡되어 왔다.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중국 기록인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신봉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초기 기록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이 BC 1세기 때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낙랑 등 4개의 식민지를 세워 지배해왔으며 AD 4세기 후반에야 겨우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세웠다는 주장. 지금의 일본 역사 교과서도 이 주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일제의 주장을 겨우 1세기 정도 앞당겨 3세기 중·후반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한강변의 백제시대 성곽인 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교해 볼 때 풍납토성이 앞서 조성된 것은 분명해 졌다. 그리고 규모면에서나 출토된 유물과 유구의 비교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서 풍납토성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관 련 기 사]‘한성백제 역사’찾아낸 이형구

2001년 어느 날이었다. 기자가 어느 고고학자를 취재하다가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던데…”하고 묻자 그 교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형구 교수가 누구죠?”. 기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풍납토성을 ‘발견’함으로써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 역사를 부활시킨 이형구 선문대 교수. 철저하게 무시당한 ‘한성백제의 슬픈 역사’를 닮았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국립 대만대 고고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주류학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 “이형구가 누구냐?”는 말은 바로 그 따돌림의 상징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아무리 풍납토성 등 한강유역 백제유적의 중요성을 떠들고 다녔어도 그에게 돌아온 말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끈질기게 도전했다. 1,500평에 불과했던 석촌동 유적보호구역의 범위를 1만7천여평으로 늘려 놓았고 85년엔 올림픽 대교를 사이에 둔 강북~둔촌동 도로계획(풍납토성을 관통하는)도 바꿔놓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97년 새해 우여곡절 끝에 현대아파트 공사장에 들어가 ‘폼페이 발견’에 비견된다는 풍납토성의 존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그럴 리 없다”는 학자들의 무시와 경멸, 그리고 재산권을 침해받는 주민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집까지 찾아와 자행하는 갖가지 협박과 “어떤 X이 이형구냐”며 퍼붓는 욕설을 당해야 했고 때로는 멱살을 잡혔다. 심지어는 ‘이형구 화형식’까지 벌어졌으니…. 그러나 역시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건 기존학계의 무시이다. 통설이라는 건 그야말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통설을 신주 모시듯 하면 학문발전이라는 게 있을까.

이교수가 지금도 어이없어 하는 건 어떤 교수가 풍납토성 발굴 때 했다는 말이다. “(유물이 나온다 해도) 개인의 재산권이 중요하므로 보존은 불가능하다.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며 비민주적인 발상이다”라는 요지의 발언. 그런데 지금은 “풍납동 같은 중요한 유적에서…”라는 말을 한다니. 최근 풍납동 주민들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소규모 주택의 증·개축은 허용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60여곳의 증·개축 공사현장에서 단 한 곳의 예외도 없이 백제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한성백제 500년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역사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5월 26일 16:31:31
 

[관 련 기 사] 신라 57대왕은 평양기생?

‘신라 57대왕은 여왕 차릉파(車綾波)이며 기생출신, 그리고 평양태생?’

1936년 6월29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보면 신라왕관(서봉총 왕관)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기사 제목은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玩弄)물로’.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은 35년 9월10일 일어났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이른바 제1회 고적애호일을 맞아 경성박물관 소장품인 서봉총 금관을 비롯, 허리띠·장식·목걸이·귀고리 등 황금유물들을 대여, 특별전을 벌였다.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라는 자였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이 자는 기관장들이 모여 술자리를 질펀하게 뒤풀이를 벌이던 기생집으로 유물들을 몽땅 가져왔다. 그런 뒤 용서못할 짓을 저질렀다. 차릉파라는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은 물론 모든 금제유물들을 씌우고 끼워 술판을 벌인 것이다. 저 어색한 기생의 표정을 보라.

그 자들은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하고 놀았으리라. ‘신라여왕’을 끼고 술을 마시니 얼마나 좋으냐는 듯…. 신라와 그 찬란한 신라금관은 이렇게 능멸당했다. 물론 고이즈미라는 자는 이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고 한다. 일제하 우리 문화재의 수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앞선 1927년 11월10일, 경주박물관에서 금관을 제외한 금관총 출토유물들이 싹쓸이 도난당했다. 경찰은 “천수백년 전에 만든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도 지금의 금과 다르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범인들을 유인했다. 범인은 6개월 뒤에야 경찰서 관사 앞에 유물들을 갖다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심리전의 결과로 유물은 찾았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해방이 되었어도 금관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던 금관 2점(금령총·서봉총)을 슬쩍 해치웠다. 그러나 그 금관들은 모조품이었다. 10년 뒤인 1956년엔 금관총 금관이 사라졌다. 범인은 대낮에 관람객을 가장하여 진열실에 들어왔다가 유물실에 잠복, 밤중에 ‘쓱싹’ 한 것이었다. 그것도 ‘금관’만 싸들고….

그러나 그 또한 복제품이었다. 범인은 ‘가짜금관’이라는 신문보도를 보았는지 인근 모래사장에 ‘모조금관’을 파묻고 말았다. 이 모든 사례가 그만큼 금관의 가치가 크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긴 금관을 비롯하여 신라의 금제유물들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6월 02일 15:58:18

[한국사 미스터리](6)신라금관

1921년 9월, 경주 로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아무개는 장사가 무척 잘되었다. ‘사세확장’을 해야 했다. 그는 주막을 늘리기로 하고 뒤뜰의 조그마한 언덕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9월23일 이상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박아무개는 자기 집이 원래 신라 무덤이 평탄하게 돼버린 자리에 세워진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이 꼬리를 이어 경주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 당시 경찰서 순경(미야케)이 이 풍문을 듣고 곧바로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곧 내막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의 무덤이 아니야. 신라 귀족이거나 아니면 왕족?’. 심상치 않은 유물임을 직감한 미야케는 당장 터파기 작업을 일단 중지하게 한 후 상관인 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바로 1,5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 눈앞에 나타난 최초의 신라금관(금관총)이었다.

◇스웨덴 황태자까지 발굴에 관여=금관은 우리나라 고대 유물 가운데 단연 눈을 끄는 유물로 꼽힌다. 세계에 내놓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드는, 독특한 형태의 금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은 5개나 된다. 바로 첫번째 출토금관인 금관총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북분금관 등이다. 금관은 앞서 밝힌 금관총 금관처럼 출토 당시 많은 사연과 얘기를 간직한 채 발굴된다.

금관총 금관 발굴 이후인 1924년에는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해 두번째의 신라금관이 발견됐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金鈴塚) 금관이다. 이 무덤 역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금관에 매달려있는 독특한 한쌍의 금방울을 보고 이름을 금령총이라 했던 것이다.

이어서 1926년에는 역시 봉황대 서편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무덤에서 세번째 금관이 출토되었다. 이 역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다. 출토된 금관에 봉황으로 여겨지는 새(鳥)의 장식이 있고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발굴에 참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붙였다. 스웨덴의 한자표기가 서전(瑞典)이어서 서(瑞)자와 봉황(鳳凰)장식의 봉(鳳)자를 취해 바로 ‘서봉총(瑞鳳塚) 금관’이 된 것이다.

◇나무와 사슴뿔 상징=신라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외관은 그 형태가 독특하고 꾸며놓은 면면이 호화로우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런데 금관을 만든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외관을 보면 한자(漢字)인 산(山)자 3~4개를 위에서 아래로 연속적으로 붙여놓은 형태가 앞면과 좌우측면에 장식돼있고, 다시 좌우로 사슴뿔 형태의 장식가지를 세워 산(山)자 형태와 함께 전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 뼈대에 많은 영락(瓔珞·목·팔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나 굽은옥(曲玉)을 장식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영락이 움직이면서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게 되어 호화의 극치를 이루게 했다. 금관의 뼈대가 되는 산(山)자 형태는 식물인 나무를 도안화(圖案化)한 것으로 해석되고 거기에다 동물인 사슴뿔을 상징화(象徵化)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동물이나 식물이 문양으로 도안화되어 많이 사용됐다. 로마시대에는 식물문양이 성행하였고, 동물문은 유목민족이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신라금관과 같이 동·식물 문양은 동·서양이 접하고 있는 흑해 지방에 살던 유목민들에 의해 수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발전한 동물문양이 유목민들을 통해 중국에 흘러들어가면서 주로 용이나 봉황문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양의 흐름이 변화하고 발전해서 신라금관에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위세품=더구나 내관인 관모(관 속에 쓰는 모자)의 속내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다. 이 나무는 고산지대에 사는 식물로서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의 황량한 곳에 무성하고 우리나라 고산지대에도 분포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는 외몽고 노인울라와 남러시아의 쿠르간(무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만리장성 밖의 남러시아 등 유목민들이 사용한 수목·녹각을 장식한 관 또한 신라·가야의 외관과 유사한 점은 삼국시대 관모의 원류를 북방민족에서 찾는 이유가 되었다. 삼국 중에서도 신라시대의 관모는 북방 아시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스키타이적인 문화와 깊은 관계에서 신라나 가야식의 금관으로 변화, 발전되어 결국 화려한 신라금관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신라금관의 연구결과이다.

고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유물들이 발굴조사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굴된 나뭇결 무늬 유리잔은 로만글라스 계통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관계를 증명해주고 있는 훌륭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고대부터 동서교역이 성행하고 있었고 신라금관 또한 그 교역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금관은 신라인이 만든 위세품(威勢品)으로 세계에서 그 형태가 없는 독창적인 걸작품으로 칭찬받고 있다.

◇용도는 영원한 수수께끼로=그렇다면 과연 이 금관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금관의 구실이라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겠으나, 특수한 형태에 실용성의 문제 등도 있어서 여러가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평소 사용하는 실용품이냐, 아니면 죽음에 함께 하는 장례용이냐, 나아가 어떤 의식에 사용된 의례용이냐. 궁금증은 이와 같이 크게 3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실용품으로 보는 견해는 직접 머리에 쓰고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특히 어떤 의식, 즉 샤만적인 행사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권위의 상징으로서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무덤의 발치에 함께 묻혀 출토되는 금동신발의 경우 신발 바닥에 스파이크처럼 장식된 것은 실용성이 없고 다만 단순한 부장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발과 함께 출토되는 금관 역시 장송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관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인가.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을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은 내·외관 가운데 외관은 의식용의 정관 또는 예관이며 내관은 모두 일상의 실용관이라는 것이다. 즉, 행사의 성격에 따라 내관이나 착용관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화려한 ‘외관’은 즉위식이나 외국사신을 맞이할 때나 나아가 국가의 커다란 행사, 즉 하늘이나 조상에게 제사할 때 의식용으로 사용되었고, 죽게 되면 함께 묻어주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라금관이 정확히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언제 사용이 끝났는지 알 수 없고 형태는 동일하지만 금관마다 장식이 각기 다른 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학문이 발전한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고고학의 한계인지 모른다.

[한국사 미스터리](7)남한산성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비상시에 대비한 난공불락의 요새=남한산성은 경기 광주·하남·성남시 및 서울 송파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은 해발 497m. 원래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임진왜란을 겪어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란가는 치욕을 당하자 전쟁후 조선 조정은 수도로 쳐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다시 쌓기로 했던 것이다. 인조임금은 1624년부터 2년반 동안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성내에 임금이 유사시 거처할 궁궐인 행궁(行宮)을 만들었고 선조(先祖)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 나라의 상징인 사직(社稷) 등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국가 비상시에 대비하게 했던 것이다.

산성의 규모는 총길이 11.755㎞이고 성벽의 높이는 3~7m 정도이며 본성의 내부면적은 총 64만2천여 평에 달한다. 봉암성과 한봉성 등 두 곳의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설로는 네 곳의 장대(將臺)와 4대문(大門), 다섯 곳의 옹성(甕城), 두 곳의 돈대(墩臺), 29여곳의 포루(砲壘), 16곳의 암문(暗門)이 마련돼 있다. 80여곳의 우물과 45곳의 연못이 있어 물도 풍부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궁과 함께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유사시 명실상부한 보장처(保障處)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3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다. 인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10만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지만 45일 만에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 항복의 사실을 기록하고 청나라의 황제를 칭송하는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三田渡碑·서울 송파구 송파동·사적 101호)이다. 이래서 남한산성이 굴욕의 역사 현장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절대 산성을 수축·개축하지 마라”=그러나 아무리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던 사료가 발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로지 청나라 대군과 싸웠던 항쟁의 역사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왔다. 말하자면 인조는 어찌됐든 남한산성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가서 항복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산성에 있었던 종묘와 사직은 고스란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조인했지만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공격하다 얼마나 혼이 났으면 항복문서에 그러한 조항을 넣었을까. 실제로 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먼저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조금이라도 수축·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삼았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要塞)였던 것이다.

인조는 호란이 끝난 지 2년 뒤 직산(稷山)에 있던 백제시조 온조대왕의 사당(祠堂)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다. 지금 남한산성 내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이 바로 그 사당이다. 일시적으로 나라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당했지만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조의 의지였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정체성이었고 뿌리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인조임금은 그 정체성을 백제에서 찾아, 백제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바로 남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다.

 

◇“몸은 항복해도 정신과 나라는 항복하지 않는다”=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인조에게 성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남한산성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항쟁하던 인조는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하지만 위급할 때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몸은 비록 항복했지만 정신과 나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항쟁과 사직 보존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패배한 치욕의 역사로만 치부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배의 역사관이고 식민사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구나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스러운 성산(聖山)의 개념과 진산(鎭山)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옛 기록을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백제 시조 온조임금이 기원전 6년 ‘한산 아래에 성책(城柵)을 세워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을 옮겨’ 운운하는 기사가 보인다. 이때의 한산(漢山)이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가. 한강 주변의 산으로는 북한산·인왕산·낙산·남산·남한산·청계산·도봉산·수락산·아차산·이성산 등등 수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한산은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확연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뿌리는 백제정신=그런데 최근 남한산성 내에서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가 확보되었다. 없어진 남한산성의 행궁(行宮)을 복원하기 위해 그 터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AD 2~3세기 대의 백제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1999년부터 한국토지박물관에서 행궁이 있던 터와 주변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해왔는데 조선시대 이전 시기에 있어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여러가지 유구와 유물이 출토 수습되었다. 우선 통일신라시대에 주장성이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라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들이 수습됨으로써 나름의 확인이 되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보다 앞선 시기의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4차 발굴연도인 지난해에 한성백제시대 유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주로 구덩이 유구(竪穴遺構) 및 불을 피웠던 화덕터(爐址)와 함께 유물이 흩어져 있는 층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종류를 보면 완·배·호·옹·발·시루·뚜껑 등 다양했으나 모두 파편으로 수습되었다.

결국 이 유구와 유물들은 남한산성이 한성백제 도성(풍납토성으로 비정)의 최후 배후에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시사하는 단서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들어와 1907년 침략을 노린 일본군에 의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시설을 불태워 또 한번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인조임금의 예에서 보듯,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치욕스런 역사를 자랑스런 항쟁의 역사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올바로 보는 눈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관 련 기 사]현실 택한 최명길·명분 지킨 김상헌

“최명길과 김상헌도 우리 역사에서 반복되는 논쟁 아니냐”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은 이른바 ‘굴욕외교론’에 대해 해명하면서 최명길·김상헌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병자호란 때의 주화·척화 논쟁을 빗대면서 친미·반미논쟁을 언급한 것이다. 두 개가 비록 모순되지만 사람들의 본보기로 되새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고리같아도 소신을 따랐노라”(최명길)

“조용히 찾아보니 이승과 저승이 반가운데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도다”(김상헌)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와 내통한 죄로 청나라에 끌려간 최명길과 역시 옥에 갇혀 있던 김상헌은 나중에 모든 오해를 풀고 이같은 즉흥시를 나눴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건 물론 병자호란이었다. 오랑캐로 치부됐던 청의 황제는 이미 한족·몽골족·만주족 등의 추대를 받은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조선만이 복속되지 않았다. 그런 청이 1636년 12월 조선을 침략했지만 인조는 청나라 군대의 선봉대가 개성을 지날 때가 돼서야 피란을 결심하게 된다.

최명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적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여 출병의 이유를 묻는 등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도성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텼지만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끝내 최명길의 주화론이 이기게 된다.

1637년 1월18일 최명길이 청 황제 태종에게 ‘신(臣)’을 칭하는 항복문서를 만들자 김상헌이 들어와 통곡하면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빙긋 웃으면서 다시 그 문서를 주워 이어붙였다. 결국 최명길은 한번 굽힘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지켰고, 김상헌은 절개를 지킴으로써 조선후기 사회의 질서를 300년간이나 더 유지시켰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자, 현실론을 택한 최명길이냐, 명분론의 김상헌이냐. “가노라 삼각산아”로 상징되는 김상헌의 절개가 돋보이기도 하고 두 분 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양시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자기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결국 종묘와 사직을 구한 최명길을 두고 “최명길은 바르고 옳았다. 김상헌은 다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조선 후기 지배층의 테두리 안에서”(오수창 한림대 교수)라고 높이 평가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6월 09일 17:07:16
 

[관 련 기 사]“기린은 孔子의 상징”

“(한나라 무제때) 기린(麒麟)이 잡혔다. ‘천자의 정치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제는 기뻐하며 제후들에게 백금을 내렸다”(사기). 기린(아프리카 기린이 절대 아니다)은 이렇듯 성군의 시대에 나타나며 생초(生草)를 밟지 않고 생물을 먹지 않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천마도’가 아니라 ‘기린’이라고 처음 주장한 이재중 고려대 한국학교육연구단 연구원에 따르면 뭐니뭐니 해도 ‘기린’은 ‘공자’의 상징이다. “노나라 애공 때 희귀동물이 잡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공자는 ‘기린이다. 성인의 세상에 나타난다’고 했다. 공자는 ‘나는 하늘에게서 버림받았다. 어진 짐승이 나타나도 그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탄했다”(사기·설원)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저 주(周)나라의 휼륭한 덕치를 이 동쪽에서 실현해 보련만!” 하고 현실정치 참여를 추구했던 공자. 그러나 약육강식의 춘추시대에 패도(●道)만을 좇던 당대 제후들에게 공자의 유세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처럼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제나라 명재상 안영(안자·晏子)마저도 제 경공이 공자를 기용하려 하자 딱 잘라 “안된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공자는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몇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습니다.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 풍속을 바꾸려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절망한 공자는 자신이 편찬한 ‘춘추’에 그해 첫번째 사건으로 ‘哀公十四年春 西狩獲麟’이라 적어 놓고는 더이상 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절필’이란 말의 기원이 되는 ‘획린절필(獲麟絶筆)’이다. 이 말은 공자학술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병이 난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단 말인가(泰山其頹乎). 기둥이 부러진단 말인가(梁柱其乎). 철인이 시들어 버린단 말인가(哲人其萎乎)”. 공자는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지 오래다”라고 말했고 1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이재중 연구원은 “공자의 빛나는 역사서 ‘춘추’는 일명 ‘린경(麟經)’이고 기린은 유교에서 인수(仁獸)로서 유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보면 개혁도 제대로 안되고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지금 기린이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나타나도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자가 없을테니….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6월 16일 16:10:31  

[한국사 미스터리](8)발굴 30돌‘천마총’上

  경주에 가면 시내 한 가운데 고분공원인 대릉원(大陵苑)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옛 신라시대 높은 신분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 가운데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무덤이 있다. 바로 천마총(天馬塚)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덤의 이름이 천마총이란 것에 의아해 한다. 금관이 있고 금은보화가 가득하게 묻혀 있어 아무리 보아도 신라 임금의 무덤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하늘을 나는 말(馬)의 무덤인가. 천마총은 꼭 30년 전인 1973년 7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광복 후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무덤으로도 유명하다. 이제 발굴 30년을 맞아 천마총에 그려진 ‘천마’의 비밀과 이 능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상하로 나눠 다뤄보고자 한다.

◇‘시험용’ 발굴이 ‘대박’ 발굴로=원래 천마총 발굴은 시험용이었다. 경주 평지에 남아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쌍분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1971년 6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의 고로화입식(高爐火入式) 참석차 포항을 방문했다가 가족들과 함께 불시에 경주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의 경주는 인구 10만명이 채 못되는 중소도시였다. 농업인구가 약 40%, 서비스업 종사자가 약 53%였고 그나마 경주를 찾는 관광객 수는 감소추세에 있었다. 평소 경주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녔던 박대통령은 직접 둘러보고 신라 천년고도를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경제수석에게 경주관광개발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신라고도는 雄大(웅대)·燦爛(찬란)·精巧(정교)·豁達(활달)·進取(진취)·餘裕(여유)·優雅(우아)·幽玄(유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개발하라”는 게 대통령의 지시내용이었다.

◇‘처녀로 남아있던 천마총’=이 개발계획에 포함된 내용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 최고(最高)·최대의 무덤인 98호분을 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하고자 하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 98호분은 높이 25m, 하부 길이가 120여m나 되는 부부묘(夫婦墓)이다. 쌍분(雙墳) 혹은 외형이 마치 표주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표형분(瓢形墳)이라고 하는 신라시대 무덤이다. 왜 ‘98호분’이냐 하면 신라시대 커다란 무덤의 현황조사에서 일련번호가 98호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신라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98호분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외형이 많이 파괴됐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분을 시험발굴, 경험을 축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 뒤 98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뜻밖에 대박이 터질 줄이야. 바로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찬란한 신라금관은 물론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그 장식은 물론 목에 걸었던 경식(頸飾)등 1만점이 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학술적인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환생했다”=사실 발굴 조사를 완료한 후 학술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자체도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무덤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은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누구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말하자면 대표성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이 155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이외의 유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이 바로 말다래에 그려져 있는 천마도였다. 이 말다래는 부장품을 넣어둔 궤짝에서 1쌍이 발견되었는데 하늘을 나는 천마의 그림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처음 출토 당시 마치 천마가 환생해 후다닥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뭐니뭐니 해도 고 신라시대의 그림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고 삼국시대 벽화 이외 삼국시대 회화작품으로서는 압권이었다. 그래서 1974년 9월23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삼국, 특히 고 신라시대의 회화수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인 천마도가 발견된 큰 무덤이란 뜻에서 그 이름을 천마총이라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발굴 조사 진행과정에서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보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하늘을 날고 있는 천마의 그림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화난 경주 김씨들, “우리가 말(馬)이냐”=이 155호 고분이 천마총으로 일컬어지자 경주 김씨가 들고 일어났다. 경주 평지에 있는 모든 커다란 형태의 신라시대 무덤은 비록 이름을 잃었지만 대부분 김씨 성을 가진 임금들의 무덤이 분명한데 이름 붙일 게 없어 하필이면 말 무덤이냐는 항변이었다.

1981년 드디어 경주에 살고 있는 김영효(金永孝) 외 984인의 명의로 천마총 이름을 바꿔달라고 당시 경주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청원을 하게 되었다. 즉 사람의 무덤이 분명한데 마치 말의 무덤인 것처럼 천마총이라 이름하는 것은 부당하니 이를 ‘천마도 왕릉’으로 고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발굴 조사 자문위원이었던 고 김원룡 교수를 비롯하여 문화재위원들이 국회에 불려나가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답해야 했다. 우리나라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 사상 학술적인 명칭문제가 국회에서 논의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1981년 10월14일 문화재위원회가 명칭에 대해 재심의를 했으나 “발굴 조사결과 묻힌 주인공이 왕임을 확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그냥 천마총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천마가 아니라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이 맞다”=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 천마총의 천마 그림이 말이 아닌 기린의 그림, 즉 기린도(麒麟圖)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기린은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짐승을 말한다. 몸은 사슴과 같고 꼬리는 소의 꼬리에,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5색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대 중국에 있어서 기린은 우주운행 질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으로 사후세계의 수호자, 천년을 살고 살생을 미워하며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으로 여겨왔다. 천마총에 보이는 천마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되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다. 이는 기린 그림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며 뒷다리에서 뻗쳐 나온 갈기의 표현은 기린이나 용 등의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볼 때 말보다는 오히려 기린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기린 그림이라고 확실하게 밝혀져도 천마총의 이름을 새삼 기린총(麒麟塚)으로 고쳐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마 역시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짐승이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천마로도 기린으로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해답은 직접 그린 화가가 나타나서 해명해 주지 않으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다만 앞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임금으로 밝혀지게 되면 왕릉으로 명칭이 자연 수정될 것이다.
 

[관 련 기 사] 왕릉발굴의 저주?

천마총과 마찬가지로 백제 무령왕릉을 팠을 때도 큰 비가 내린 건 신기한 일이다.

1971년 7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무령왕릉의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억수같은 소나기가 퍼부었다. 별별 흉흉한 소문이 들리고 실제로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이 횡액을 당했다. 김원룡 당시 발굴단장은 공교롭게도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 남의 차를 빌려타고 무령왕릉에 가다가 아이를 친 일도 있었다. 무령왕릉의 ‘무’자만 나와도 가슴이 떨렸던 김원룡 선생은 늘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를 붙이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56년 중국의 명십상릉 중 정릉(만력제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도 무서운 비가 내렸다. 명루의 돌짐승과 인부 한사람이 차례로 벼락에 맞아 떨어지거나 죽었다. 실성한 노파는 발굴현장에 찾아와 흐느적거리며 “제발 부탁이니 날 용서해요. 더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게요”라며 해괴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발굴을 강행했던 베이징시 부시장 오함의 글 ‘해서파관(海瑞罷官)’이 이른바 4인방의 함정에 걸리면서 문화대혁명을 촉발시켰다. 오함은 69년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역시 정릉 발굴의 ‘유탄’이 아닌가.

왕릉 발굴의 저주는 비단 동양뿐만이 아니다. 투탕카멘의 저주는 그 절정이다. 1923년 2월7일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카나본 경은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미라를 발견했다. 영국의 일간지 기자가 그에게 “만약 투탕카멘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6주밖에 못살 것”이라고 농을 던졌다.

저주란 바로 ‘파라오의 잠을 깨우는 자에게는 죽음의 저주가 있으리라’는 파라오 관뚜껑에 쓰여있는 글귀를 말한다. 그런데 4월5일 카나본 경은 이집트 호텔에서 모기에 얼굴을 물려 그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왼쪽 뺨에 물린 모기자국과 투탕카멘 왕의 미라 왼쪽 뺨에 있는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할 줄이야. 이뿐 아니다. 발굴대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사고로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TV 프로그램에 출연, “파라오의 저주라니, 터무니없다”고 큰소리 친 아담슨조차 교통사고를 당했고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부인이 죽었으며 아들이 등뼈를 다쳤다. 발굴 이후 10년 이내에 사망한 이는 21명. 물론 발굴에 참여한 1,500명 중 21명이라면 많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조상들의 ‘영면의 공간’을 후세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파헤치는 건 분명 ‘저주’를 부를 수밖에 없을 터.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6월 23일 15:57:10

[한국사 미스터리](9)발굴 30돌 ‘천마총’下

1973년 여름. 전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민심마저 흉흉했다. 경주에서는 멀쩡한 신라왕릉(천마총)을 발굴해서 하늘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급기야 경주김씨 종친회 노인들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발굴조사를 중단하라고 법석을 떨었다. 어떤 노인은 현장에 드러누워 떼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 사이에는 “데모라도 해서 발굴을 막자”는 여론도 비등했다. 속설에 왕릉을 발굴하면 액이 따른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흥분에 젖어버린 희대의 발굴=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오던 발굴단은 한편으로 시민들의 집단행동 조짐을 알고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73년 7월26일 오후. 연신 땀을 닦아가며 땅을 파던 윤근일 조사원(현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장)의 눈에 흙더미 사이에서 눈부신 금빛유물이 나타났다. 1,500여년간의 긴 잠을 깬 순금제 신라금관이었다. 윤근일씨의 회고.

“뜻밖에 금관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너무나 놀라 말문이 막혔어요. 가슴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있었어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김동현 발굴단 부단장에게 살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금관이 나왔어요’ 했죠. 그분 역시 놀랐는지 ‘무슨 금관이야. 사람 놀리는 거야’ 했어요. 그분도 귀를 의심했던 거지요”

분명 틀림없는 순금의 황금보관이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보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발짝 떼는 순간…. 그 때까지도 가뭄의 뙤약볕이 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던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순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꽈다당”. 유물 상자를 옮기려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놀라 혼비백산, 금관을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

갑작스런 하늘의 조화에 잔뜩 겁을 먹었던 조사요원들은 폭우성 소나기가 진정하자 조사하던 무덤 내부로 돌아가 작업에 나섰다. 그런 다음 금관 상자를 안전하게 무덤 밖으로 옮기자 그렇게 무섭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평상대로 맑게 개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금관이 출토되고 난 이후부터는 유언비어도 사라지고 아울러 가뭄도 해소됐다는 것이다.

◇과학으로도 밝힐 수 없는 고고학=그러나 문제는 무덤의 주인공이었다. 결정적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결국 무덤 주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조사는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기 위해 하는 작업이 아니다. 명확한 증거물이 나온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선의 연구를 통해 접근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연구자의 몫이 된다. 무엇보다도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나 하는 것을 알면 그만큼 주인공을 추적하는 데 좋은 단서가 된다.

천마총에서 수습된 나무곽의 목질 편을 시료로 해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방사선분석실에서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을 시도해 보았다. 이때 얻어진 결과는 서기 340년 전후의 어느 시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과학적인 연대측정에서도 오차가 ±70년이나 됐다. 무려 140년의 폭에 해당되기 때문에 서기 270~41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됐다. 이 측정법은 당시만 해도 선사시대의 경우에는 유용했다. 하지만 10년의 차이가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역사시대에는 오차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져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당시 너무 큰 오차 때문에 신뢰할 수 없어 재래적인 방법으로 유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이 무덤이 서기 5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천마총의 조성연대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를 벌인 결과 지금까지 서기 460년에서 540년 사이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타계한 임금은 서기 458년 눌지왕(訥祗王), 479년 자비왕(慈悲王), 500년 소지왕(炤知王), 514년 지증왕(智證王), 그리고 540년 법흥왕(法興王) 등 다섯 분이다.

◇천마총 주인공 후보들=그렇다면 누구일까. 먼저 제19대 눌지왕? 그는 쿠데타로 전왕인 실성니사금(尼師今)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마립간(麻立干) 임금이 되었으나 42년간 재임하면서 이렇다 할 치적이 없었다. 다만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했고 왕위의 부자상속을 확립했다.

20대 자비왕? 눌지왕의 장자로 재위 22년간 성을 많이 쌓아 국방에 힘썼다. 지금의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도 이때 축성됐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 수도인 하남위례성을 침범하자 백제를 돕기 위해 군사를 냈지만 이미 개로왕(盖鹵王)이 전사하는 바람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21대 소지왕은 자비왕의 장자로 역시 22년간 재위했으며 최초로 시장을 개설,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22대 지증왕은 재위 기간이 13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치적이 많았던 임금이다. 임금이 죽으면 함께 묻는 순장(殉葬)을 없애고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임금을 마립간이라 부르던 것을 왕으로 부르게 했고 국가의 체제를 일신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 마지막으로 23대 법흥왕은 재위 27년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공포해 국가의 법체계를 확립했고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여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가야국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영토를 확보했다.

◇지증왕이냐, 자비왕이냐=이처럼 어느 임금이나 할 것 없이 나름의 치적이 있어 분명 무덤에는 금관이 묻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추론해보면 지증왕일 가능성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우선 천마총 출토 유물의 전체적인 성격이 국가의 비약을 나타내고 있다. 칠기에 그려진 그림 가운데 광배(光背)형태나 불꽃문양(火焰文) 등은 중국 북위(北魏)의 영향을 받은 6세기 초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백제 무령왕릉(재위 501~523년)의 유물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서기 514년에 타계한 22대 지증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에 반해 왕이 숨진 해와 달의 기록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숨진 당시 1개월간의 해돋이 각도를 컴퓨터로 추적해 그 각도를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 서기 479년에 타계한 20대 자비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결과로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올해로 발굴조사 30년을 맞이했지만 천마총에 대한 연구는 그 이상의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경주 고분공원 내의 고 신라 무덤을 보다 새롭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조사할 기회가 마련되면 지금까지의 연구로 축적된 노하우로 조성연대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관 련 기 사]황석리 13호 人骨 싸고 ‘인종논쟁’치열

“기원전 6세기 무렵 한반도에 서양인이 살고 있었다?”

41년전 발견된 황석리 13호 인골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발굴 당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 인골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분석팀은 당시 “인골의 신장이 1m74 정도”라면서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장폭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라면서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BC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BC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놀라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 한서대 교수가 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면서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양인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유태용 경기대 강사는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전제하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그는 최근 발간한 ‘한국 지석묘 연구’(주류성 간)에서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전제하고 “지석묘에서 나온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평민들은 과도한 노동력으로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는 것.

결국 족장급이 분명한 황석리 인골은 잘 먹고 계급도 높은 사람의 것이지 ‘서양인’의 것으로 보기는 무리라는 게 유씨의 주장이다. 자, 지금이라도 최근 서울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온 황석리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을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6월 30일 16:52:13

[한국사 미스터리](10) 제천 황석리 고인돌

“선배님 이건 제가 한번 (발굴)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 발굴현장. ‘쫄다구’ 여성 고고학자인 28살의 이난영씨(당시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에게 ‘응석’을 부렸다. 그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이난영씨의 말대로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라 한번 건방지게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선배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만지면 터질세라’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이난영씨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고고학도로서 뜬 첫 삽에서 낚은 완벽한 모양의 인골. 당시 행운을 잡았던 이난영씨의 우스갯소리.

“그 남자의 유골을 지금까지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선배들도 그렇게 놀렸지요”

◇석관·인골 발견으로 복원된 한반도 청동기 시대=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자형 돌관(箱式石棺)과 완전한 형태의 인골(人骨), 그리고 돌검(磨製石劍)의 출토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과거 일제는 선사시대 가운데 구석기 및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신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를 왜곡했다. 즉 일제는 중국 전국시대 말~한나라 초에 걸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구리(純銅)와 쇠를 들고옴으로써 그 전까지 석기만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석기와 철기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시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다. 그런데 황석리 발굴로 인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존재가 밝혀진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분포된 고인돌의 수는 3만여기(멸실된 것 포함하면 4만여기 추산). 단일지역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유럽의 경우 대서양을 따라 2,500㎞의 범위 내에 약 6만기가 확인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000년 12월2일, 우리나라의 전북 고창·전남 화순·강화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반도가 고인돌 천국인 이유는?=그런데 왜 한반도가 이렇게 선사시대 거석숭배사상의 산물로 알려진 ‘고인돌의 천국’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외형으로 볼 때 커다랗고 넓적한 바위를 받침돌 위에 올려놓아 마치 책상을 연상하게 하는 탁자(卓子)모양이 있는가 하면, 탁자라기 보다는 낮은 굄돌(支石) 위에 큰 바위가 놓여있어 바둑판을 연상하게 하는 소위 기반(碁盤)식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커다란 바위만 놓여있는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100t이 넘는 고인돌도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발생에 대해서는 자생설(自生說), 즉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설과 유럽의 지석묘가 해양을 따라 전파되어 들어왔다는 남방해양전파설 등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는 ‘북방전파설’. 이는 선사시대의 돌관(石棺)에 커다란 뚜껑돌을 올려놓음으로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집분포하고 있고 오랫동안 축조되었음으로 보아 독자적인 거석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주장이다. 반면 남방해양전파설은 동남아시아의 쌀 농사가 해로를 통해 중국 동북해안을 따라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석묘가 전라·황해·평안도의 서해안을 따라 집중분포하고 있는 데다 남방문화요소가 많은 ‘난생설화분포지역’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방전래설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들어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사자형 돌관이 지석묘로 확대 발전한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주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 축조시기는 BC 12~BC 11세기=그렇지만 한반도에 삶을 꾸려나가고 있던 토착사회에서 고인돌이란 무덤을 채택하는 데는 지역마다 다소 차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형이 탁자모양인 고인돌은 북쪽에, 바둑판식은 남쪽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결국 토착 청동기인들은 남방과 북방의 문화를 다 받아들여 독자적인 거석문화를 창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고인돌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석묘 발생연대는 청동기 시대의 발생과 불가분 관계를 가진다.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로 볼 때 우리나라 청동기인들은 기원전 15~14세기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게 청동기 문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고인돌 축조시기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12~11세기 정도 된다.

우리가 고인돌을 통해 밝혀야 할 최우선 과제는 거대한 돌을 상석으로 이용해 무덤을 만든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이다. 이러한 상석을 채석하고 옮기는 데 동원된 인원수와 이에 따른 사회·정치·경제적인 측면, 그리고 무덤에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문제, 함께 묻히는 유물을 통한 문화적인 측면 등이 우선 구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고인돌이 당시 공동체 사회에서 무덤으로, 혹은 제단(祭壇)으로 축조되었다고 해도 보통사람의 무덤일 수는 없다. 신분상으로 지배계급 또는 유력자의 전유물임이 분명하며 족장사회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고인돌은 지배계급의 무덤=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이스트섬의 석상, 그리고 영국의 환상석열 등은 어떻게 만들고 세웠을까. 또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심지어는 100t이 넘는 우리의 고인돌 상석은…. 청동기인들이 상석을 운반하는 방법으로는 지렛대, 목도, 굴림대를 이용한 끌기식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무게가 크게 나가지 않는 것은 지렛대를 이용해서 옆으로 옮길 수 있고 아울러 사람이 목도해서 옮기는 방법이 이용되고 있어 그 전통이 뿌리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사람이 옮길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이상의 무게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끌거나 말이나 소 등 길들인 동물을 이용해서 끌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석상을 옮기는 방법이 묘사된 조각을 보면 무게가 약 60t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石像)을 운반하는데 나무썰매 위에 석상을 올려놓고 로프로 묶은 다음 90명의 남자들이 로프를 잡고 끌고 있다. 영국 환상석열의 경우 거대한 돌기둥 위에 상석을 올려놓기 위해 돌기둥 높이로 흙을 돋운 다음 40t 무게의 상석을 끌어올리는데, 동원된 사람 수는 장정(壯丁) 180명이었다. 그리고 상석을 올려놓고 난 다음 쌓았던 흙을 다시 제거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7t 무게의 돌을 150m 이동하는데 약 73명의 인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실험결과는 1t의 무게를 옮기는데 10명 내외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같이 고인돌의 상석을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은 지배계층 내지는 유력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가 이미 촌장 또는 추장사회로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관 련 기 사]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

“견훤은 마치 늑대와 범 같더니 왕공(왕건)은 부모와 같도다”(삼국유사)

서기 928년,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기 직전의 기록이다. 이 해 3월에 왕건이 신라 서울에 이르러 머문 뒤 수십일 만에 돌아갔다. 삼국유사는 “왕건의 부하 군병들은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떤 조그만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불과 몇달 전 들이닥친 견훤은 어땠나.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삼국사기)

‘놀자판’ 경순왕과 ‘인간말종’ 견훤, 그리고 ‘하늘이 내린 명군’ 왕건을 그린 이 절묘한 ‘시나리오’. 다시 2,000여년 전 천하를 다투던 유방과 항우의 승패를 가른 요인을 보자.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령을 모두 폐지한 채 이른바 ‘3장(章)의 법’만을 약정한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함양의 재물을 절대 탐내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함양에 들이닥친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3개월간이나 불태웠고 재화와 보물·아녀자들을 약탈했다.

또 아버지(진시황)가 세운 강대국 진나라를 즉위 3년 만에 잃은 ‘진 2세 호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겼다. 백성을 핍박하는 아방궁 축조를 말리는 대신들에게 “황제가 귀한 것은 내 맘대로 하는 것 때문인데 무슨 소리냐”라고 호통쳤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그런 호해를 두고 “마치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꼴”이라고 한탄했다.

그 예는 최근에도 있었다. 1921년 불과 50여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28년 만에 그 막강한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이유 중 하나가 ‘백성 속’으로였다. 이른바 3대규율(행동은 지휘에 따르며 노동자·농민의 것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고 토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공동소유한다)과 어떤 경우라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면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8개 주의사항’ 덕분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천자의 마음에 들면 제후 노릇밖에 못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잡으면 천자가 된다”는 옛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가 모두 승리자의 기록임을 유의하자.

경애왕과 견훤은 패배자였고 왕건은 승리자였단 말이다. 만약 왕건이 패했다면 역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인간말종’으로 몰아붙였을 터이다.

/이기환기자/    최종 편집: 2003년 07월 14일 16:24:20

[한국사 미스터리](11)사적 1호 ‘포석정’의 침묵

“이게 뭐야. 포석(砲石)이라?” 1998년 5월 초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상준 연구관은 쌓인 기와더미 속에서 ‘포석’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기와 한 점을 수습했다. 그 발굴은 경주시에서 포석정 인근에 포석정 모형전시관을 조성하기 위해 미리 실시한 것이었다.

이 명문기와는 포석정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지금까지 알려진 포석(鮑石)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복잡한 글자를 쓸 때 축약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砲石’으로도 쓸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해석이 나왔다. 사실 국보 1호, 보물 1호는 삼척동자도 알지만 포석정이 사적 1호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일제가 비운의 역사현장으로 보존=포석정은 경주 남산의 서편 포석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이 나라가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서기 927년 음력 11월에 연회를 열어 귀족들과 술마시고 즐기다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입으로 왕이 자결을 강요당했다고 되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사적 1호는 신라망국 치욕의 장소로 알려져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음력 11월이면 한겨울인데 과연 경애왕이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또한 두달전인 음력 9월에 이미 견훤이 경주 인근인 영주까지 쳐들어와서 경애왕이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했던 상황이었다.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과연 경애왕이 몰상식한 술판을 벌였을까.

현존하는 포석정 터의 모양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마치 바다의 전복껍데기 둘레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가 없어졌고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없어진 부분을 다시 짜맞추어 정비한 것이다. 일제가 무엇 때문에 파손된 형태의 포석을 다시 보충해 맞추면서까지 정비하고 중요문화재, 그것도 사적 1호(1933년)로 지정 보존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비운의 역사현장을 보존함으로써 너희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은연 중 알리려고 정비했을 터이다.

◇몸통만 남은 포석정=어쨌든 현재의 모습은 입수구와 출수구는 그 형태를 알 수 없고 다만 몸통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수령 300여년으로 보이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들의 뿌리가 뻗쳐 포석유구를 부풀어 올려 원형이 손상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포석정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유적(流盃渠遺蹟)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서기 353년 3월3일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현의 후이치(會稽)산 북쪽에 란정(蘭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당시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그곳에 모여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고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의 난정집서(蘭亭集序)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주의 포석정 포석이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라는 해석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다보니 결국 놀이만 즐기다 나라가 망한 꼴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했던 것이다.

◇제사, 길례를 치른 성스런 장소=과연 포석정이 그러한 의미에서만 해석되어야 할까. 이제 고대 정원 유적으로서의 견해와 종교사적인 측면에서의 검토, 그리고 화랑세기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조명해본 견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윤국병의 해석을 보자. 그는 포석정을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정원유적, 즉 이궁(離宮)의 정원 속에 계욕(●浴)과 계음(●飮)을 위하여 꾸민 시설로 보았다. 계욕, 즉 일년동안 몸에 밴 부정을 맑은 냇물에 씻어 청결하게 하는 일종의 제사를 지내고 제사음식과 술을 먹었던 시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음복(飮福)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실 때 흥을 돋우기 위해 잔을 물에 띄워 보내 마시게 한 게 유상곡수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계욕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부락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비는 부락제인 동제를 주관하는 제관이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행하는 데서도 남아있다. 또 중국의 곡수연지(曲水蓮池)는 거의 모두가 유배정·유상정 등 단적으로 곡수연을 가리키는 정자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유점(流店)이라는 곡수연지가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욱은 화랑세기에 주목한다.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祠), 또는 줄여서 말하는 포사(鮑祠)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묘(廟)라는 것이다.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결혼했고,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포석사였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경애왕은 나라의 안위를 빌었다=이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현존하는 포석정은 중국의 유상곡수연과 유배거시설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랑세기에 보이는 포석사도 눈여겨 봐야 한다. 이 포석사는 문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고 유력자들의 길례(吉禮)가 행해진 사당으로써 성스러운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포석사 내에 포석시설과 관계있는 정자가 있었고 이것이 포석정일 것이다. 국가제사를 마치고 나면 음복을 하거나 길례를 한 뒤 피로연 장소로 활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들의 독창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문헌사학에 있어서 옛 기록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음을 본다. 이 포석정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먹자판·놀자판의 ‘망국의 놀이터’였다는 해석은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기록을 받아들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결코 경애왕이 다만 술마시고 즐기기 위해 군신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베푼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서술을 함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기보다는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더 실체에 접근할 올바른 해답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종합적인 발굴조사 계획을 마련하여 조사를 진행하면 여러가지 의문점이 해결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러한 학술조사가 이루어진 연후에 발굴결과 자료를 토대로 모형전시관이든 관광자원화든 추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 미스터리](12) ‘장고형 고분’ 上

“한국에도 일본식 고유 무덤인 전방후원분(장고형 고분)이 있다”

1972년 7월17일,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경희대학교 고 황용훈 교수와 윤세영 등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오목산, 구봉면 구룡리의 와우산 등 평야지대에 있는 구릉 4곳을 공동 조사한 결과였다.

그런데 윤세영 등이 이 구릉들을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후 30여년이 흐른 지금, 일본보다 축조 시기가 200년이나 늦은 이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 논쟁은 한·일 고고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동시에 그 누구도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이다. 과연 이 일본식 무덤이 어떻게 한반도에서 나와 논란을 일으켰으며 또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일본인일까, 아니면 한국인일까. 2회에 걸쳐 그 뜨거운 논쟁 속으로 빠져본다.

◇“한국에서 발견된 일본식 고분”=윤세영 등의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가 열렸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장고분은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뒤에는 둥근 원형의 봉토분, 앞에는 네모난 방형의 제단형태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마치 열쇠구멍 혹은 장고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 당시 최고권력자인 왕이나 지역의 유력자인 수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전역에 2,000여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역대 일왕의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게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이다. 그는 서기 398년에 죽었으며 해자로 둘러싸인, 거대한 구릉같은 무덤(길이 1㎞)은 오사카(大坂)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인 1938년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 6호분·덕산리 2호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고 보고된 적이 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아무도 그 주장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견학자인 윤세영 등이 그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으니 고고학계가 자지러진 것이다.

◇“발굴할 필요없다”=그해 7월 하순 문화재위원회는 황교수와 윤주임 두 사람의 조사내용을 들었다. 이들은 고분의 위치가 산이나 구릉이 아닌 평야지대에 축조된 점과 분구(墳丘)의 외형적 형태와 규모, 그리고 당시 농경지 소로와의 관련 등 입지조건이 일본의 이른바 ‘전방후원분’과 동일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규명을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필자는 문화재연구실의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면서 설명회 자리에 참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마디로 수긍할 수 없다고 일축했고 발굴조사의 필요성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당시 발표한 두 사람의 당혹감이란….

당시 고고학적인 학문의 분위기는 우리나라에 일본의 무덤형태인 ‘전방후원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11년 후 수면 밑에 잠겨있던 ‘장고분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

◇일본에서 큰 반향 일으킨 한국의 ‘장고형 고분’=강인구 영남대학교 교수는 1983년 6월 영남대학신문에 ‘함안-고성지방 전방후원분의 발견과 의의’의 논문을 발표했다. 강교수가 소개한 대표적인 장고분은 경남 고성의 무기산 고분, 전남 나주의 신촌리 6호분, 경남 함안의 말이산 16·22호분, 경북 고령의 본관동 고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 고유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란 주장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 발표를 본 일본에서 오히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고대사에 있어서 한·일관계는 근본적으로 한국이 일본에 앞선 문화의 전수자로서 부동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쪽이 일본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6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릇된 식민사관을 광복 후부터는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만 존재하고 있는 이른바 ‘전방후원분’이 한국에도 있다는 주장이 발표되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방후원분이 가야지역에서 확인됨으로써 일본의 문화가 한국에 전해졌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됨과 동시에 신임나일본부설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전방후원분 연구자들은 강인구 교수를 일본에 초대하는 한편, 우리나라 고성·함안지방의 장고분을 관찰하기 위해 뻔질나게 경상도 지방을 찾았다.

◇한국은 묵살, 일본은 찬반논쟁 치열=그런데 우리나라 경남의 고성과 함안 등지를 방문하여 발표된 ‘장고분’들을 관찰한 일본의 연구자들도 찬반의 견해가 갈렸다.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고성 무기산 고분이었다. 무기산 고분은 고성 송학동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시대 무덤들 가운데 제1호분. 비록 외형이 정확한 형태의 일본식 ‘전방후원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한쪽이 높고 낮은 한쪽이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매우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니 보는 사람마다 무덤 둘이 붙은 쌍분으로 느낄 수도 있고 ‘전방후원분’으로도 느낄 수 있는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찬반논란의 와중에 심봉근 동아대학교 교수가 구설에 올랐다. 일본의 한 원로학자가 송학동 고분을 방문했을 때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여담삼아 한 말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잘못 인용되었던 것이다.

“내 고향이 고성이라 어린 소년시절에 여기(송학동 제1호분 위)에 올라와서 정월 보름날 달집 태우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심봉근). 일본인 학자는 이 무기산 고분이 “전방후원분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일본학자는 한국인들이 한쪽의 둥근 봉분을 평탄하게 만들어 그곳에서 불놀이했다는 식으로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개의 무덤이 모두 원형의 봉분, 즉 쌍분이며 따라서 한쪽은 높고 한쪽은 평평한, 일반적인 장고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 고성동 고분이 장고형 고분이라는 강인구 교수의 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었다.

이에 강인구 교수는 심봉근 교수에게 곧바로 확인했다. 심봉근은 “불놀이로 평탄작업을 한 일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강인구는 또 현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데 일본의 원로학자가 자기 주장에 맞게 왜곡했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본 학자들 가운데 원로 학자들은 고성 송학동 고분이 전방후원분이란 주장을 부정하는 쪽이며 젊은 학자들은 긍정하는 편이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송학동 제1호분이 ‘장고분’이라는 강인구 교수의 주장을 묵살했지만 일본인 연구자 사이에서 찬반논쟁은 더욱 깊어갔다.

[관 련 기 사] 일본식 고분 발굴 韓日 표정

“명화동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지방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

1994년 5월20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1면 톱으로 광주 명화동 고분 출토사실을 보도했다.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입증시키는 이른바 원통형 토기가 처음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21일 아침 고분을 발굴했던 국립광주박물관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가뜩이나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또다시 우길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유력지가 1면 머리기사로 다뤘으니 두드러기를 일으킬 만했다.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입니까.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닙니까”. 하지만 박물관으로서는 ‘학문적인 접근’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고형 고분’의 출현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알레르기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여파는 1992년 도굴로 인해 긴급 발굴을 실시했던 함평의 신덕 고분에까지 미쳤다. 발굴이 끝나면 당연히 정식 발굴보고서를 내야 하는 것.

그러나 이 신덕 고분 보고서는 발굴한 지 11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다만 행정용 보고서로만 작성됐을 뿐. ‘쉬쉬’ 하는 속내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것. 일본의 경우 전방후원분 연구논문만 수천편이고 관련서적만 해도 수백권에 달하는 상황. 그런데 5명도 안되는 연구자만 분투하는 우리의 여건이 너무도 초라하다. 아직 능력부족이므로 좀 더 공부한 후에 자료를 내야한다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사실 연구결과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요즘 우경화 분위기가 짙은 일본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준비가 됐는지…”. 학자들의 걱정이다. 유적수가 워낙 적어 10여기에 불과하고 전남지방에 나타난 이른바 일본식 무덤을 연구해봐야 자칫하면 본전도 못찾는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한·일간 역사 공동연구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여기서 그냥 방치할 수는 없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0여년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임나일본부설 불식에 큰 도움을 주었던 ‘가야연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7월 21일 17:02:28
 

[관 련 기 사] 한반도 ‘장고형 고분’싸고 日학계 고민

“한반도에 전방후원분이 있다는 건 ‘한여름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전남지방의 ‘장고형’ 고분 출현을 바라보는 일본학계의 시각 또한 복잡하고 첨예하다. 한국학계가 ‘신임나일본부설’의 악령 출몰을 걱정하듯 일본학계도 ‘찬반양론’의 소용돌이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전방후원분이 없다”고 주장하는 쪽은 이 묘제가 ‘일왕가계’의 무덤으로 신성시된다는 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고유의 것이자 최고권력자들의 무덤이 한반도에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 우려는 한반도의 옹관묘나, 주구묘가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일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됐다. 가뜩이나 일왕가계와 백제계의 친연성이 드러나 있는 상황이니 더욱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면 ‘긍정론’을 주장하는 쪽은 고대사회에서도 일본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 이 무덤을 보고 있다. 광주 명화동 고분 발굴을 아사히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명화동·월계동의 ‘장고형 고분’을 발굴했던 성낙준 국립김해박물관장과 박중환 국립전주박물관 연구관 등의 말.

“긍정론자들은 한국학계의 연구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서 풋풋한 전방후원분이 나오니 우릴 부러워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 일본의 경우 전방후원분이 천황묘로 되어있고 아무리 학자라도 접근하기가 힘들거든요”

물론 지금 이 순간 한반도 남부의 장고형 고분 출현을 두고 ‘신임나일본부’를 내놓고 주장하는 일본학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란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일.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는 유난히 민족의식을 강조할 수밖에 없고 역사는 그 바람을 타게 된다. 그러니 우리나 일본이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성낙준 관장은 “우경화 경향이 짙은 현재의 일본에서 극우파 고고학자인 야나기다 같은 이는 한반도 토착세력의 유물도 일본산이라고 주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주장들이 우경화 바람을 타고 교과서에 실리기라도 하면…. 문제는 역사를 오늘날의 민족·국가 개념으로 바라보면 우리나 일본학계나 늘 그 모양 그 꼴이 된다는 점. 고대에 무슨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있었을까. 그런 관점에서 마한과 왜(倭), 그것도 북 규슈지방의 교류 등을 살피면 해답은 쉽게 나올 수도 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7월 28일 16:00:43

[한국사 미스터리](13)‘장고형 고분’(下)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上)편에서 밝혔듯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그런 전제 아래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를 살펴보자. 82년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다. 90년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

줄기차게 ‘한반도 기원설’을 주창해온 강인구 교수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보았다.

기원설과 관련,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일본학계는 분구묘(墳丘墓),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에서 기원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구묘(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측 주장대로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면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한반도 주구묘의 잇단 발견은 일본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그렇다면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정서상’ ‘민족감정상’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도 달굴, 숙명의 논쟁거리이다. 그런데 먼저 고대사회에서 이같은 민족감정이나 국경의 개념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전제 아래 갖가지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우선 한국인이라는 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세력설’ 주장도 여러가지이다. ①먼저 당시 마한지역은 백제의 완전한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마한은 백제·신라·가야·왜(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편다. 그런데 이 영산강 유역 수장들이 왜(일본 규슈지방)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무덤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 ②또 하나는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자. 이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이 이런 규슈세력과 교류하면서 규슈의 묘제인 장고분을 썼다는 설도 있다. ③다른 견해도 있다. 백제가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왜와의 왕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설 ①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②일본 연구자들 가운데는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일부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무덤은 백제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관료라는 주장이다.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 이와 관련,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독특한 학설을 편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마한 등에서 넘어간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와 가야사람들이 뭉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그 격변기에서 북규슈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이주민들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다시 고향인 전남지방으로 건너왔으며 이때 일본의 장고형 고분을 썼다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모든 주장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 아닐까.

이들의 귀환은 당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긴다. 대격변기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다. 그 틈을 타 왜로 이주한 마한세력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너 돌아왔다는 가설이다. 아무튼 이 무덤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명쾌하게 풀린 건 아니다. 문헌사학자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체에 접근할 터이다.

[한국사 미스터리](14) 황남대총 쌍분의 주인공

고대 삼국시대를 다스렸던 역대 임금 수를 보면 고구려 28명(705년), 백제 31명(678년), 신라 56명(992년)이다. 가야나 삼한시대의 임금들을 제외하고도 삼국시대 1,000여년간을 통치한 임금의 수가 무려 105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특정 임금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무덤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점이다.

가장 명명백백한 삼국시대 왕의 무덤은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경우 만주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과 태왕릉이 장수왕·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신라의 경우 무덤 앞에 비석이 마련된 태종무열왕이나 비석편이 출토되어 알 수 있었던 흥덕왕 외 몇몇 무덤뿐이다.

◇이름모를 부부묘=왜 고대 왕릉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미래에 닥칠 못된 후손들의 마구잡이 도굴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신라의 경우 왕 혹은 왕비, 또는 왕족이 묻혀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 중·대형의 봉토고분은 경주시내 평지에 대부분 남아있다. 과거 일제시대 조사된 무덤 수량은 155기 정도. 이들 가운데 사적 제40호로 지정된 황남동 고분군은 현재 신라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어 많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황남대총은 신라최대의 쌍분, 즉 부부묘로 표형분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황남대총은 경주관광 10개년 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무덤의 성격을 구명하고 이를 토대로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화 하자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발굴에는 1973년 7월에서 75년 10월까지 무려 2년4개월이 소요되었다. 이것은 국내 고분발굴 사상 단일 무덤으로서는 최장 조사기간이다. 발굴 동원된 인원만 총 3만3천여명. 출토유물은 순금제 금관을 비롯해 실용적인 은관(銀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그라스 등 무려 7만여점이 쏟아졌다. 특히나 유물 가운데는 비단벌레(玉蟲)를 잡아, 그 날개 수천개를 장식하여 무지개 빛처럼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비단벌레 장식 마구(馬具)’가 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무덤이 발굴조사를 통해 부부묘임이 밝혀졌다. 즉 남자가 먼저 죽어 무덤에 묻힌 뒤(南墳), 훗날 여자가 죽어 묻힌 무덤(北墳)이 남분의 바로 곁에 조성된 것이다.

◇남편묘엔 금동관, 부인묘엔 금관이=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진 북분에서 순금제 금관이, 남자무덤인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도금한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된 사실이다. ‘순금제의 금관 출토’=‘왕의 무덤’이라는 공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원래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됐을 때 이 무덤이 왕의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하지만 발굴과정에서 함께 출토된 허리띠 장식품에 부인대(夫人帶·왼쪽위 작은 사진), 즉 부인의 허리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비(妃)나 제후(諸侯)의 아내를 부인이라고 하고 신라에 있어서도 왕의 어머니나 왕비를 부인으로 표기하고 있다. 결국 이 무덤의 주인공이 지체 높은 왕비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여성의 무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이 부부묘의 주인공에 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또하나 남분에서는 ‘주인공’을 추적할 수 있는 사람 뼈 20여편과 이빨 28개가 수습됐다. 분석결과 출토된 이빨 가운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아울러 150㎝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고,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자 그가 사랑했던 젊은 여인이 무덤에 산 채로 묻혀 꽃다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순장된 15세 소녀는 벽화(碧花)?=그러자 어느 발굴지도위원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21대 소지왕이 아닐까요”. 딴은 그럴 듯했다. 신라의 순장제도는 서기 500년 22대 임금으로 등극한 지증왕이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사라졌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의 애인인 16세 소녀 벽화(碧花)가 등장한다. 바로 그 ‘벽화’라는 소녀가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소녀 유골의 주인공이 아닐까.

삼국사기를 보자. 서기 500년 9월 어느날 소지왕이 지방 시찰차 날사군(지금의 영주로 추정)에 갔다. 그때 그곳에 사는 파로(波路)란 사람이 16세 되는 자기 딸을 비단에 싸서 왕의 수레에 넣어 바쳤다. 왕은 먹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알고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펼쳐 보았는데 놀랍게도 눈부시게 예쁜 소녀가 들어있었다. 왕은 놀라 받을 수 없다고 돌려주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잠자리에 들자 그 소녀의 빼어난 미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상사병이 날 지경이었다. 참다못해 결국 몰래 그 소녀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하룻밤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소녀가 바로 벽화이며 관계를 맺고 난 다음 궁궐에 데려다 별실에 두어 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지왕은 이 일이 있고 나서 2개월 후인 11월에 죽었다. 이때 벽화를 순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벽화가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는 점에서 이 ‘소지왕 설’을 부정하는 이가 많다.

◇“부인은 실력자, 남편은 고용사장”=다음으로 17대 나물왕(奈勿王)설과 19대 눌지왕(訥祗王)설에 대해. 먼저 나물왕이란 주장. 16대 흘해왕(訖解王)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13대 미추왕(味鄒王)의 조카인 나물이 왕위에 오른다. 또 미추왕의 딸은 나물왕의 비가 된다. 그러니까 4촌간으로 왕과 왕비가 된 것이다. 이 경우에서 볼 때 나물왕의 비(妃)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은 미추왕의 적통 직계 딸이고 왕은 조카이기 때문에 왕손에 있어서 신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돌아간 나물왕과 후에 돌아간 왕비의 무덤에 묻은 부장품에 차별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러한 신분 차이 때문에 왕비의 무덤에는 순금제의 금관을, 왕의 무덤에는 그보다 낮은 금동관을 묻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남분이 조성된 시기는 왕이 죽은 서기 402년이 된다는 의미.

그리고 서기 457년에 죽은 눌지왕이라는 주장. 그러나 이 설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서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로 편년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발굴당시 조사원으로 일했던 박영복 현 경주박물관장의 정리는 재미있다.

“이런 가정은 어떨까요. 남자가 성골로서 왕이 되었지만 지위가 더 높은 부인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을 가능성. 그렇다면 왕은 지금으로 치면 고용사장이 아니었을까요”

갖가지 흥미로운 추측만 무성한 가운데 황남대총은 그 엄청난 위용만을 뽐낼 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발굴단은 당시 60대 남자·15세가량의 소녀 유골을 발굴이 끝나자마자 봉안함에 넣어 다시 무덤속에 파묻고 말았다. 정중한 봉안식과 함께. 당시는 인골을 고고학적 유물로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골을 함부로 한다는 경주 김씨 문중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유전자 분석이 고고학의 중요한 분야가 되는 오늘날 발굴이 이뤄졌다면 주인공을 가릴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관 련 기 사] 秦시황릉 도굴 막으려 1만여명 생매장

우리가 흔히 쓰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나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엔 순장(殉葬)이라는 비인간적인 사연이 담겨있다.

다 알다시피 결초보은은 ‘남의 집 첩으로 들어간 딸의 순장’을 막아준 사람을 위해 딸의 아버지가 은혜를 갚았다는 고사이고 미망인은 죽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했다는 자책을 담은 말이다.

지체 높으신 분들이야 사후세계를 믿고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나를 모시라는 뜻에서 순장제도를 집행했겠지만 당하는 쪽의 입장이야 어땠으랴. 이은석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신라 지증왕 3년(502년) 법으로 금할 때까지 순장제도가 특히 경주 쪽에서 상당수 행해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황남대총 남분에는 15세 소녀뿐 아니라 8~9명이, 북분에는 총 10명이 각각 순장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은석씨에 따르면 황남대총 남·북분 목곽묘에는 순장자가 끼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들이 각각 10여점씩 흩어져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제도가 지도자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진(秦)나라 기록에는 무공(BC 698~678) 20년 처음으로 66명을 순장했다고 돼있다. 진 목공이 서거한 BC 621년엔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다. 177명이 순장됐는데 그 가운데는 엄식, 중항, 침호 등 내로라하는 충신들이 포함돼 있었다. 순장제도는 진 헌공 원년(BC 385)에 폐지됐는데 진시황이 죽고난 뒤 즉위한 2세 황제 호해때 다시 등장했다.

그는 시황제의 첩과 지하황릉을 만든 기술자들을 포함하여 무려 1만여명을 생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장중한 장례가 끝나고 부장보물들이 다 묻히자 지하황릉을 조성한 기술자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나머지 문을 폐쇄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라나 어쨌다나. 그 후 한대~원대까지는 순장제가 사라졌다가 명대에 부활했으며 성조가 죽은 뒤에는 3,000여명의 비빈을 순장했다.

하지만 자업자득. 민심을 얻을 수 없으면 천하를 얻을 수도 없는 것. 앞서의 진(秦) 목공이 충신들을 순장하자 군자들은 혀를 끌끌 찼다. “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없었다. 죽은 후에 백성들을 버리고 어진 신하를 순장시켰기 때문이다. 고대의 선왕들은 죽은 후에도 좋은 도덕과 법도를 남겼거늘…”.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8월 11일 17:36:55
 

[관 련 기 사] ‘화랑 중의 화랑’ 문노

‘미스 신라’가 미실이라면 ‘미스터 신라’는 문노.

이종욱 서강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미실은 왕 3명(진흥·진지·진평왕)과 태자(동륜),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모두 8명을 성의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과 화랑도 조직을 쥐락펴락했던 신라 최고의 여인.

반면 AD 579년 8세 풍월주에 오른 문노(536~606년)는 화랑정신의 표상이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화랑중의 화랑’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로 추앙했을 정도다. 당대 화랑도는 7세 풍월주 설화랑부터 파가 나뉜다. 설화랑의 화랑도는 향가와 청유를 즐겨 ‘운상인(雲上人)’으로, 8세 풍월주가 된 문노의 화랑도는 무사와 호탕한 기질을 자랑했기에 ‘호국선(護國仙)’으로 각각 일컬어졌다.

삼한통합을 이룬 ‘화랑 정신의 전형’인 문노의 행적을 보자. 554~579년 문노가 백제·고구려·북가야를 잇달아 치고 큰 공을 세웠으나 상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부하들 가운데 불평하는 자가 있자 크게 꾸짖었다. “상벌이란 소인의 일. 그대들이 날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문노는 진흥왕이 급찬의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의리’ 또한 끝내줬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 사다함이 가야원정을 떠나며 동행을 요청했지만 문노는 “어찌 어미의 아들로 외가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하고 거절한 의인(義人)이었다.

부부관계도 타의 모범이 됐다. 어찌보면 ‘공처가’ 소리를 들을만 했다. 사소한 일까지 아내(윤궁)에게 물어보았다. 남들이 “초년의 기상이 없어진 게 아니냐”라고 힐난하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왕년엔 그런 사람들을 흉봤는데 지금 보니 아니야. 너희들도 장가 한번 가봐”. 보다못한 부인이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은 술도, 색(色)도 절제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첩 하나 두기를 권했다. 문노의 변. “색을 좋아하면 당신이 질투할 것이요, 술을 좋아하면 당신이 할 일이 많을 텐데…”

화랑세기는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했고, 청탁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졌다. 낭도들이 죽음으로 충성을 바쳤다. 이로써 사풍(士風)이 일어나 꽃피웠으니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텄다”고 칭송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8월 18일 15:58:14

[한국사 미스터리](15)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름지기 충도(忠道)를 맹세한다”=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즉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느냐가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글쓴 연대가 확실하게 되면 내용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된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면 60년, 120년, 180년 앞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관 련 기 사
] 결혼동맹은 약소국 가야의 생존전략?

다국적 유물로 추론해 본 고대의 외교전

송학동 채색고분의 주인공이 소가야 왕에게 시집온 왜(倭)국 여인이라는 설은 아직 ‘문제제기’ 단계이다.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화랑세기는 8세 풍월주 문노(536~606년)의 어머니가 야국왕(왜국왕)의 공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문노공의 어머니가 가야국 문화공주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록을 근거로 “송학동 채색고분의 주인공이 문노의 어머니가 아니냐”고 단정짓는 것은 물론 ‘난센스’. 다만 신라와 고령 대가야간 결혼동맹을 맺은 기록을 주목해보자. 그렇다면 왜도 외교적인 목적으로 가야에 공녀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522년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자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냈다. 대가야 입장에서는 백제의 고립작전을 피하기 위해 신라와의 결혼동맹을 제의했고, 신라는 가야통합의 계기로 보고 선뜻 받아들인 것이다. 이 이벤트는 일본서기가 “가라왕(가야왕)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 100인의 시종을 함께 보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성대한 국제결혼이었다.

그런데 이 결혼동맹은 동상이몽을 펼치던 두 나라의 이해가 엇갈려 파탄나고 말았다. 당시 대가야 이뇌왕이 결혼동맹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신라인 시종 100인을 각 지방에 분산배치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신라 법흥왕이 비밀리에 이들에게 신라의 의관을 입으라고 지시, 신라의 위엄을 과시해 외교적인 분란을 일으키면서 파탄난 것이었다.

당시 가야는 신라·백제·고구려·왜 등이 국운을 걸고 각축을 벌인 쟁탈의 요소였다. 낙동강은 물론 섬진강을 끼고 있어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교통이 발달했고, 왜와의 교역창구를 이루고 있었던 게 그 이유. 특히 이른바 ‘금관가야’는 예로부터 철의 생산지였으며 동아시아 철 공급의 젖줄이었다.

송학동 고분 발굴자인 이동주 동아대 박물관 연구원은 “신라가 철 공급지인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를 장악하자 철을 잃지 않을까 염려한 백제와 왜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섬진강과 낙동강 유역의 중간)인 고성의 소가야를 달래기 위해 연합전선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왜가 흔들리는 소가야왕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공녀를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송학동 고분에서 다국적 유물이 나오는 것은 바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던 약소국 소가야의 고민을 상징하는 드라마틱한 증거가 아닐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8월 25일 15:58:50

[한국사 미스터리](16) 고성 송학동 ‘채색고분’

“무덤 안이 온통 빨개요. 빨리 와봐요”

늦더위가 한창이던 2000년 8월27일. 일요일인데도 필자는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의 급박한 전화연락을 받았다. 긴급 발굴 지도위원회였다. 긴급 지도위는 ‘깜짝 놀랄 만한 발굴거리’가 생겼을 때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열리는 것. 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가뜩이나 1980년대부터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곳이 아닌가.

일출의 광채 같이 나타난 채색고분=필자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발굴현장으로 날아갔다. 현장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터널처럼 마련된 널길, 즉 연도를 따라 무덤방인 석실(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온통 붉은 빛이었다. 전등 불빛에 비친 무덤 내부 천장과 주변은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보이는 광채 같았다.

실로 발굴 인생 30여년에 처음 보는 채색고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채색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한다. 규슈지역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110여기의 무덤에서 확인된, 일본 특유의 무덤내부 장식이다.

“마치 일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요”. 심봉근 교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본 규슈대에 유학하여 일본 고고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의 채색고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채색고분이 이곳 고성에서 확인되다니.

남아있는 부장유물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가야는 물론 신라·백제 토기와 함께 일본의 토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 발굴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가야·신라·백제·왜 문화가 ‘총집합’한 고분=문제가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란으로 ‘민감했던’ 송학동 고분인데 느닷없는 채색고분 발견으로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열도에 보이는 채색고분이 왜 이 지역에 나타나느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야·백제·신라·일본계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발굴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나라에 유적답사차 나와 있던 일본 고고학 관련 연구자들이 일정을 바꿔 현장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그만큼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군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은 이같은 논란 속에 지난해 6월30일, 3차의 발굴조사를 끝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는 일단락됐다. 그 결과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쟁은 종식됐다.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방후원분’의 ‘후원(後圓)’으로 주장됐던 후원분의 위치에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양식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을 중심으로 모두 17기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방(前方)’부로 생각됐던 곳에는 바로 채색고분인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또 이들 무덤 사이에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종합하면 이 고성 송학동 제1호 고분은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등 3가지 무덤 형태가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그런 만큼 외형상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지,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가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형식이 모여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는 이 고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흥미롭다.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그렇다면 과연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일단 이 고분에서 가야·백제·신라는 물론 일본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고분의 ‘다국적’ 출토 유물에서 보듯 고성은 주변과 나아가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여기서 일본식으로 붉게 칠한 ‘굴식 돌방무덤’과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을 주목하자. 먼저 채색된 ‘굴식 돌방무덤’. 이 형태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장식고분의 한 유형임을 감안하자. 그렇다면 피장자 역시 일본과 연관있는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다음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 소가야는 서기 532년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발굴단은 바로 이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소가야 마지막 임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소가야는 가야연맹체 가운데서 해상 루트를 통해 신라·백제·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교류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결국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인 소가야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왕비가 채색고분인 ‘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 아닐까. 이른바 ‘부부묘의 개념’이다. 왜 일본식 채색고분(굴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보는가. 심봉근 교수는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고 밝혔다.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주변국가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만그라스는 4~5세기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지역의 고급 물건들이 교역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왕비는 왜에서 시집온 여인?”=뿐만 아니라 채색고분 안에서 유구열도(琉球列島·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조개인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수습된 것도 이러한 교역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무역상들의 상주지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고성이란 가야지역에 신라계·백제계·일본계 등 ‘다국적 유물’이 나타나고, 그와 함께 일반적인 가야묘제와는 다른 특수한 묘제가 마련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규슈지역 유력집단의 여성이 소가야 왕에 시집와 죽음으로써 마련된 묘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나서 고성에서는 옛 고성의 이름찾기운동 세미나가 열렸다. 즉 가야연맹체 가운데 ‘작은 가야’라는 뜻인 ‘소가야’라는 명칭은 유적발굴조사를 통해 봐서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소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서 5가야에 대한 설명 중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고성이 신라에 통합되고 나서 고자군(古自郡)이라고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란 표기가 있다. 따라서 소가야보다는 원래의 이름인 고자미동국, 또는 고자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유적발굴조사가 이루어지다 보면 이를 통해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등한시했던 고대사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하려는 새로운 노력의 한 형태라 할 것이다.


[관 련 기 사
]2,200년전부터 재활용품 애용?

거울 만들려다 실패 낚시바늘로

묘 주인은 공장책임자일 가능성

세형동검 거푸집 발견으로 2,200여년 전의 세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 조상들은 그때부터 ‘재활용품’을 애용했다. 완주 발굴 거푸집은 처음에는 청동꺾창 제작용으로 만들어졌다가 훗날 청동검 제작용 틀로 재활용됐다는 게 발굴단의 분석이다.

완주 거푸집의 ‘재활용설’을 부인하고 있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 같은 이도 “숭실대 소장 거푸집 중에는 재활용품이 있다”고 한다. 즉 청동거울(다뉴세문경)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뒤 뒷면에 쌍·외 낚시바늘 틀을 뜬, ‘재활용품’(사진 위)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 재활용인지, 다용도 틀인지는 몰라도 청동도끼를 만든 거푸집 가운데는 청동못과 낚시바늘의 틀도 함께 보이는 것도 있다.(사진 아래) 청동기 전문가인 이건무 관장은 또하나 수수께끼를 던진다. 세형동검 거푸집 같은 대량생산용 틀에서 제작했다면 똑같은 동검이나 동꺾창 등이 나와야 하는 게 옳다. 그런데 어떤 무덤·주거지에서도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같은 거푸집에서 만든, 똑같은 형태의 청동유물이 단 한차례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컨대 무덤에서 일괄로 청동검이 수십점 나온다면 그 중에

는 똑같은 제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없어요. 수십년 동안 전국의 출토유물을 그렇게 샅샅이 뒤져보아도…”

이관장도 “제사용 혹은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단 한개씩만 만든 게 아닐까”하고 막연히 추측만 할 뿐. 그는 “혹 이 갈동유적이 그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하고 기대감을 안고 있다. 그는 최근 발 굴단이 갈동유적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1㎞ 떨어진 덕동유적에 대해 벌인 지표조사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청동끌 제작용 ‘거푸집 편(片)과 석촉 편’이 수습된 것.

“세형동검 거푸집이 토광묘, 즉 땅 속 깊은 곳에서 발견된 것인데 비해, 이 청동끌 거푸집 편은 지표면에서 수습됐잖아요. 본격적인 발굴 결과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거푸집이 쏟아질 수도…”. 이관장의 상상력은 계속된다. 혹 청동끌 거푸집이 나온 이 덕동유적이 세형동검·청동끌 등 당대 최고급 청동제품을 만든 생산공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번에 세형동검 거푸집이 발견된 갈동의 토광묘 주인은 당대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던 거푸집 생산공장의 최고기술자가 아니었을까. 그 과학자가 “이 세형동검 거푸집을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내리지 않았을까. 이렇듯 야트막한 구릉지대인 완주 일대의 청동기 유적은 2,200여년 전 세계의 비밀을 풀 ‘열쇠유적군’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9월 15일 15:53:55

[한국사 미스터리](17)완주 갈동 거푸집 발굴의미

“아무 것도 없는데…. 왠지 찜찜해. 파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 감이 드는데…”

지난해 4월 어느날,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야트막한 구릉(해발 26~42m)으로 이뤄진 갈동 현장. 전주시 관내 국도 우회도로(17.5㎞) 건설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 조사팀의 고민은 컸다. 지표조사 결과 아무런 고고학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도로공사를 진행시켜도 무방했다. 그러나 ‘뭔가 감을 잡았던’ 조사단은 고심 끝에 ‘선(先)발굴’의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단의 그 ‘감(感)’이 엄청난 고고학적인 성과를 잉태할 줄이야. 지난 7월부터 본격발굴에 돌입한 김건수 연구원 학예실장·한수영 책임조사원은 그야말로 ‘행운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살 파보니 그야말로 깜짝 놀랄 ‘물건’이지 않겠어요.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 거푸집을 직접 보다니요. 얼마나 황홀한지…”. 고고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렇게도 풀 수 없었던 고대사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감’으로 찾아낸 청동기 대량생산의 역사=공개된 청동 거푸집 1쌍. 거푸집은 용범(鎔范) 혹은 합범(合●)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를 붙여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검(靑銅劍)을 제작하는 틀이다. 이들은 납석돌(蠟石·석필 같은 돌)로 만들어 졌는데, 움무덤(土壙墓)에서 수습된 것이다. 왜 고고학계가 흥분하는가. 바로 이번 거푸집의 발굴이 ‘기록부족, 자료부족증’에 시달려왔던 한국 청동기 문화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발굴된 거푸집에서 만들어 진 단검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일컬어진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대부분 확인되고 있으며 위로 만주, 아래로는 일본의 규슈지방에서도 출토 예가 보고되고 있다. 그래서 이 동검을 한국식 동검(韓國式銅劍)이라고도 한다. 이 단검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제작·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단검을 대량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틀, 즉 거푸집이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지금까지 한반도내에서 확인된 청동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용인 초부리·전남 영암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고품이거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다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전(傳)영암 출토 거푸집’의 취약점=특히 영암 출토로 전(傳)하는 거푸집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학술적인 조사발굴을 거치지 않은 약점을 안고 있다. 이 영암 출토 청동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다. 이 거푸집 세트로는 청동단검·청동꺾창·청동창·낚시바늘·청동침·청동소형도끼·청동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청동제품 모두를 제작·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량의 거푸집이 숭실대학교에 소장되게 된 과정을 보면 무척 흥미롭다. 1960년대 초 국립박물관 신참 학예사였던 이난영 선생의 회고.

“한 골동품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와서 이 거푸집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했어요. 김원룡 연구과장·윤무병 연구관 등 선생님들은 안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박물관에는 유물구입비가 한푼도 없었어요. 그러니 피눈물을 머금고 돌려보냈을 수밖에…. 기가 찰 노릇이었죠”.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돈이 없어 이 귀중한 물건들을 사지 못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1급 유물과 골동품의 차이는?=그랬던 거푸집 세트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박사의 손에 돌아갔다. 안타까워하던 김원룡 선생 등은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당시 골동품상 장모씨로부터 이 거푸집 세트를 구입한 김양선 박사는 구입시 골동상으로부터 발견한 장소와 발견한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알려고 했으나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라는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얘기만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토지를 확인하기 위해 골동상이 알려준 곳으로 가서 수소문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출토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김박사는 세상을 떴다. 이 청동 거푸집은 이렇게 되어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영암 출토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이라 했다. 비록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청동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만들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1986년 국보 제231호로 우선 지정했던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 어떤 유물이라도 그 유물 자체의 학술적인 가치는 출토지가 명확하고 어떠한 조건, 즉 무덤 혹은 집터 또는 그 외의 다른 시설에서 출토되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유물들과 같이 출토되었는가가 알려져야만 학술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걸 고고학계에서는 1급 유물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것은 파편 1점도 유물이 되지만 발굴조사 되지 않고 도굴된 것이거나 골동상에 거래되는 모든 문화재는 말 그대로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정확한 출토지를 아는 것. 최초 수집자인 김양선 박사 역시 생전에 모든 노력을 쏟았으나 결국 확인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뒤를 이어 제자인 숭실대학교 임병태 교수 역시 스승의 뜻을 따라 출토지 확인 조사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 역시 세상을 떴다. 이분들은 그만큼 이 거푸집에 대해 학술자료로서의 생명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재활용의 지혜’ 실천한 2,200년 전 우리 조상들=그랬기에 이번 청동단검·청동꺾창 거푸집 발견은 가히 혁명적인 성과일 수밖에 없다. 이 거푸집이 갈동의 청동기 후기 움무덤, 즉 토광묘(土壙墓)의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고고학적 발굴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에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발굴’로 분명하게 증명하게 된 것이다. 출토지(전북 완주)와 유구성격(토광묘), 그리고 출토상태(한 개는 서있고, 한 개는 넘어진 상태)와 공반 유물까지 완벽한 구비된….

이 거푸집은 좁은 단검, 소위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만드는 한 쌍으로 된 합범이지만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청동과·靑銅戈·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낫처럼 말에 탄 적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음이 확인됐다. 말하자면 청동꺾창은 반쪽의 틀만 발견된 것이다. 이 이유는 발굴자의 견해와 같이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이 먼저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한쪽이 제작과정에서 파손되고 난 후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틀을 제작하는 돌(납석)을 구하기 어려웠거나, 아니면 규격자체가 세형동검 제작에도 딱 맞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시 다른 용도로 재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관 련 기 사] 익산은 서동의 세력 근거지

◇백제 말기 ‘2개의 왕도’가능성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서울의 남쪽 못가에서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이다”(삼국유사). “서동이 마를 캐어 어머니를 모실 때 금 다섯을 얻어 산 이름이 오금산(익산토성이 있는 산?)이 되었다”(익산군지).

무왕이 용(龍)과 관계있으며, 그의 고향이 익산이라는 걸 알려주는 기록이다. 만약 무왕이 익산천도 혹은 행정수도 건립을 결행했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왜 불구대천의 원수인 진평왕의 딸과 결혼했을까.

먼저 6~7세기의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성왕 29년(551년) 한강 회복을 위해 신라 진흥왕과 연합,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을 양분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2년 뒤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 땅 6개군을 점령했다.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치다가(554년) 살해된다. 백제로서는 과거의 동맹이던 신라 진흥왕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백제는 전통의 주적(主敵)인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까지 원수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계속 괴롭히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내막이다. 이 치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제는 진평왕에게 많은 황금을 주었다. “서동은 금을 모아 산처럼 쌓아놓고는 용화사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려 하루사이에 신라왕실에 옮겨놓았다”는 기록(삼국유사)은 굴욕적인 결혼동맹의 뒷얘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에 따르면 무왕은 즉위 전반기에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익산을 왕도로 삼았다. 그렇다고 사비(부여)를 구도(舊都)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익산과 부여 사비성 등 2개의 도회(都會)를 모두 왕도로 썼다는 것이다.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무왕이 부인(선화공주)의 말을 듣고 용화산 밑에서 지명법사를 통해 미륵사를 지었다”(삼국유사)는 기록. 그런데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은 당대 고유의 용신앙과 대중신앙인 미륵하생신앙(미륵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을 믿었다. 나종우 원광대 교수는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법사는 익산지역 불교의 대표자이고 익산의 여론몰이를 담당하는 자문역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결국 무왕은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증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이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9월 22일 15:58:48

[한국사 미스터리](18) 금마면 왕궁리 유적

“신라 진평왕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서동은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고 시작되는 설화는 누구나 다 아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다. 그리고 전북 익산시 금마면은 오래 전부터 서동(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신수도 구상에 따른 천도였거나 혹은 별도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던 곳이다.

쌍릉은 무왕부부의 무덤=반경 5㎞ 이내에 그걸 뒷받침할 만한 유적들이 집중돼 있다. 무왕 때 조성된 미륵사(彌勒寺)는 비록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삼국 최대의 가람을 갖추었던 곳. 또한 주변의 익산토성과 제석사지는 물론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라고 전해지는 익산쌍릉(益山雙陵) 등 많은 백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명이 왕궁리(王宮里)라는 점도 심상치 않은 대목.

우선 익산쌍릉이 무왕부부의 묘일 가능성은 1915년 도굴된 이 무덤이 일본인이 의해 조사됨으로써 제기됐다. 즉 무덤내부의 구조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구조와 같고, 따라서 무덤은 왕릉급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즉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훗날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익산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이렇게 쌍릉의 목관이 백제의 왕실에서 행해진 장례전통(일본산 목재를 쓴 것)을 따랐다고 볼 때 왕릉급일 수밖에 없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5층 석탑을 두고 벌어진 논쟁=무왕의 천도·별도설과 관련, 또하나 주목을 끈 건 왕궁리 5층 석탑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탑은 백제시대의 탑인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 5층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이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고려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고려의 탑’으로 비정되고 있었다.

1965년. 이 왕궁리 5층 석탑(보물 44호)의 해체 복원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2월5일 기대하지 않았던 탑의 사리장치(舍利藏置)와 그에 따른 장엄구(莊嚴具)들이 발견됐다. 5일 뒤인 10일에는 건축물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도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 더구나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은 ‘품(品)자’형으로 3개의 사리공을 갖췄으며, 그 중 하나의 사리공에서 광배(光背)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1점과 금동방울 1점이 확인됐다.

이 사리장엄구가 어느 시대의 것이며, 과연 석탑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 새삼스럽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탑을 해체보수했던 발굴단은 사리장엄구 가운데 금동여래입상의 양식이나 사리병 등의 유물은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물론 탑 자체는 고려시대보다 앞서는 시기에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한 것으로 정리했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서기 639년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그러던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발견했다.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적힌 자료였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의 하나인 노산주에 속한 지모현(枳牟縣)의 지모와 연결되고, 또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그곳이 금마(金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황수영 박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역사학 대회에서 이 설을 처음 제기했다. 그는 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느 저명한 역사학자가 “문헌적인 근거없이 무슨 소리냐”는 요지로 일축당했다. 그렇게 수모를 당한 황박사였기에 ‘관세음응험기’ 발견을 반겼고, 이를 학술지(백제연구)에 소개한 것이다.

왕성임을 알리는 고고학적 조짐들=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조사도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진행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설, 혹은 행궁설, 행정수도 경영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마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 선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서 통일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탄소측정연대(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 결과 서기 535~630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제 말기에서 통일 초기에 해당되는 유구는 석탑이 있는 지역의 성벽 유구와 부속된 많은 건물터가 해당된다. 출토된 백제토기와 기와류의 질은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다. 또한 중국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고,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연화판문청자병(蓮花瓣紋靑瓷甁) 조각과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또 ‘5부명’ 인장와(백제는 都下에 5부를 두었다)와 ‘수부(首府·수도를 뜻함)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

왕궁리에서는 또 부소산성에서나 귀달린 토기(耳杯)가 출토됐다. 이런 토기들은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에서 구워 부여 및 왕궁으로 공급되지는 않았을까.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서는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조사됐고, 여기에서 다량의 도가니와 도가니에 부착된 금(金) 슬랙이 확인돼 이 유적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익산은 백제말의 행정수도=그리고 관심의 초점인 5층 석탑은 이 석탑이 통일후기에 마련되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석탑 이전에 목탑이 존재한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목탑이 마련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백제 말기에 성벽과 같이 마련되었던 건물들이 없어지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이곳이 사찰구역으로 바뀌면서 먼저 목탑이 마련되었던 것을 통일신라기 후대에 들어와 석탑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토층조사 결과 통일기층에서 목탑의 제일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에 품(品)자형의 사리공이 발견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초석은 목탑에서만 쓰이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발굴 성과는 이곳 익산 금마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이 무왕의 천도설(遷都說)이나 별도설(別都說)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 충분히 평가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가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538년) 서기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기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바로 창건했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당시 금마 일대는 수도인 부여에서 별도의 수도, 즉 요즘 말하는 일종의 행정수도로서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한국사 미스터리](19)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인 1873년, 일본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

신궁의 다이쿠우시(大宮司·주지격)인 간 마사모토(菅政友)의 손이 떨렸다. 이 신궁은 신무(神武) 천황이 나라를 평정하는 데 사용했다는 신검(神劍)을 모신 곳이었다. 이 신궁에는 이른바 절대 가서는 안된다는 금족지(禁足地)가 있고, 창의 일종인 6차모(六叉●·칠지도)라는 신기한 물건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런데 이 물건은 오랫동안 특수상자 속에 들어 있어 어느 누구도 열면 ‘저주를 받는다’는 몸서리쳐지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간 마사모토가 연 ‘판도라 상자’=그런데 간 마사모토가 그걸 금족지 남서쪽에 있는 ‘신고(神庫·무기보관창고)’에서 찾아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떨렸을까.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본 간 마사모토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 ‘6차모’가 확인된 것이었다. 이 신성한 칼은 녹이 심하게 슬었으나 그 녹 사이에 반짝거리는 금빛을 확인하고는 또한번 경악했다.

글자를 예리하게 파낸 뒤 금을 밀어넣어 새긴 이른바 금상감(金象嵌) 기법의 글자들이 보였던 것이다. 계속 닦아내자 나타나기 시작한 글자, 글자들.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놀랍게도 앞면에는 칠지도(七支刀)가 만들어진 내력과 제작한 연월일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칠지도는 몸체의 좌·우에 어긋나게 양날을 가진 각 3가닥씩의 가지, 즉 여섯 가지에다 몸통 상부에 마련된 양날까지 모두 7개의 검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명문은 이랬다. 앞면에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百兵宜供供候王□□□□作’ 등 34자와 뒷면에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등 27자.

간 마사토모의 명문해석을 보자. 그는 ‘泰? 四年(태? 4년)~’으로 시작하는 명문의 제일 첫머리 글자인 ‘태’ 다음 글자의 판독을 ‘始(시)’자로 보아 이를 ‘泰始(태시)’로 판독했다.

그는 이 ‘태시’를 중국 서진(西晋·265~274년)의 연호로 보면서도 진 무제(武帝) 4년인 서기 268년에 맞추지 않고,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인 서기 252년에 맞추어 해석했다. 그 이유는 ‘신공황후 52년’ 기록에 보이는 내용 가운데 “백제왕이 왜왕에 칠지도(七枝刀)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왕이 바친 헌상품?=그로부터 10년 뒤인 1883년 중국 지안(輯安)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이 발견됐다. 일본학계는 이 두 금석문이 고대 한·일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증거라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들이 보기에 이 두 금석문의 명문 해석은 당시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을 뒷받침하는 ‘자지라지는’ 물증이었다.

그후 간 마사모토의 ‘태시 연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나왔지만 임나일본부설은 흔들리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 ‘태? 4년’은 ‘태시’가 아니라 ‘태화 4년(東晋 연호)’인 서기 369년이며,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록된 연대(신공 49년·서기 249년)는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즉 이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은 ‘2주갑(1주갑은 60년)’ 즉 120년의 연대 차이를 인정하여 연대를 내려야 하고 이에따라 369년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원래 일본서기 연대는 120년 정도 깎아내려야 우리나라 삼국의 연대에 부합될 만큼 조작적인 냄새를 피운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이 ‘369년 설’이 매우 설득력을 얻었다.

그렇게 따지면 신공 49년은 서기 369년이며 그것은 바로 중국의 태화 4년에 해당되기 때문. 그런데 이 신공 49년의 기록을 보면 “‘야마토 정권’이 신라를 치고, 낙동강 중류 이남의 7국을 평정하여 ‘枕彌多禮(침미다례)’를 백제에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칠지도는 백제왕이 “백제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에 영원히 충성을 서약하는 증거로 만들어 바쳤다”는 게 수정된 주장이다.

이로써 일본서기의 신공기에 보이는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출병과 임나지배는 또 한번 부동의 사실로 인정됐으며, 일본에서는 이 태화 4년 주장을 굳건히 믿어왔던 것이다.                                                                                                                  

◇백제의 하사품이 맞다=어쨌든 일본학자들의 일방적인 연구가 계속됐지만 우리 학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1963년 북한의 김석형(金錫亨)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백제 헌납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주장을 발표, 논쟁의 도화선을 댕겼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학자들이 주장해온 태화라는 연호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연호가 아닌 백제 고유의 연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 칠지도는 5세기대 ‘황제’의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후왕’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있는 소국의 백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지도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한에서는 이병도가 1976년 “역시 태화라는 연호는 백제의 고유의 연호가 분명하고 백제의 왕세자가 하위자인 왜왕에게 내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 뒤 그 연대는 서기 372년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까지 이 칠지도를 두고, 한·일간에 백제가 일본왕에게 바쳤다는 ‘헌상설’과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내려주었다는 ‘하사설’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역시 칠지도 명문의 연호인 ‘태?4년’을 백제 고유의 연호로 본다면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즉 신공기 49년과 52년 기사)는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과 27년(372년)에 해당된다. 근초고왕 24년인 서기 369년에는 고구려 2만 대군이 침입했으나 5,000여명을 잡아 죽이고, 급기야 371년에는 고구려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그야말로 이때는 백제의 국력이 최전성기였다.

그렇게 강국이던 백제가 일본의 야마토 정권에 칠지도를 만들어 받친다는 것은 망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우에다 쇼죠(上田正昭)가 1971년 주장한 바대로 ‘상위자’인 백제왕이 ‘하위자’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 작품=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 때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제작연대. 명문 가운데 제작 월일인 ‘6월16일’ 즉 병오(丙午)일에 해당되는 날짜를 역산해 보면 서기 367년이 이에 해당된다. 이 때는 근초고왕 재위 22년이 되는 해.

그런데 366년의 일본서기 신공기의 내용을 보면 “근초고왕이 철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철정(鐵鋌)을 왜에 보낸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때 고흥을 시켜 백제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한자를 일본에 전한 사실들을 상기하자.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백제는 367년에 칠지도를 만들어 왜에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진품을 공개해서 한·일공동으로 심층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끊임없이 피어나는 명문조작설을 규명하고,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때다.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나름으로 해석한다.

“태화 4년(근초고왕의 연호·서기 367년) 6월16일 병오일에 백번 담금질하여 단조한 백련광(百鍊鑛)으로 칠지도를 만드니 어떤 침략병이라도 물리칠 수 있어 후왕에게 줄 만하다. 선세 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인 기(奇)가 성음으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드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관 련 기 사] 간은 왜 ‘칠지도 상자’를 열었나

최초 발견자 간 마사모토는 왜 ‘저주의 판도라 상자’를 자청해서 열었을까. 불가사의 같은 행적은 최인호 같은 소설가들의 풍부한 자료(‘잃어버린 왕국’)로 인용되었다.

간 마사모토의 이력을 보자. 1824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중국사에 관심을 가졌다. 중국 서예에 능통했다. 그는 내무성 역사편찬국(요즘의 교육부 편수관)에서 일하다가 대궁사에 취임한다. 왜 그랬을까. 왜 유망한 자리를 두고 신궁의 주지를 자처했을까. 그는 반짝거리는 칠지도의 금상감 명문을 해독하려 예리한 칼로 녹을 긁어냈다. 아무런 편견없이 이 상황을 보존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 명문을 조작했다면….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

그가 이 칠지도를 발견할 당시의 나이는 50세였다. 4년간 이소노카미 신궁 대궁사로 일하다가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뒤 1894년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문제는 그가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신봉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칼로 긁어 검을 훼손하고 조작한 음모설’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칠지도가 발견된 10년 뒤인 1884년, 만주 지안에서 확인한 광개토대왕 비문도 조작설에 휩싸여 있다.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조작설을 주장,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이 광개토대왕 비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을 “왜가 신묘년에 건너와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라를 점령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비문 중 ‘渡海破’ 등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명색이 학자인 간 마사모토가 이같은 조작을 감행했다는 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자. 막부 말기에 미국에 굴욕적인 개항을 강요당한 일본은 1868년 쿠데타를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단행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계가 창출하려 한 것은 일본의 민족적 우월성이었다. 그렇다면 이 무렵 칠지도의 발견도 이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어떤 연구자는 칠지도의 발견과 팽팽한 논쟁은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이 낳은 망령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칠지도는 지금도 절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런 칠지도의 복제품(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74년 일본문화청에 41만1천엔을 주고 의뢰하여 만든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우리는 그 복제품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09월 29일 15:57:40

[한국사 미스터리](20)발굴 10년 금동대향로 上

서기 660년 ‘한(恨)많은 왕국’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망국의 왕자 한 분이 일본으로 피란한다. 의자왕의 서(庶)왕자 41명 중 한 분이었다. 그는 일본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둥지를 틀어 백제마을을 가꾸었다. 마을사람들은 신다이(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3년 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 이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날, 바로 그 곁에서는 또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장비의 만행을 피한 백제의 혼=‘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났을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30여년이나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윤무병 충남대 박물관장이 시굴조사에서 유구·유물들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원래 계단식 논이었는데,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에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주차장을 마련하려 했고, 유구·유물 확인을 위해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본격발굴을 위한 조사 예산을 따는 데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 노태섭 과장(현 문화재청장)의 공이 컸다.

원래 92년 시굴조사에서는 건물터와 재를 비롯한 불 탄 흔적, 그리고 금속유물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건물터가 금속제품을 만드는 공방 정도의 건물로 판단됐지, 사찰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의 고민은 컸다. 당장 주차장 공사를 중단시킬 결정적인 유구·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는데 고고학도의 양심상 그냥 공사를 강행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현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의 회고.

“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중요한 유구가 없기에 그냥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뭔가 예감이 이상했던 윤무병 선생 등 전문가들이 ‘딱 한번만 파보자’고 건의했어요. 당시 노태섭 과장은 군말없이 수용했고, 2천만원이 넘는 발굴비를 배정했지요”.

그때 만약 “무슨 소리냐”며 중장비로 싹 쓸어 주차장을 조성했다면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이는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유적정비에서 철저한 사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큰 교훈을 안겨주었다.

◇물구덩이에서 잡은 고고학적 ‘월척’=우여곡절 끝에 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이었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항상 습기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이런 곳에 백제시대의 중요한 시설이나 유물이 묻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현 학예실장)는 그야말로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났어요.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처음엔 광배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어요.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죠”

김종만씨는 즉시 김정완 학예실장과 신광섭 관장에 보고했다. 신관장의 말.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밤 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어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하고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께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께야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폰지로 적셔내면서 1m20㎝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아!”. 발굴단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넋을 빼놓을 정도의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

“자, 다들 정신차려. 빨리 마무리해야 해”. 신관장의 명령에 발굴단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온전하게 발굴해 들어내 놓고도 사실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뭔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뒤에 가서야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이었고,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됐어요.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차츰차츰 드러나는 찬란한 백제의 역사=사실 작업인부를 모두 귀가시킨 뒤 야간작업을 택한 것은 1971년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재판이 된 셈이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 남아 있는 독일 슐리만 부부의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 중요유물이 발견되자 바로 인부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며칠간 강제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중요 유물발굴은 슐리만 부부가 했다. 이 야간작업은 엄청난 발굴 때 혹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미연에 막기 위한 전통인지도 모른다.

수습을 끝내고 사진작업 등 연장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신관장을 비롯한 발굴단의 일성이 터졌다.

“이거 박산로(博山爐·중국 한나라때 향로·박산은 중국인들의 이상향) 아니야?”. 이렇게 잘 만든 물건이라면 응당 ‘중국 것’이라는 문화패배주의가 은연중 배어나왔다. 하지만 중국 것은 이 ‘물건’처럼 섬세하지도, 크지도 않다. 분명 중국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진정 백제의 것이란 말인가.

발굴단은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사 미스터리](21)발굴 10년 금동대향로 下

“정말 기적이었어요. 1,30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녹이 슨 흔적도 없다뇨. 원래 청동제품도 시간이 지나면녹이 스는데, 이 향로는 오랜 세월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부식을 피한 겁니다” 다음날 새벽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간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숨도 멎는 듯했다. 향로는 10일간의 철저한 긴급보존처리를 마친 뒤 22일 현장설명회를 통해 공개됐다.

◇살아숨쉬는 듯한 용과 봉황=향로의 이름은 정양모 관장이 지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였다.

“향로의 받침엔 龍, 꼭대기엔 鳳이 장식됐잖아요. 또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蓬萊·方丈·瀛洲) 중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를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 동고(銅鼓), 종적(縱笛), 소(簫)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또한 뚜껑 전체가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이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 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흥분한 한·일 언론=유물이 공개되자 12월23일자 주요 일간지는 향로기사로 도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언론들도 이 사실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흥분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향로는 물론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체 높이 62.5㎝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발견된 예는 없었다. 그러니 능산리 출토 향로는 분명 세계 최대의 금동향로였다. 향로는 인도·중국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냄새를 제거하거나,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아니면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웠던 그릇. 중국에서는 훈로(薰爐) 또는 유로(鍮爐)라고도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백제의 이 금동향로는 중국의 박산 향로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박산(博山)은 중국 동쪽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의 이상향. 박산향로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 즉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향로를 말한다.

향로는 중국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초인 기원전 3세기대부터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박산향로로 부르게 된 것은 남북조 시대인 6세기쯤부터였다. 그렇다면 이 향로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과연 백제가 만든 향로인가 등 갖가지 궁금증을 낳았다.

발굴단은 언론에 공개할 당시 6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고 밝혔고, 당시 아울러 일본의 모 학자는 5세기 말~6세기 초 설을 주장했다.

그후 백제의 불교예술전성기와 도교가 융성할 시기가 부여에 천도한 후 안정기를 맞은 7세기대 전반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제작 역시 중국산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다만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때 백제가 패망할 당시 긴급히 묻고 떠났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일치하고 있다.

◇중국향로 수준 뛰어넘는 세계 최대·최고의 걸작=1995년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금동대향로의 제작 연대를 추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사리감 제작시기가 위덕왕 때(서기 567년)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리감은 목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견됐다. 이로써 그때까지 공방으로 추정하던 건물터가 사실은 백제왕실의 명복을 비는 사찰 터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향로가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후의 백제왕들 내지는 최고의 귀족급 무덤들이 있는 능산리고분군과 접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의 힘찬 기상과 용의 발톱이 5개라는 점은 백제왕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천자를 상징하는 용의 발톱이 5개, 우리나라 임금은 4개, 일본은 3개라는 설이 고건축 전문가들 사이에 그럴듯하게 퍼져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추론하자면 이 향로는 어디까지나 중국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 오히려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연대는 역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후반, 즉 위덕왕(재위 554~597년)때 만들어 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향로의 해외반출 절대불가’=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일화 한토막. 지난해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하는 ‘국보급 유물 교환 전시전’을 열 때 일본측은 일본에 전시할 우리측 보물 중 백제금동대향로를 첫손으로 꼽고 이 유물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해외전시를 위해선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그런데 위원회에 참석, 한·일양국의 교환유물 목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안휘준 선생(서울대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됩니다. 우리도 해외전시를 금지시킬 중요한 유물 한 두 점은 보유해야 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임금님의 초상화인 영조어진은 안됩니다”. 이난영 선생(동아대 명예교수) 등도 ‘해외반출불가론’에 합류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천황의 초상화 등 천황 관련 유물은 해외전시를 불허한다. 전시 포스터 모델로 ‘백제금동대향로’ 사진을 놓고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치려던 일본측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그만큼 일본도 백제금동대향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굴 10년이 지났어도 아직 이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오는 11월 13~15일 대전과 부여에서 발굴 1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이번 기회에 베일에 싸인 백제금동대향로의 신비를 한꺼풀씩 벗겨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관 련 기 사] 숱한 화제·이야깃거리 낳아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가치만큼이나 숱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10·26 개토제 및 고유제’ ‘12·12 발견’이라는 얄궂은 탄생사도 비운의 백제역사를 닮았고, 그 이름을 둘러싼 논쟁도 만발했으며 역동적인 봉황·용 조각은 “요즘 대통령의 고유문양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까지 일었다.

정양모 당시 중앙박물관장의 회고. “향로 꼭대기, 역동적인 봉황문양을 보고는 ‘대통령의 문양’을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향로 봉황과 비교하면 대통령 봉황문양은 어쩐지 맥빠진 느낌이 들잖아요. 그래 장관에게 ‘좀 바꾸는게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그 뒤로 흐지부지됐어요”. 어느 전문가의 솔직한 말.

“어때요? 대통령 상징 봉황 꼬리를 보면 꼭 공작꼬리 같잖아요? 백제대향로 같은 역동적인 봉황이나 용을 보면 꼭 살아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봉황이나 용은 임금이 선정을 베풀 때 출현하는 상서로운 동물. 그러니 요즘과 같은 난세에 한번 대통령의 봉황문양을 백제향로의 힘찬 봉황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발굴 향로가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이름을 얻은 사연도 재미있다. 발굴단은 신선사상의 영향을 강조하며 ‘용봉봉래산대향로’로 이름 붙이려 했다. 그러나 불교미술 전공자들은 향로 몸체에 연꽃문양이 있으며, 뚜껑에 장식된 74개의 봉우리는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으로 보았다. 결국 ‘수미산(須彌山)향로’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골치아프니 문화재위원회가 “차라리 ‘대(GREAT)’자를 붙여 금동대향로로 하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조용중 전주박물관 학예사는 역시 상상의 별천지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로의 인물상을 보면 낚시하는 자, 멧돼지를 향해 활을 당기는 자 등의 장면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사상과는 다르다는 것. 또 바위 위에서 명상하는 자, 머리감는 도사 등은 신선사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선사상에 빠진 진시황제가 순행(巡行)때 동남동녀를 데려고 다녔는데 이 향로에서도 코끼리를 탄 신선은 바로 그런 동자(童子)가 아닌가. 조용중씨는 “악사들의 머리모양을 볼 때, 머리를 땋아 뒤쪽으로 틀어 얹어 한가닥으로 늘어뜨린 백제 처녀들의 헤어스타일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신광섭씨는 “무왕(636년)이 연못을 만들고는 연못 속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면서 “백제향로는 삼신산 중 바로 그 방장산을 모방한 것이 아닐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0월 20일 15:43:46
 

[관 련 기 사]허망한 백제멸망 상징

왜일까. 그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의 추측.

600년 무렵 창졸간에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되자 스님들은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요량으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은 허망하게 멸망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깊이깊이 잠든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 ‘昌’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 명문은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따님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그는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돌려주어라”라고 의자왕에게 조서를 내렸을까.

신광섭씨는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했다”면서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10월 13일 16:27:56

[한국사 미스터리](22) 경주 호우총의 비밀


신라무덤이 ‘광개토왕 유물’ 품다

“(1946년) 5월14일 맑음. 곽내의 토기와는 완전히 위치를 달리하는 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하였다. 기저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을 일으키게 하였다. 명(銘)은 양각으로 4행 합(合) 16자로서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

해방 이후 첫 발굴을 기록한 ‘호우총과 은령총’ 보고서는 청동용기의 감격적인 출토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이 보고서는 우리 손으로 작성한 최초의 발굴보고서로도 유명하다.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보고서는 1948년 4월10일 을유문화사 간(刊)으로 나왔다. 가격 1,200원(圓)에 500부 한정판이고, 저자는 김재원이라고 돼 있다. “김재원이가 경주에 체류하면서 최순봉이의 안내로…”하듯 존칭없이 ‘○○○이가’하는 표현이 재미있다.

◇신라무덤에 웬 광개토대왕 유물이…=각설하고 당시 발굴단(발굴 책임자 김재원, 제도 임천, 사진 이건중, 기록 서갑록)과 일본인 발굴고문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등은 그 명문내용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신라무덤인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 그것도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수도 경주에 고구려 무덤이 존재했단 말인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 있어서 글자가 새겨진 명문이 있는 유물이 발견되면 누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새겨진 문자를 통해 무덤에 대한 고고학적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명문이 발견되면 그 발굴자는 ‘행운아’로 일컬어질 만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광복 후 국립박물관 주관의 최초 유적발굴조사에서 그런 행운을 잡게 될 줄이야. 당시의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하고 있다.

청동용기 밑바닥 뒷면에 새겨진 명문의 글씨체는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너무도 비슷했다. 같은 사람의 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하다. 발굴보고서는 이로보아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발굴비까지 받아=이렇게 큰 성과를 내기까지 호우총 발굴의 과정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 패망직후인 1945년 9월, 독일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재원 박사가 미 군정청의 통치하에 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하여 초대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문제는 박물관의 그많은 유물이 어디에 박혀있는지 아는 한국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김재원 관장은 아리미쓰를 떠올렸다. 총독부 박물관에서 유일하게 고고학(교토대)을 전공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리미쓰는 일본귀국을 포기하고 한국에 남았다.

이제 우리 손으로 박물관의 문을 열었으니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유물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자연, 발굴경험이 많은 아리미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만큼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키우지 않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첫번째 발굴이니만큼 경주시내에 있는 가장 큰 신라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벌써 경주에서 순금제의 신라금관이 3개나 출토된 예가 있었기에 우리도 훌륭한 신라유물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경험을 차단당한 상황이었기에 이같은 야심찬 계획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아리미쓰를 발굴고문으로 하여 거창한 봉황대가 아니라 이미 윗부분이 파괴된 140호 고분(호우총)을 파보기로 했다. 김재원은 해방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도 일본 도쿄에 있는 미 군정청의 본부인 맥아더 사령부의 발굴허가를 받아내고 발굴비까지 타냈다.

◇신라왕자 ‘복호’에게 준 고구려의 선물=이렇게 해서 호우총 발굴이 시작됐고 12일째 되는 날, 1,500여년 동안 잠자고 있던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단의 의문점은 크게 세가지였다. 명문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져 있는 을묘년(乙卯年)이 어느 해에 해당되는 것인가, 마지막에 쓰여진 호우십(壺●十)의 십(十)자와 16자 명문 위에 있는 우물 정(井) 같은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왜 고구려의 광개토왕 관련 유물이 신라무덤에 함께 묻혀 있는 것일까.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서기 413년에 죽고 난 지 3년째 되는 해로 서기 415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청동용기가 서기 41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게 되었지만 누가 신라에 가져와 묻히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눌지마립간조에 보면 “2년(418년)에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는 기록이 있다. 즉 17대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가 412년 광개토대왕 시절 인질로 고구려에 가있다가 7년 만인 418년 눌지왕 2년에 (박)제상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장례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3년째 되는 해에 상복을 벗는다. 그렇다면 이 청동용기는 역시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이 되는, 즉 탈상하는 해(415년)에 대왕을 기리는 제사용 술을 담는 용기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이 용기를 기념으로 주었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살다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게 되면 이 무덤은 복호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광복후 첫 발굴이자 첫 국제발굴=호우총이 발굴되고 난 후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연구된 결과 무덤이 마련된 시기가 6세기 전반쯤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청동항아리가 만들어진 시기와는 1세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복호가 100살이 넘도록 살다 죽었다고 봐야 하는가. 이 또한 믿기 어렵다.

과연 복호는 언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복호의 형인 눌지왕이 서기 458년에 죽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복호 또한 그 언저리에 세상을 뜬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이 호우총은 신라 내물왕의 동생 복호의 무덤이며 무덤의 조성시기는 기존의 6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 1세기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

또 한가지 마지막 壺●十(호우십)의 의미가 무엇인가. 호우란 술을 담는 용기로 보면 되겠지만 ‘십’의 의미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 ‘십’자가 수량의 표시인지, 어떤 부호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신라에 들어왔던 것이 아닐까.

이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란 점 외에 발굴주관국은 우리나라이고 발굴지도는 일본사람, 발굴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 련 기 사] ‘井’이 뭘까?

“호우 다음의 십(十)자는 전후 국제관계를 보더라도 해석에 곤란한 자인데 이 십(十)자를 다만 여백을 메우는 데 쓰는 의미없는 ‘十字形’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문양이 보이는데 이 역시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본다”

청동용기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글자 혹은 부호에 대해 내린 ‘호우총’ 발굴보고서의 결론이다. 그런데 발굴후 무려 57년이 흘렀어도 이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연구는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 이 #, 즉 ‘우물 井’ 같은 문양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소설가 최인호씨는 ‘왕도의 비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렸다. 즉 이 井자는 고구려의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제대로 된 논문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井’가 새겨진 유물은 지난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확인됐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고구려 토기에는 井, 小, ●,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다”면서 “이들 부호는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井자 문양토기는 일본에서도 묵서(墨書)로 쓴 예도 있는데 이 역시 벽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이 井자 문양은 글자라기보다는 칼로 쓱쓱 그은 형태로 글자로 보기가 어렵다”면서 “무슨 다른 뜻이라기보다는 발굴보고서 내용처럼 여백을 메우는 장식이 아닐까 한다”고 추정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은 “연구없이 추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아마도 그 토기를 만든 사람들의 사인 같은 게 아닐까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주역에서 단서를 찾아보면 어떨까. 대산 김석진 선생의 저작인 ‘대산 주역강의’(한길사)의 ‘수풍정(水風井)’괘 풀이에 따르면 ‘열이라고 하는 태극의 공허에서 음양이 교차하는 十을 井자 중심에 넣으면 자연의 이치와 인간만사가 이 속에 있다’고 돼있다. 또한 “井의 중심은 공(空), 즉 무극이태극(无極而太極)이요, 十은 음양이며 口자에 十을 넣어 田이 되니 이것이 사상이 된다”는 등 井자와 十자가 여러번 등장한다. 주역풀이에 따르면 井은 하늘이고, 十은 땅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우총 용기 명문에 나오는 ‘井’과 ‘十’은 혹 주역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일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0월 27일 17:0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