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에 세계 4大문명보다 앞선 ‘長江문명’ 실존!

                       
‘文藝春秋’ 4월호 長江문명 발굴기 좌담
                                                                         
                                                                      
  -<월간중앙2002년5월호>-
 

일본 사학계가 최근 몇년간 중국과 공동으로 추진해온 長江유역 유적지 발굴과 관련해 흥분하고 있다. 그들은 長江문명을 세계 4대문명에 필적하는 세계 最古의 문명으로 보고 일본의 야요이문화도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長江 유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長江 유역의 유적 발굴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 학자들의 좌담과 국내 일본 고대사 연구자의 반론을 함께 게재한다.     <편집자>
 

■ 좌담 참석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작가)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靜岡大學 조교수)


우메하라 장강(長江·揚子江)문명이라고 하면 아직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중국의 고대 문명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황하 문명이다.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장강 유역에 아무래도 도시 문명이 존재했던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거주했으며 왕궁과 제정전(祭政殿)을 쌓고 훌륭한 옥기(玉器)를 만들었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나는 장강 문명이 4대 문명에 첨가되어 역사 교과서에도 실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장강 문명의 발굴에 일본이 깊이 관여해 왔다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96년 중국과 공동으로 장강문명학술조사단이 장강 상류, 쓰촨(四川)성의 용마고성보돈(龍馬古城寶墩) 유적을 발굴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올해에 걸쳐 문부과학성의 ‘장강문명의 탐구’ 프로젝트가 중심이 되어 장강 중류 청터우산(城頭山·湖南省 洞庭湖 주변)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스다씨는 특히 양쪽 발굴작업에서 모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사토씨는 농학 전문가로서 발굴팀을 지원했다.

야스다 좀처럼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청터우산에는 매년 70명의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가 4년 동안이나 발굴조사를 했기 때문에 환경고고학자로서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사토 동감이다. 청터우산 유적이 있는 후난(湖南)성의 겨울은 춥고 침낭 속에서도 꽁꽁 어는 나날이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아낌없이 협조해줘 매우 감사한다.


우메하라 청터우산 유적의 발굴도 지난 3월 일단락 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과 함께 장강 문명의 매력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야스다 우선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장강 문명이 4대 문명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황하 문명의 4대 문명은 모두 밀과 목축을 생업으로 했던 문명이다. 그런데 장강 문명은 벼농사와 어업을 생업으로 했다. 그래서 장강 문명을 4대 문명과 나란히 ‘문명’이라고 인정해야 할지 안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게 된다면 세계 유일의 벼농사 문명의 발견이 될 것이다.
사토 밀에 비해 쌀은 같은 양으로 인구를 부양하는 능력이 크다. 벼농사 지대는 밭농사 지대보다 인구를 많이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드는 조건으로는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장강 중류인 湖南省 청터우산 유적지. 원형의 유적지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집단적 논농사의 흔적과 함께 열주회랑 건축양식의 왕궁과 신전이 발굴됐다.

天照신앙의 起源

우메하라 게다가 연대가 상당히 오래 됐다. 전성기가 약 5,000년 전이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야스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를 보면 기원전 3,000년 전후 장강 중류부터 하류에 걸쳐 성벽을 가진 도시가 다수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라고 일컬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역시 약 5,000년 전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장강 문명은 거의 같은 정도로 오래 됐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고학계에서는 벼농사 어로민(魚勞民)이 ‘문명’을 갖는다는 발상은 없었다. 문명은 반건조 지대의 빵(밀)을 먹는 밭농사 목축민의 것이고, 질퍽질퍽하고 귀찮은 벼농사 지대는 문명과는 인연이 없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었다고 생각됐다. 이런 선입관은 서구 중심의 문명사관이 원인이지만 사실은 중국에서조차 오랫동안 남방을 야만 취급했던 역사가 있다. 그 때문에 장강 유역의 강남 지방은 고대로부터 미개의 대삼림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메하라 초(楚)나라의 항우가 한(漢)나라 유방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항우도, 유방도 사실 강남 출신이었는데 전쟁에 진 초나라는 적군이 되었다. 그후 유방이 장안(長安)에 수도를 설치했기 때문에 강남지방의 국가, 이를테면 초·오(吳)·월(越) 등은 야만족이 사는 국가라는 생각이 ‘사기’(史記) 이래 상식이 돼버렸다.
야스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2세기 송(宋)나라가 항저우(杭州)로 천도하고 나서다. 그래서 미개지역이라고 생각하던 지역에 사실은 고대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세계사를 뒤흔들 가능성도 있다.

우메하라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발견이다. 먼저 철학자인 내가 어떻게 장강 문명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다. 장강 하류의 허무다이우(河姆渡·浙江省 紹興市 근처) 유적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1년이다. 호화 여객선 ‘아스카’(飛鳥)에서 견당사(唐代 일본 사절단)의 루트를 더듬어 가는 투어가 있어 나도 참가했다. 그 무렵 나는 조몬(繩文) 문화의 매력에 빠져 있어 오카모토(岡近)와 나란히 ‘조몬삼우오’(繩文三羽烏)라고 불릴 정도였다(웃음). 그래서 야요이(彌生) 문화의 루트인 벼농사 문명 등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따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닝보(寧波)에 도착한 뒤 허무다이우 유적에 가서 깜짝 놀랐다. 눈이 확 뜨였다. 허무다이우 유적은 7,600년전 대홍수로 인해 토사에 묻혔던 농가의 유적이지만 거기에는 내가 자란 치다(知多) 반도의 농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광경이 있었다. 집의 중심에 토방이 있고 볏단이 죽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누에를 키우고 있었던 것처럼 누에의 그림을 그린 토기가 있고 많은 직조기도 발굴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추억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당시, 고향의 농가에는 비좁고 답답한 누에 선반이 죽 늘어서 있었다.

사토 내가 처음 허무다이우에 갔던 것도 1991년이었다. 그때 벼농사의 기원은 인도의 아셈 지방과 장강 상류의 윈난(雲南)성 주변이라는 것이 가설이었다. 그것이 3,000년전 장강 하류로 전해지고 2,000년 전에는 일본으로 전래됐다고 전문가들은 누구나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논문을 보면 장강 하류에서 발견된 쌀이 훨씬 오래 됐다. 그래서 허무다이우에 조사하러 갔던 것이다. 거기서 나는 원종(原種)인 야생 벼를 발견했다. 원종이라는 것은 여기서 누군가가 야생 벼를 작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강 하류 良渚 유적에서 발굴된 옥으로 만든 祭器. 직사각형의 ‘琮’이라 불리는 玉器로 땅을 상징한다.

일본인이 發掘한 이유

야스다 허무다이우 유적은 장강 문명의 전단계 유적이지만, 일본 문명의 루트인 것은 우선 틀림없다. 예를 들어 후쿠이(福井)현에 토리하마(鳥浜) 패총(貝塚)이라는 조몬시대의 유적이 있지만 이 발굴물을 보면 허무다이우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녹각부(鹿角斧·사슴뿔로 만든 손도끼)는 허무다이우의 것과 꼭 닮았고, 어느쪽 유적이나 표주박이나 들깨·콩류를 재배했던 흔적이 발견된다.

사토 벼의 종류에는 크게 나눠 자포니카와 인디카가 있다. 장강 유역에서 발견된 벼는 DNA 레벨로 조사해 보면 쟈포니카다. 일본 쌀의 루트는 장강 유역에 있다.
우메하라 허무다이우에는 오륜(五輪)인 태양을 새가 양 겨드랑이로 안은 그림이 상징적인 심벌로 사용되었고, 그들이 얼마나 태양을 숭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태양신앙도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야스다 장강 유역 사람들은, 태양은 새에 의해 옮겨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무다이우보다 좀 시대가 내려가지만, 지금부터 3,700년 전의 삼성퇴(三星堆:장강 상류 四川省 廣漢市) 유적에서도, 부상(扶桑)의 나무에 머물렀던 아홉 날개의 까마귀가 태양을 운반하는 문양의 청동제 조각이 발견되었다. 벼농사와 태양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벼농사와 함께 태양신앙이 일본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본에서 태양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 신앙이 성행하게 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메하라 그렇다고 해도 50년 전의 일본 농촌과 같은 광경이 7,600년전 장강 하류에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관적으로 ‘이처럼 장강 유역에서 옛날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다면 그 위에 고도의 도시문명이 발달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직관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어쩐지 수상쩍다고 생각되기 쉽겠지만 나는 모든 발견에는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일본 국문학자, 민속학자)가 ‘환상’이라고 명명한 분방한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장강 문명의 존재도 당초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에 성공한 것도 ‘호메로스’의 시를 믿은 환시(幻視)의 힘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토 1991년 이후, 장강 유역의 발굴이 진행되어 벼농사의 기원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허무다이우 유적으로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 1만2,000∼4,000년 전에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을 알렸다. 보리 재배의 기원이 1만2,000년 전이라고 하기 때문에 현재의 연구는 쌀이 보리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이 된다.

우메하라 나는 아시아의 문명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무다이우 뒤에 역시 장강 하류의 량주(良渚·浙江省 杭州 부근) 유적으로 가면 이것이 또 아주 훌륭하다. 량주 유적은 약 5,000년 전부터 4,000년 전의 유적이지만 이미 복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모두 성채(城砦)도시다. 필시 장강 하류의 정치센터였던 것으로 본다. 같은 시기 장강 중류에 발달했던 스자허(石家河) 유적과 함께 이것은 장강 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대규모 유적이다.

량주에서 내가 무엇보다 마음을 빼앗긴 것은 묘지에서 발견된 옥이다. 중요한 옥은 ‘종’(琮:정사각형의 옥을 겹쳐 가운데를 파낸 옥기. 땅을 상징)과 ‘월’(鉞:도끼)과 ‘벽’(璧:푸른색의 납작한 옥기로 하늘을 상징) 등인데 모두 제기(祭器)다. ‘종’은 사각에 둥근 것을 끼워 넣은 문양이 몇층이나 이어져 있다. 이것은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낸다고 본다. ‘월’은 큰 도끼 모양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한자 기원의 권위자인 히라카와(白川靜)씨에 따르면, 그 형상이 ‘왕’이라는 글자의 어원이라고 한다. 또 ‘벽’은 납작하고 둥글며 이것은 완벽하다는 말로 나타나듯 후세까지 중국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옥은 돌을 연마해 부각(浮刻)을 주었는데,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세련되었다. 구멍이 있는 옥그릇 가운데로 빛을 쬐면 투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비할 데가 없다. 연마와 부식(腐食)이라는 고도의 기술이 응용되고 있다. 옥은 최고의 예기(禮器)라고 공자가 말했지만 이 량주 지역이 옥 문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야스다 량주를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면 옥기는 산처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까지도 지극히 일부만 발굴했다.

우메하라 들으니 돈이 모자란다고 한다. 돈을 가지고 오면 발굴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거절했다. 그래서 량주 유적의 발굴계획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량주 대신 청터우산 유적의 발굴을 인정받았다. 청터우산 유적은 약 6,400년전 장강 중류지역의 유적으로 량주나 스자허 직전의 것이지만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사실 여러 가지 수확이 있었다. 나는 현장에 간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분께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먼저 무엇이 발견되었는가.

야스다 청터우산 유적은 주변을 해자(濠)로 둘러싼, 직경 360m 규모의 작은 원형 유적이다. 왕궁과 신전이 있었고 그것을 둘러싼 높이 4m의 성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로서 최소한의 요소를 갖춘 최초의 도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중요한 것이 동문(東門)의 배후에서 발견된 제단이다. 여기에서 대량의 볍씨를 발견했다. 제단 앞에는 작은 논의 흔적이 있어 아마 여기서는 풍년을 비는 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황이 거행하는 니이나메사이(新耆祭·천황이 그해의 수확을 기뻐하고 다음해 풍년을 기원하는 發儀) 같은 것이 행해지지 않았을까 상상하고 있다.

사토 신기제의 기원이 장강 문명이라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 조사하고 있다. 천황은 모내기 할 때 찹쌀과 멥쌀을 양쪽에 심기 때문에 청터우산에도 찹쌀이 없었는지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우메하라 ‘백인일수’(百人一首)의 첫번째 노래는 텐치텐노(天智天皇:7세기 일본 천황으로 그의 재위기간중 백제가 멸망해 대량의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정착했다:편집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스스로 노동하는 것은 벼농사 민족들의 공통적인 사상일지도 모르겠다.
왜 단풍나무가 사용되었나

야스다 제단과 반대되는 형태로 왕궁이라고 여겨지는 건물의 흔적도 발견됐다. 사방 13m의 작은 건물이지만, 열주회랑(列柱回廊)이라는 건축양식이 사용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열주회랑이란 건물 주위에 기둥을 늘어놓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리는 양식으로, 그리스 신전에서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토호쿠(東北)예술공과대학의 미야모토 초지로(宮本長二郞) 선생이 보고 분명해졌다. 더욱이 왕궁의 동쪽에서는 제정전(祭政殿)도 발견되었다. 정전(正殿) 외에 전전(前殿)이 있고, 양 옆에는 협전(脇殿)이 있는 본격적인 모습이다. 신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메하라 늘어선 기둥의 소재는 무엇인가.
야스다 단풍나무과다. 기둥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많은 나무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80% 이상이 단풍나무과였다. 왜 단풍나무과뿐일까. 발굴을 시작했을 무렵 이것이 최대의 의혹이었다. 나루토(鳴門)교육대학의 요네노부 히토시(米廷仁志) 박사가 여러 실험을 거쳐 단풍나무과는 석기로 가공하기 쉬운 면이 있음을 발견했다.

우메하라 구체적으로는 어떤 종류인가.
사토 조롱나무 종류다. 단풍나무처럼 큰 잎이 달렸지만. 가을에는 새빨간 단풍이 들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가로수로 자주 사용된다.
야스다 일본에서는 사라졌지만 중국 남부에는 널리 분포되어 있다. 황거(皇居)에는 중국의 단풍나무가 있는 것 같더라.
우메하라 그러면 농업에 쓰는 도구도 단풍나무로 만들 수 있는가.
야스다 도구나 건물 모두 단풍나무는 아니라고 본다. 그 점은 일본의 조몬 문화가 밤나무에 구애받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까지 단풍나무에 구애받고 있다면 당연히 단풍나무에 관한 신화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중국의 소수민족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현재 윈난성이나 구이저우(貴州)성에 있는 묘족(苗族)이 지금도 단풍나무를 숭배하는 것을 민속연구가인 하기와라 히데로(萩原秀三郞)씨의 지적으로 알았다. 그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노생주(蘆笙柱)라는 단풍나무를 자신들의 생명수(樹)라고 믿고 있다.

묘족에게는 이런 신화도 남아 있다. 북방에서 온 황제(黃帝)와 그들의 선조가 싸웠을 때 모두 목이 베어졌고 그 붉은 피가 단풍나무의 빨간 잎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터우산에 있는 유적은 묘족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북방의 황하 문명에 의해 멸망하여 난민으로서 윈난과 구이저우의 오지로 도망쳐 들어간 것 아닌가 라고 여기고 있다.


청터우산 유적에서 발굴된 6,400년 전의 볍씨와 소성벽돌 형태의 紅燒土.

燒成벽돌을 둘러싼 논쟁

우메하라 소성벽돌을 깐 도로도 발견됐다고 한다. 소성벽돌은 4,500년전 인더스 문명이 세계 최고라고 하지만, 이번 발견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20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는 어떠한가.
야스다 소성벽돌은 도로뿐만 아니라 제정전과 왕궁의 마루 밑에도 깔려 있는 것으로 발견됐다. 일본의 한 고고학자는 소성벽돌이 아니고 홍소토(紅燒土)라고 한다. 홍소토라는 것은 지금까지 소수민족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질퍽하고 습한 땅에 나무를 깐 후 불을 붙여 단단해진 흙이다. 그들은 홍소토를 마루로 해서 집을 지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홍소토라고 생각했지만 교(京)세라총합연구소의 와타라이 모토히코(渡會素彦)씨가 조사했는데 외부와 내부 모두 600도 이상의 열로 거의 균일하게 불태워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홍소토는 내부까지 불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벽돌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 또한 대단했다.

사토 화전(火田)에도 나무를 베고 풀을 깔아 불태우지만 3일이 지나면 풀의 싹이 나온다. 이렇게땅의 표면을 아무리 태워도 그 조금 아래 부분은 100도까지 가지 않는다. 남김없이 태우지 않으면 내부까지 600도는 결코 되지 않는다.

야스다 일본에서는 맹렬한 반발을 받았지만 예전에 베이징(北京)대학에서 일·중 공동심포지움을 열었을 때 공동연구자인 후난성문물고고연구소의 허지에쥔(何介鈞) 선생이 “1994년의 청터우산 유적 발굴때 상당히 아름다운 부조가 새겨진 벽돌이 나왔다”고 발표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메하라 중국 학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전통적인 학문 자세이기 때문에, 중국측이 인정하면 청터우산의 소성벽돌을 둘러싼 논쟁도 서서히 가라앉을지 모른다.

야스다 청터우산 유적에서 왕권의 탄생이 엿보이는 유적이 확인된 것도 중요한 발견이다. 조금 전 언급한 왕궁과 제정전도 큰 실마리 중 하나지만, 커다랗고 둥그런 환호(環濠)와 관개시설도 발견됐다. 한 도시의 관개용수를 컨트롤하는 나름대로 강력한 권력이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청터우산 유적이 시작된 것은 6,400년전, 제정전이나 왕궁이 생긴 것이 5,200년 전이다. 왕권이 확립되기까지 1,2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청터우산 유적 이전에 이같은 왕권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우메하라 의외로 중요한 유적인 것 같다. 어쩌면 청터우산이 최초의 도시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높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야스다 도시문명을 앞장선 것임에는 틀림없고, 량주나 스자허라고 하는 장강 문명 전성기의 거대도시에 큰 영향을 준 것도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커다란 의혹이 있다. 량주나 스자허의 시대가 되면 웬일인지 급격히 도시가 거대화된다. 청터우산은 10만평 벼농사 규모이지만 스자허 유적은 50만m2, 량주 유적에 이르러서는 중심의 기단(基壇), 막각산(莫角山)만도 30만m2나 되기 때문에 유적군(群) 전체의 분포 범위는 4,000만m2에 달할 것으로 본다. 더욱이 그곳은 수도권의 메가로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정도였다.

우메하라 량주는 어쨌든 큰 것 같다. 제사가 거행됐던 대막각산(大莫角山·莫角山의 위에 만들어진 基壇)은 동서로 166m, 남북으로 96m나 된다. 나도 몇번 가보았지만 너무 커서 인공적인 산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시황의 아방궁과 비교할 정도로 거대한 유적이다. 그 기단을 만드는 데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야스다 동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는 거대도시 우루나 우루쿠도 그렇지만 어째서 4,500년 전에 갑자기 메가로폴리스를 형성하고 번영의 정점을맞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거대한 왕권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도시국가 연합체가 생겨난 것인지, 그 변화를 잘 모르겠다.

우메하라 어떻게 봐야 하나?
야스다 어디까지나 추리이지만, 북방 문명의 영향이 다소 있었던 것이 아닐까 보고 있다. 즉, 장강 문명은 순수하게 남쪽만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북방의 밭농사 목축민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영향이 거대한 왕권을 낳아 거대도시의 건설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량주 유적에서 용의 모습을 모티프로 한 옥이 발견된 것도 바로 이 시대다. 용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용의 모습을 볼 때 양자강 악어가 모델인 남방기원설도 유력하지만 나는 반대로 북방의 숲과 초원의 틈새에서 생겼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가장 오래된 용은 멧돼지·말·물고기 등의 복합동물이 원형이 되고 있다. 즉, 량주에서 용의 문양이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북방 문화가 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토 논을 이용한 벼농사가 시작된 것도 량주의 메가로폴리스 시대와 같은 시기다. 그때까지 습지대에 적당히 씨를 뿌려 벼를 재배했지만, 이 무렵이 되자 네모진 구획을 만들어 논농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착실하고 꼼꼼한 일은 어디까지나 북방의 근면한 사람들이 한 것 같다. 뒤에 바둑판 모양의 도시를 건설하는 그들의 사상과 어딘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농사의 기원은 어쩌면 남과 북 문명의 접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야스다 도시 건설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우선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고, 그후 서민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왕궁과 신전 등의 거대한 건축물이 건설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도시문명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의 문명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런 것들은 대체로 밭농사 목축민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고, 아무래도 풍부한 토지에서 느긋하고 태평스럽게 사는 벼농사 어로민에게는 서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성물리학자인 마쓰이 다카노리(松井孝典)씨가 일리 있는 말을 했다. 목축민에게는 부감(俯瞰·내려다봄)의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초원을 잇는 네트워크를 확보해 항상 넓은 시야를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도시의 건설도 같은 것이다. 위로부터 도시를 바라보는 발상이 있어야 비로소 이것이 가능하다. 벼농사처럼 시간과 노력이 드는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24시간 내내 언제나 아래만 보면서 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湖南省 洞庭湖와 가까운 청터우산 유적지 주변의 계단식 논.

견우직녀는 長江 태생인가

우메하라 흥미롭다. 다만, 북에서 남으로의 영향뿐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황하 문명이라면 청동의 제기(祭器)가 유명하지만, 거기 새겨진 도찬문(?餐文)이라는 신의 상징의 원형은 량주 유적의 옥기(玉器)에서 발견되고 있다. 도찬문은 돌출한 눈알과 찢어진 입, 얼굴의 양쪽에 두 개의 다리가 뻗쳐 있는 도깨비 같은 형상이지만, 이 원형이 량주의 신인수면문(神人獸面文)에 있다는 것은 중국 고고학의 권위자인 옌원밍(嚴文明)씨나 일본의 고고학자 카케이 타카야스(?隆康)씨도 인정하고 있다. 또 량주의 토기 형태가 모두 그대로 은(殷)·주(周)나라 때의 동기(銅器)와 같은 형태다. 나는 황하 유역의 동기는 황제(黃帝)가 량주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의 산물이 아닐까 보고 있다.

야스다 고대에도 남북 교류는 의외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나?
우메하라 교류라고 해도 평화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전쟁으로 싸우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중국 고대 전설에는 황제와 염제(炎帝) 연합군이 이민족인 치우(蚩尤)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량주가 쇠퇴한 시기와 치우의 멸망 시기는 거의 겹친다. 치우는 동방 구려족(九黎族)의 수령이라고 전해지지만 어쩌면 근거지가 량주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상상이다.

거기에다 견우와 직녀 전설도 장강 문명에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견우는 벼농사 농민을, 직녀는 베를 잘 짜는 농민의 아내를 상징하고 있다면, 벼농사와 양잠에 종사하는 장강 주변의 농민 부부 모습에 딱 들어맞는다. 황제의 왕비는 비단을 아주 좋아했다는 전설이 있다. 황제가 량주를 멸망시킨 후 베를 잘 짜는 농부의 아내를 북으로 데려간 것은 아닐까. 남쪽에 남겨진 남편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내를 그리워 했고, 마침내 1년에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칠석 전설의 기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다 ‘하늘의 강=장강’설이군요(웃음). 사실 최근의 재미있는 발견이 칠석 전설과 관계가 있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나스코 로(那須浩郞)씨가 청터우산 유적에서 꾸지나무의 씨를 많이 발견했다. 이 나무는 그 잎을 칠석날에 단책(短冊)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메하라 선생의 칠석설은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웃음).
그런데 장강 문명은 어떻게 멸망했을까. 옌원밍씨는 이것이 중국사를 통틀어 최대의 의혹이라고 했다. 의혹을 푸는 열쇠는 있을 것 같은가.

야스다 기후 변화가 영향을 주었던 것이 확실하다. 장강 문명이 쇠퇴하고 황하 문명이 흥한 것은 약 4,000년전 일이다. 이때 전세계에는 큰 한랭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나 인더스가 멸망하고, 고대 이집트가 제1 중간기라 불리는 암흑시대를 맞는 것도 이 한랭화 때문이었다. 조몬시대의 유적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오모리(靑森)의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도 이 시대에 사라졌다.

우메하라 량주에 관해서는 자멸설도 유력하다고 들었다. 량주의 거대한 기단과 성벽, 더욱이 당시로서는 하이테크를 구사했던 옥기(玉器)는 멋진 문명의 유산이었지만, 여기에 들어간 노동력과 자산은 터무니없이 엄청났다. 그 결과 사회가 완전히 피폐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즉, 사회가 이상하게 발달했기 때문에 거꾸로 쇠퇴가 가속됐다는 것은 현대 문명에도 경고를 하는 듯한 얘기다. 량주 후에 이어진 마차오(馬橋) 문화는 량주 유적과 비교해 볼 때 쓸모 없을 정도로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는데 문명의 쇠망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야스다 한편 중류 지역 정치의 중심지였던 스자허는 황하 세력과의 전쟁에서 멸망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들의 선조는 삼묘(三苗)라는 복합민족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 삼묘와 전설의 제(帝)인 요(堯)·순(舜)·우(禹)가 격렬히 싸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기’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묘(三苗)는 강·회·형주(江·淮·荊州)에 있고 자주 반란했다. 그래서 순(舜)은 순행(巡幸)에서 돌아오면 순제(舜帝)에게 언상(言上)하고, 삼묘(三苗)를 서방의 변경으로 옮겼다.’
‘추방되었던 삼묘중, 더욱 불선(不善)을 그만두지 않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어 좀더 멀리로 방축(放逐)했다.’


肉食문명이 강했다

우메하라 옌원밍씨에 따르면 삼묘 정벌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스자허 유적의 말년이 되면 황하 문명의 요소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 같다. 황하 세력이 얼마나 장강 문명에 침투하고 있었는가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사기’의 내용과 유적의 연대도 딱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뛰어난 역사서이지만 남쪽의 인간을 완전히 야만인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만이다. ‘사기’보다 약 300년 전에 공자가 썼다고 하는 ‘춘추’에는 이런 차별사관이 없다. 그러나 ‘사기’이래 24종에 달하는 중국 정사(正史)의 사고방식은 모두 북 우위의 역사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장성(長城)을 쌓아 북으로부터의 이민족을 막고, 운하를 만들어 남쪽의 부를 착취한다는 구도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야스다 음식의 관점에서 보아도 참 재미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월(越·장강 하류)을 초(楚·중류)가 멸망시켰다. 더욱이 진나라 말에는 초의 후예인 항우를 한(漢)의 유방이 멸망시켰다. 이것을 음식의 관점에서 보면 오·월나라 사람들은 거의 생선밖에 먹지 않았지만, 초나라는 생선과 양고기가 반반, 한나라는 완전히 양만 먹었다. 이렇게 보면 중국 고대사는 육식을 하던 민족이 생선을 먹던 민족을 패배시켰다는 구도가 된다(웃음).

우메하라 그 때문에 중국에서는 생선이나 쌀을 먹는 인간이 바보 취급당해온 것이다. 사실은 남쪽이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문화도 높았을지 모르는데….
사토 적어도 쌀은 보리보다 우수한 음식이다. 역사를 내려가면서 벼농사 지대가 점차 북으로 확대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쌀의 높은 영양가 때문이다. 보리에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아미노산이 한 두개 부족하지만, 쌀에는 20종류의 아미노산이 모두 들어 있다. 빵만 먹으면 인간은 영양실조에 걸리지만 쌀만으로 굶어 죽는 일은 없다. 서양인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빵으로는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야스다 황하가 우위에 섰던 최대의 이유는 금속기의 사용일 것이다. 북방에는 아마 4,000년 정도 전에 초원의 길을 통해 청동기가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청동 무기를 가지고 장강 문명으로 몰려갔던 것이다.
우메하라 황하 문명은 수많은 청동기를 남기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제례기(祭禮器)다. 고고학자들은 중국에서는 선조에 대한 제사가 중요했던 것 같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황하는 자신들을 승리로 이끌어준 청동기를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사토 최근의 베스트셀러였던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병원균·철’이라는 책은 문자 그대로 이 세 개를 키워드로 세계사를 가른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철을 대표로 하는 금속기와 병원균이 문명의 존망을 크게 좌우해온 것 같다.

우메하라 병원균이란 무엇인가?
사토 병원균에 당한 것은 잉카제국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들어온 병원균에 잉카 사람들은 전혀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온 나라 안에 병이 만연했다고 한다.
야스다 장강 문명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미생물에 대한 면역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가축을 기르는 밭농사 목축민이다. 결핵·디프테리아·천연두 등 폭발적인 유행병을 일으키는 병은 모두 가축으로부터 전염된다. 그래서 평소 소나 양·염소를 기르고 있는 황하 세력은 당연히 면역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남쪽의 벼농사 어로민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

사토 그렇다고는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남쪽에도 말라리아나 주혈흡(住血吸)병이라는 풍토병이 있다.
야스다 그러나 그런 병은 열대·아열대의 온난습윤한 곳에서만 만연한다는 풍토적 한계가 있다. 북쪽의 냉랭하고 건조한 토지로 돌아오면 안전하다. 그러나 밭농사 목축민의 병은 가는 곳 어디에나 확대되어 전염된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장강 문명 발굴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어느새 남쪽을 지지하게 되지만 인류의 큰 고민을 만든 것은 대개 북방의 밭농사 목축민이다. 숲을 파괴했던 것도, 병을 만연시켰던 것도, 노예제도를 시작했던 것도 밭농사 목축민이다.

우메하라 장강 문명을 발굴하면 할수록 남쪽의 문명은 북쪽의 문명과 근본적으로 성질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야스다 도시 본연의 상태를 보면 북과 남의 문명의 차이는 일목요연하다. 밭농사 목축민에게 도시란 ‘교역과 소비의 센터’였지만, 벼농사 문명의 도시는 ‘제사와 생산의 센터’였다고 생각된다.
사토 부의 집중 방법도 남북이 전혀 다르다. 장강 문명은 황하 문명만큼 부를 집중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장강 문명은 황하 문명에 패했던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벼농사 문명의 퍼지(인공지능)적인 면은 큰 매력이다. 이것은 나의 인상이지만 세계 농업의 현장을 보고 있으면 벼농사는 혼돈의 다양한 환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도 원시적인 벼농사를 하고 있는 소수민족의 논을 보면 물고기나 우렁이·개구리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잡초가 자라도 내버려둔다. 자연의 혜택이 풍부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공적인 비료를 주어 수확을 늘릴 필요도 없다.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은 채 생산하면 좋다는 느긋한 발상이 벼농사 문명의 근저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에 비해 밭농사의 현장은 인공적이며 치열한 분위기가 있다. 자연환경이 엄격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밭에서 철저히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토양도 곧 상태가 나빠진다. 그래서 화학비료도 일찌감치 필요했던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은 역시 밭농사 목축민에게만 생긴다는 것을 실감했다.
야스다 나는 오랫동안 지중해의 미케네와 그리스 문명을 발굴해 왔기 때문에 발굴물이라고 하면 대리석의 신전이나 금은재화가 당연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우메하라 선생과 량주의 박물관에 가서 옥기들을 보았을 때 전혀 어떤 느낌이 오지 않았다. 창고에서 중요한 듯한 유물들이 옮겨져 왔지만 ‘뭐야 이거, 흔한 돌이잖아’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흥미가 없어 멍하니 서 있으면 우메하라 선생이 “이 좋은 것을 모른다는 말이야!”라고 심하게 노여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문명 개념이 밭농사 목축형의 문명 패턴에 상당히 지배받았구나 하고 생각한다.


長江에 21세기 文明의 대안이 있다

우메하라 그런 야스다씨가 이제는 장강 문명의 발굴조사 리더인데 심각한 일이다.(웃음)
야스다 이런! 아니 아니.(웃음) 장강 문명의 경우 신전의 흔적이라 해도 전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어 남아 있지 않다. 나오는 것은 엄청난 흙더미뿐이다. 우리도 매일 중국에서 흙의 산과 싸우고 있다. 그 흙더미 속에 아주 가끔 옥기나 나무 조각이 섞여 있다. 이런 점은 지금까지의 4대 문명과는 크게 다르다. 벼농사 문명은 대지와 함께 파묻혀 있다.

우메하라 그것이 내 마음에 드는 점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문명, 장강 문명의 우수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장강 문명은 문자나 금속기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문명의 자격이 없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역시 문자나 금속기가 문명의 조건으로서 꼭 필요한 것인지, 문명 본연의 상태가 이것만 다른 것이기 때문에 같은 척도로 재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야스다 잉카에도 문자는 없지만 그렇다고 문명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장강 문명의 발견으로 문명의 정의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나는 문명을 과감하게 두개로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구분이지만 목축을 수반한 문명과 목축을 수반하지 않은 문명으로 나눈다. 목축을 수반하는 것은 서쪽, 기본적으로 겨울에 비가 내리는 밭농사 지대다. 4대 문명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에 비해 목축을 함께하지 않는 문명은 몬순 아시아부터 환태평양까지다. 이들은 여름에 비가 내리는 기후로 장강 문명, 마야·잉카, 그리고 일본이 포함된다.

우메하라 이렇게 문명의 흐름을 보면 밭농사 목축의 문명에서 기독교나 그리스 철학이 생기고, 벼농사 문명에서 도교나 불교가 생겼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처럼 철학자가 왜 고고학자의 흉내를 내느냐 하면, 철학을 하는 것은 우선 물질적 기초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경의 차이가 문화나 사상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것은 옛날부터 나의 사색의 중심 발상이다.
야스다 서양 근대 문명이라는 것은 확실히 밭농사 목축 문명의 탄생에 있다. 자연을 파괴해 인간 왕국을 만들어 인류는 물질적 풍부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 작은 지구에 100억명이나 되는 인간이 살아남는 것을 본격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 그런 시기에 자연과 공존하는 노하우를 가졌던 장강 문명이 발견됐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 장강 문명을 효시로 해서 21세기는 새로운 문명을 발견하는 세기가 되지 않을까.

우메하라 현대 문명은 글로벌리즘이 석권해서 점점 똑같은 모습으로 향하고 있다. 다른 문화를 무리하게 통일하려고 하면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위험한 방향이다. 21세기에는 좀더 다양성을 소중히 하는 문명을 지향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장강 문명의 해명은 서둘러 주었으면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안 장강 문명의 중심인 량주 유적을 일·중 양국 학자들의 우호적인 공동작업으로 꼭 발굴해주었으면 한다.

長江문명은 일본문명의 起源인가?

허점투성이 ‘長江 문명­日야요이 문화 줄세우기’
이근우 부경대 교수·사학과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 2002년 4월호는 중국 양쯔(揚子)강 유역의 신석기 문명에 대한 특집을 게재했다. 이 문명을 장강 문명(長江文明)이라 하고, 그 대표적 유적으로 장강 문명의 전단계로 보는 허무다이우(河姆渡) 유적과 량주(良渚) 유적, 청터우산(城頭山) 유적 등을 들고 있다. 장강 문명은 벼농사와 어로를 근간으로 하며, 단립종(자포니카) 볍씨를 재배하며, 농경문화가 흔히 그렇듯 태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성채를 갖추었으며, 제사를 위한 건물 등이 확인되었다. 이 문명을 황하 지역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와 염제가 멸망시켰다는 치우(蚩尤)왕조로 생각하는 등 대담은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장강 문명이 세계 4대 문명과 더불어 5대 문명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동북아시아 벼농사의 기원이 양쯔강 유역에 있다고 하는 견해는 잘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 대담에서 새롭게 주목하는 것은 양쯔강 상류 지역이 아닌 양쯔강 하류 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벼농사 문명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유적의 발견으로 학계의 통설이 뒤바뀌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며 크게 놀랄 일은 아니고, 앞으로의 연구성과가 기대되는 바 크다. 다만 이 글에서 문제삼고 싶은 것은, 대담자들이 장강 문명을 일본의 야요이 문화와 바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양숭배나 농경의례인 신상제(新嘗祭) 등을 거론하면서, 두 지역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장강 문명은 야요이 문화의 원류인가

양쯔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장강 문명과 일본열도 규슈(九州)의 북부에서 시작되어 급속하게 전파된 야요이 문화의 내용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장강 문명이 야요이 문화의 루트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단립종을 재배하는 벼농사라는 측면만을 가지고 두 지역의 문화를 직결시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우선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기원전 5,000년을 중심으로 한 장강 문명과 그로부터 약 5,0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되는 일본의 야요이 문화를 중간 매개체 없이 직결시켜 생각하는 사고 자체에 무리가 있다.

장강 문명의 소멸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장강 문명과 황하 문명의 남하’라는 도면을 통해 알 수 있듯 지금부터 3,000년전 황하 문명이 장강 문명권까지 남하하여 그곳의 주민을 밀어냈다고 한다면, 그로부터는 약 700년 이후에나 일본열도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즉, 700년의 공백을 어디에서 메울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역시 그 공백은 통설처럼 한반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장강 문명의 담당자 혹은 그 문명이 한반도의 남부에 도착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한반도 북부의 문화 즉, 청동기문화와 융합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장강 문명과 야요이 문화의 요소를 비교함으로써 장강 문명이 야요이 문화의 직접적인 루트일 수 없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첫째, 장강 문명의 벼농사가 야요이 문화의 벼농사와 직접 관련이 있을 것으로 대담자들은 언급하고 있으나, 허무다이우(河姆渡) 유적이나 우(吳)현 차오셰산(草鞋山) 유적, 루오자자오(羅家角) 유적에서 발굴된 볍씨는 장립종 즉, 인디카 계통이다. 양쯔강 유역에는 이처럼 단립종과 장립종이 혼재하는 반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단립종만 발견되고 있다.

둘째, 장강 문명은 청동기를 동반하지 않은 문명인 데 대하여, 야요이 문화는 벼농사만이 아니라 청동기 제작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다. 그것도 랴오닝(遼寧)성 내지 한반도의 특징적인 청동기인 세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을 근간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에 함유된 납 성분 분석에 따르면 일본열도의 초기 청동기의 청동은 한반도, 그것도 대전 부근의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금속기를 제작할 수 없었던 장강 문명을 야요이 문화와 연결시킬 수 없다.

셋째, 장강 문명이 성벽을 두른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문명인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야요이 문화에서는 성(城)이 발견된 적이 없다. 성벽은 방어시설이라는 면과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차단하고 구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야요이 문화에서 요시노가리 유적이나 환호취락(還壕聚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마을 주변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중국문화의 대표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성(城)이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는 것은 663년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그 유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신라와 당의 침입을 막으려고 할 때 비로소 출현한다.
넷째, 장강 문명은 옥제품 그것도 벽(璧) 등 후대에도 나타나는 중국적인 옥제품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옥제품이라도 야요이 문화에서는 대표적으로 관옥(管玉), 곡옥(曲玉) 등 중국의 전형적인 옥제품과는 다른 형태의 옥이다.

또한 야요이 문화와 함께 나타나는 토기에도 주목해 보면, 농경문화와 더불어 전해진 토기는 독(甕)·항아리(壺)·사발(鉢)·굽접시(高杯)를 세트로 한다. 이러한 토기 구성은 한반도의 무문토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 검은 색으로 갈아 마무리하는 점 등도 한반도와 일본열도 특히 북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석기의 경우도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드나무잎 모양의 석촉 등이 한반도의 독특한 석기로 분류되는데, 동일한 모양의 석기들이 규슈 사가(左賀)현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지석묘도 야요이 문화의 구성 요소로 들 수 있다. 지석묘는 랴오닝성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묘제인데, 이 역시 일본열도에서는 규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의 농경문화의 구성 요소와 야요이 문화의 그것이 대부분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의 원류를 따지는 일은 문화의 많은 구성요소 중 한두가지가 일치한다는 점만 가지고 결론지을 것이 아니다. 나아가 야요이 문화는 단순히 한반도의 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농경문화와 청동기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요소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지석묘라고 하는 묘제까지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벼농사의 시원지는 양쯔강 유역

그렇다고 해서 일본열도의 벼농사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벼농사도 그 기원이 중국 대륙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에 양쯔강 하류의 허무다이우 유적에서는 이미 벼농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벼농사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성립되었고 또 그것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벼농사만이 아니라 청동기·석기·토기·옥제품 등 문화의 세부적인 요소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일본의 야요이 문화는 양쯔강 유역의 벼농사 문화가 직접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일단 한반도 남부에 전해진 벼농사 문화가 1,000년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한반도의 다른 문화요소 즉 청동기·토기·석기 등의 제작기술을 수용함으로써 한반도적인 색채를 강하게 가진 문화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장강 문명과 야요이 문화 사이의 많은 차이점에는 주목하지 않고, 동일한 벼농사문화라는 점만을 강조해 야요이 문화를 장강 문명에서 왔다는 것은 일본인의 조상은 아프리카 대륙의 ‘검은 이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검은 이브’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현재의 일본인의 조상을 논할 때는 이미 몽골로이드로 분기된 이후 시점임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문예춘추’의 장강 문명 논의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들은 밭농사 목축민을 기반으로 하는 황하 문명이 양쯔강 유역까지 남하한 시기를 기원전 1000년 경으로 보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벼농사가 시작되는 것도 이 시점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하 문명의 남하로 장강 문명의 구성원들이 양쯔강 하류역을 이탈하기 시작하여, 그 일부가 기후조건이 비슷한 한반도의 남해 연안에 상륙해 벼농사를 계속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벼농사문화의 출현 배경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장강 문명과 황하 문명의 관계를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다.

또한 학계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는 중국의 북부 즉, 황하 문명의 영향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중국의 중남부 즉, 양쯔강 유역의 문명으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남해안 일대에서는 양쯔강 유역과 유사한 문화요소들이 많이 확인된다. 이러한 문화요소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장강 문명은 우리 문화를 읽는 새로운 좌표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