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의 미스테리를 파헤친다

장량은 어디로 갔는가? 또 왜 한의 조정을 떠났는가?

장량(張良)은 소하(蕭何), 한신(韓信), 진평(陣平)과 "한초4걸(漢初四傑)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史記·留侯世家」,「漢書·張陳王周傳」등의 기록에 의하면 장량이 진섭(陳涉)에서 기병한 후, 소년 100여인을 모아 패공(沛公) 유방(劉邦)에게 보내고, "장량이 패공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자주 설하니, 패공이 기뻐해 그 계책을 자주 채용했다" 유방이 칭제(稱帝)한 이후, 막후( 幄)에서 계책을 모사해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덕으로 유후(留侯)로 봉했다.

장량의 체질은 허약해 병치레가 잦았으나 유방을 위해 모책(謀策)을 내놓아 한(漢)제국 통일과 건설에 거대한 작용을 했다. 유방이 상황제(上皇帝) 보좌(寶座)에 오르자, 후사를 위해 공신들을 살륙했는데, 한신(韓信), 영포(英布), 팽월(彭越) 등이 차례로 피살되었으며, 소하, 장량 등은 채 도륙되기 이전에 이를 눈치채고 다행히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단순하게 장량이 도가의 선술을 익히기 위해 은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럼 장량은 어디로 갔는가? 또 왜 한의 조정을 떠났는가? 유방의 한나라는 장량, 한신 등의 걸출한 동이족 인물들에 의해 건국된 것이다. 장량은 동이족 국가인 한(韓)의 후예다.(춘추전국시대의 제, 초, 연, 조나라와 마찬가지로 한(韓)이 동이국가임을 알고 읽을 것. 특히 한,위,조 인 소위 3진은 정통적 동이족 국가였으니 결국 진시황이 병탄한 진,초,연,제,한,위,조 6국은 모두 동이족 국가였다)

참고로 초나라 굴원은 저서 초사 이소에서 자신의 뿌리가 동이족 전욱고양의 후예라 말한 바 있지만 동이족 한나라 후예 한신은 늘 진시황에게 망한 동이족 국가 한(韓) 왕실을 재건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젊은시절 표모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동네 불량배에게 가랭이 밑으로 들어가라 놀림을 당했을때에도 바로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망한 한(韓) 나라 조실을 재건하기 위한 각오로 차고 다닌 칼이었다. 한신이 도박과 술에 쩔어 동거녀 서희에게 돌아오는 날이면 지혜로운 서희는 한실재건에의 웅지를 늘 강조해준 바 있다.

그런데 서희가 죽고 서희의 소중함을 뒤늦게 안 한신이 서희의 무덤만 지키고 하세월하자 서희의 가녀였던 10대의 상희가 불현듯 성장해 서희의 뜻은 한실재건이지 서희의 무덤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여 한신은 새로이 각오를 다져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같은 동이족 초나라 항우 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다 알다사피 항우는 초라한 몰골의 한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말먹이 노릇만 하고 있었는데(벼슬이  낭중(郎中)에 불과하였고, 위계(位階)는 집극(執戟)에 불과) 같은 한(韓) 나라 출신의 장량이 유방을 천거하는 바람에 유방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장량과 마찬가지로 한신도 바로 한(韓)의 후예 동이족이다. 혈통이 동이족이었던 진시황이 동이족 국가들인 6국을 멸하고 자신의 혈통을 숨기고 동이족 혈통 친부 여불위마저 죽이자 한의 멸국에 비분강개한 장량은 박랑사에서 진시황 시해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도망가 진나라를 대신 멸해줄 사람을 찾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방임을 알고 들어간다.

유방이 바로 장자방이 태어난 산동성 고향사람이다. 그러나 장자방은 유방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진나라 복수를 해 준 것으로 만족하고 토사구팽을 피해 같은 동이족 토가족 마을로 스며들어 살다가 바로 치우천왕묘 근처의 산동성으로 들어와 묻히고 만다.

한(漢)족은 무엇인가. 한(漢)족 역시 장량, 한신이 유방을 도와 건국한 한(漢)나라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진시황 정(政)의 친부는 정통 동이족 여불위(呂不韋)이며 진나라 황실 성인 영( )마저 동이족 성이라는 건 필자가 이미 「죽서기년」에 나오는 바임을 본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 밝힌 바 있다.

필자가 사천성을 들르니 그곳 향토설화에 동이족인 장자방이 말년에 토사구팽을 피해 산 깊고 물 깊은 무릉원 장가계의 동이 토가족(토가족은 노자의 도가사상을 추구하는 동이족 후예) 속으로 스며들어가 신병을 요구하는 한(漢) 조정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 그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음을 들은 바 있다.

그런데 다시 2002년 8월에 다시 호남성을 들르니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시속에 나도는 말이, 당시 장량은 유방이 공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얼어붙어 조정에 나아가 관직을 내놓았다. 유방이 이를 재삼 만류했으나 장량은 벼슬과 관개(冠蓋)를 모두 헌납하고 물러났다. 유방이 백운산(白云山)까지 쫓아갔으나 장량은 도를 배우기 위해 환화이거(幻化而去)하여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는 일개 희곡으로, 소설에 비벼져 전해진 것이다. 중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경극 <장량사조(張良辭朝)>는 바로 이러한 고사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이다. 「사기」기록을 보면, 유방이 태자 유영(劉盈)을 좋아하지 않아, 후일 여후(呂后)에 의해 사지가 잘린 채 돼지우리간에서 살게 되는 척(戚)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했다.

대신들은 아주 어렵게 간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유방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유방이 공신들을 자꾸 쳐죽이고 영포도 죽이려 하자 영포가 먼저 반기를 들었다. 유방이 공신인 영포(英布)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와 옛 병이 복발한데다 화살맞은 상처까지 겹쳐 오래 살지 못할 줄 알고 다시금 태자를 세우려는 심정이 긴박했다.

장량이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입에 병이 났음을 빌어 다시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유방에게 사직서를 써서 말하기를, "집안 대대로 한(韓)의 조정을 따랐더니, 마침내 한(韓)이 멸망하여, 만금의 재산도 애착이 가지 않고, 다만 바라기는 한(韓)을 위해 원수인 강국 진(秦)을 복수해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제 세 치 혀로 임금의 스승이 되어 만호(萬戶)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자리에 서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치로 장량이 만족해하는 바입니다. 바라기는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노닐고 싶을 따름입니다."

전설에 적송자는 동이족 신농(神農)이 제왕이던 시절의 우사(雨師)였는데 능히 풍우를 거느려 늘 곤륜산 서왕모가 있는 곳에 당도해 나그네가 되었다. 대개 장자방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가들과 희극작가들의 붓끝에 장량이 도를 닦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부지하락(不知下落:幻化而去)의 고사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별도로 장량이 관리로 생애를 잘 마쳤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에는 유방이 태자를 폐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유방이 태자 유영(劉盈)을 폐하자 급해진 사람은 바로 유영(劉盈)의 생모인 여후(呂后)였다. 여후는 앞뒤 계산할 틈 없이 동생 여택(呂澤)을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문의했다. 장량은 본래 추천 천거하는 일에 주관하지 않기로 작정했었으나 여택이 강력히 요구하므로  비로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 일에 대한 사정은 말로 해서 능히 폐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 폐하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온 4 명의 장로가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 있으니 만일 그들에게 부탁해 하산하여 태자를 보좌하게 한다면 태자의 지위가 공고히 될 것이며 혹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여택이 사람을 보내 태자를 받들어 줄 것을 부탁하는 태자의 친필서신을 보내며 비사후례(卑事厚禮)하여 네 노인이 하산하기를 청했다.

유방이 영포를 쳐부수고 승리해 다시 조정에 들어 연회를 거행하는데 4인의 장로가 태자를 받들고 친히 연회석에 참례했다. 유방이 이들 4인의 백발노인을 보자 십분 처량하게 서로 놀랐다. 4인이 일일이 자신들의 성명을 고하고 안부를 나눈 뒤에 유방이 말하기를, " 원래 너희들은 먼저 번에 내가 너희들이 서로 도와주기를 바랬는데, 하나같이 나를 피해 쭈욱 볼 수 없었거늘, 오늘은 무슨 일로 내 아들과 함께 왔느냐? 이에 4인이 대답하기를,

"폐하가 사람들을 쉽게 모멸하므로, 신등은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도망가 숨은 것입니다. 태자가 인효(仁孝)하고, 현인을 존경하고 선비를 사랑하므로 천하인이 모두 태자의 노력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생명을 걸고 이 자리에 나왔으니 생명이 아깝지 않은 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름을 사모해 산을 내려온 것입니다" 유방이 태자를 보니 한쪽 팔뚝의 역량이(신하들) 이미 형성된 후여서 우모(羽毛:깃털)가 풍만하고 두려워 털끝하나 움직이기 어려운데, 곧 여의(如意)를 포기하고 다시 태자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漢書·張陳王周傳」와 「史記·留侯世家」중에 모두 기재되어있다. 「史記·留侯世家」가운데는 다시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끝내 태자를 바꾸지 않으므로, 유후(留侯)가 본래 이들 4인의 힘을 불러 초치한 것이다" 여후(呂后)는 이로 인해 십분 장량에게 감격했으며 유방사후에 보답하여 학도(學道)를 결속해 살 것을 강권하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인생 일세가 마치 백구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만큼 짧은데 어찌 스스로 고생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그를 하산케 하여 관직에 있게 하려 했는데, 장량은 이때 이미 나이가 많고 몸이 허약해 어떤 일도 하기 어려웠을 때였다. 혜제(惠帝) 6년에 장량은 병사했는데 시호는 문성후(文成侯)로, 소하(蕭何) 역시 한가지로 사후에 시호가 문종후(文終侯)가 되었으니 한결같이 문재(文才)로 안민입정(安民立政)했음과 선시선종(善始善終)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오직 사서에만 충실한 장건평(張建平)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통적인 사서상의 결론을 내린다.  전설과 소설, 희곡의 자료를 보면, 장량이 돌아간 곳은 한층 신비한 색채를 덮어씌운 것으로 인해 믿음이 부족하다. 단 장량이 신이 되었다는 것과 실제상 반영은 봉건통치자가 공신들을 살육한 사실에 대해 역대 하층 문인들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장량은 인생의 마무리를 잘 지었으며 이것이 비교적 신뢰가 가는 내용이다.

그런데 현지에서 듣고 접한 향토사료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즉 장자방은 여후의 득달로 인해 권력을 내어놓고 동이 토가족이 모여사는 호남성 장가계 무릉원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기는 전통적으로 동이족이 모여사는 산동성의 치우천왕 능묘부근에 와서 묻힌다.


그런데 이 내용은 한 조정에 의해 삭제된 것 같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한 조정은 항우와의 쟁패과정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이 잡듯이 잡아죽였는데 소하나 장자방 마저 도망쳐 버리고 만 마당에 역사적으로나마 장량을 후대하였다고 기술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왕실의 역사왜곡의 사례는 한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신은 괴철과 항우의 한,초,제 3분지계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도와 한 왕실을 건국시키지만 유방은 이를 의심해 진평과 소하의 계책으로 끝내 한신을 삭탈관직하고 끝내 여후에 의해 권력쟁탈의 토사구팽 신세가 되고 만다. 다시말해 한왕실은 한신을 반역자로 몰아 죽인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한신이 유방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유방이 한신을 버린 것임은 한신이 추식사지한 일(밥그릇을 더 먹으라 밀어준 일)과 옷을 덮어준 일을 들어 한신이 괴철의 한,초,제 3분지계를 마다하고 항우의 3분지계를 고사한 일이 바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한당의 사가들은 이에 대해 한왕실의 왜곡사에 비위를 맞추려는 듯 한결같이 여후의 한신 살해에 의해 결국 속 초한전의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견강부회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 언급하겠지만 장자방의 거취가 왜곡되었음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중국 역사무대에 있어 서한(西漢) 시기에, 자가 자방(子房)인 장량은 풍부한 신화색채를 지닌 전기적 인물이다. 사적(史籍) 기재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동이족 한인(韓人)으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5대가 한(韓)의 조정을 따랐다.

진(秦)이 한(韓)을 격파하자 장량은 원수를 복수하기로 맹세하여 자객들과 교분을 맺고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지만 미수에 그치자 하비(下 :지금의 강소성 수녕( 寧) 서북)로 도망가 숨어 있다가 다행이 황석공을 만나 <태공병법> 3권을 얻는다. 후일 유방에게 귀부해 모계로 천하도모를 기획한다. 그는 6국이 병탄 된 뒤에 영포(英布)와 팽월(彭越)을 연결하고 한신을 중용해 항우를 쫓아내는 정책으로 유방의 신뢰를 얻었다.

유방은 알찍이 그를 포상하며 말하기를 무릇 장막 뒤에서 계책으로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자방 만 못하다 평했다.  천하가 이미 정해지자 장량은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런데, 세 치 혀로 임금의 스승이 되고 만 호에 봉해진 개국공신이 갑자기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을 마다하고 질병을 핑계로 용퇴하여 왕실과 관계를 끊고 사가도 폐문하여 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거생활을 한다. 그는 이때 무릉원 장가계로 스며들어간 듯하다.

그리고 죽은 뒤 그가 묻히기를 원했던 동이족의 터전 산동성에 묻힌 듯 하다. 「한서(漢書)」기록에 의하면 장자방은 여후(呂稚) 6년인 182년에 죽어 제(齊)나라 북쪽 곡성산(谷城山) 아래 황석(黃石)에 묻혔다고 하는데 이 곳은 현재 산동성 제수(濟水)의 북쪽이다. 그의 만년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도 중설이 하나가 아니다.

지금의 하남성 난고현(蘭考縣) 현성(縣城) 서남 6Km의 조신장(曹辛庄) 정거장 남측에 장량의 묘가 있는데 높이는 10M에 오래된 잣나무가 묘를 울창하게 두르고 있다. 전설에,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희롱하자 장량은 병을 핑계로 모 처에 은거했는데 하나는 무릉원 장가계요, 또 하나는 묘가 있는 바로 이 곳 지금의 하남성 난고현(蘭考縣)인 동혼현(東昏縣) 서남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해 살다가 죽은 뒤 그 곳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당대(唐代)의 「괄지지(括地志)」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한나라 장량의 묘는 서주(徐州) 패현(沛縣:유방이 성장한 곳) 동쪽 65리에 있어 유성(留城)과 서로 가깝다" 하고 "옛 유성(留城)은 서주(徐州) 패현(沛縣) 동남 55리인데, 지금 성내에 장량의 사당이 있다" 했다.

원래 유방이 후(侯)에 봉했을 때, 거듭 장량을 "스스로 제(齊) 3만호를 선택"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장량은 유성(留城)에서 유방을 보고 유성을 봉지로 달라하여 장량의 무덤이 유방의 고향인 패(沛)에 있게 된 것이라 하며 장자방은 스스로의 죽음을 내다보고 3만 호의 제후마저 고사하고 시시각각 옥죄어오는 여후의 권력의 칼을 피하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유방이 서주(徐州) 패현(沛縣)의 유성(留城)으로 장자방을 찾아왔을때는 아마도 영포의 난을 쳐부수고 이를근심하던 부모를 위해 자신이 청년장교로 일했던 바로 그 동헌에 부모를 위해 궁전을 지어 바치고 대풍가까지 지어바치고 연회를 열었던 시기로 이때는 이미 유방의 병이 심해져 태자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말년이었다.

따라서 권력의 중심은 척희의 아들 여의에게 태자를 빼앗긴 정실왕비 여후(여치)가 사력을 다해 장자방을 매수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빙성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사진은 유방이 패업을 이루고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부모님이 걱정하여 영포의 난을 제압하고 부모의 근심을 위로하기 위해 궁전을 지어 바치고 대풍가를 지어 위로했다 전했다고 하는 바로 그 궁전이다. 물론 후일 재건축한 곳이다. 유방이 부모를 위해 궁전을 지은 곳은 현재 패현의 박물관이다.

필자가 직접 찾아가 비문을 읽어보니 그 뒤 오랜 세월 뒤 이 곳은 폐허가 되어 비석만 전하였는데  비석에 전하는 내용대로 다시 복구해 박물관으로 기념하고 있다고 전한다. 유방은 원래 이곳 서쪽의 풍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청년시절 패로 와서 교육받고 성장하여 이곳의 영웅호걸과 사귀고 이곳에서 기병하여 장군이 된 곳인데 후일 자신이 장군이 된 이 곳에 궁전을 지어 부모에게 바친 것이라 한다.





산동성 패현에 있는 한고조 유방의 유적지.유방이 청년장교시절 근무한 고향 산동성 패현으로 제왕이 된 뒤 영포의 난을 제압하고 부모를 위해 궁궐을 지어 연회를 열고 대풍가를 지어바친 곳의 전경(사진1)&지금은 패현의 고고학 박물관이다.(박물관 2층:사진2,3) 기록에 의하면 유방은 제왕이 된 뒤에도 늘 고향인 산동성 풍현과 패현을 잊지 못했다 하며 동이족의 습속인 8신제로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한다&유방이 행차했을 적 한나라 저자거리를 재현해 놓은 패현 박물관 옆 도로(사진4)


  
호남 상서(湘西:호남성 동정호에서 내려가는 물을 湘江이라 한다) 동이 토가족(土家族)  및 동이 묘족(苗族) 자치주 대용시(大庸市)에 장가계(張家界)라 이름붙은 풍경구에 청암산(靑巖山)이라 칭하는 곳이 있다. 이 곳은 산도 기암괴석이요 구름도 기이하며 나무와 물도 기이하리만치 깊고 맑아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선석지(仙釋志)」에 기재하기를, "전설에 따르면, 장량은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노닐었다. 그 묘는 청암산(靑岩山)에 있어 때에 따라 숨겨졌다가 때에 따라 나타난다"라 했으니 이는 청암산의 안개가 많은 이유를 닮은 것이다.

<능묘지(陵墓志)> 권 6에 역시 말하기를, "한나라 유후(留侯) 장량묘는 청암산에 있다. 장량은 황석공 책을 얻은 후 적송자를 좇아 노닐었다. 읍중(邑中) 천문(天門)과 청암의 각 산에 유적지가 허다하다." 장량은 일찍이 후(侯)에 봉해진 초기에 유방을 향해 호소하기를, "원컨대 인간사를 포기하고 적송자를 좇아 노닐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따라서 그는 도를 좇아 은둔했으며 청암산의 심산야림에 은둔하여 노닐었다 하니 이 또한 이치가 없지 않다. 호남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장가계에 실지 가 보면 상당히 중시된다. 단지 애석하게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유적지가 흩어져 남은게 없고 장량묘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장자방을 애지중지한 유방이 그를 유후(留侯)에 봉했을때는 이미 유방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공신들을 하나하나 잡아 죽이면서 태자책봉과 왕위계승에 신경을 쓰느라  척부인의 태자 여의를 사이에 두고 여후와 공신들이 암투가 극심해 공신들이 죽어가고 떠나가고 하는 와중에 여후에게 휘둘릴 것을 안 장자방이 병을 핑계로 같은 동이 토가족이 사는 장가계로 들어가자 토가족과 신병을 인도하기를 바라는 여후세력간에 모종의 알력이 있었으나 토가족의 강력한 연대로 장량은 무사히 여생을 마치고 산동성의 동이족 제나라 영토 패(沛)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한 내용은 무엇을 말함인가.

*사지종용 자아유지(事之從容도 自我由之)하고 사지분란 자아유지(事之紛亂도 自我由之)하나니-일이 조용하게 되는 것도 나로 말미암고 일이 시끄럽게 되는 것도 나로 말미암느니라.  
자방(子房)의 종용(從容)과 공명(孔明)의 정대(正大)를 본받으라.”
  
장자방은 한초4걸의 한 사람으로 소하 다음으로 공이 제일 많은 사람이었지만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용퇴한 사람이다. 물론 앞서 말한 바대로 유방 말기에 한 건국의 일등공신을 하나 하나 명분을 내걸어 제거해 나아가는 비정한 유방의 토사구팽의 역사현장에 몸을 사린데다가 유방의 죽음을 앞두고 권력의 교체기에 여후의 권력의 칼이 목숨을 옥죄어 온 나머지 과감히 용퇴한 감도 없지는 않지만 장자방의 본디 솔성은 노자 도덕경의 무위자연처럼 적송자와 함께 노니는 도학자의 모습이었다.

본디 종용(從容)의 자전학적인 의미는 자연스럽고 태연한 모양이나 떠들지 않고 유유한 모습이나 조용히 부드럽게 말하는 모양이나 안온하게 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또 행동거지 그 자체를 종용(從容)이라고도 하니 자방(子房)의 종용(從容)과 공명(孔明)의 정대(正大)를 본받으라는 말은 알고 보면 자방(子房)의 행동거지와 공명(孔明)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을 본받으라는 말도 된다.

자방의 행동거지는 자신이 이룬 공을 굳이 주장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말년에 공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마치 적송자 처럼 노닐다 싶다하여 권력에서 용퇴 후 은거한 것처럼 심지어 유방과 천하도모를 하던 때에도 계책을 내놓을지언정 그 공을 떠벌이지 않았으며 또는 계책으로 큰 공을 세웠어도 막상 유방 곁에는 있지도 않았다. 평민의 신분으로 항상 천하를 떠돌며 세상의 민심을 살피며 다닌 사람이 바로 그다.

물론 장자방이야 그렇다손 쳐도 공명의 정대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공명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일화와 화용도 전술의 일화 그리고 자신을 모반할 줄 알았던 위연을 당대에 처리하지 않고 그가 배신한 뒤 마대를 통해 제거하도록 금낭밀지를 내린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무슨 일화인가. '울면서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한중 서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 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 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 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 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稷)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 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 으로 와 있던 장완(張?)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출전] '三國志' 蜀志 諸葛亮篇

공명이 공명정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이로써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화용도 기사를 보자.관우가 화용도(華容道)에서 조조를 눈감아준 것은 제갈량의 신모계책이다.

*속수지지(束手之地)는 갈공모계(葛公謀計)라도 불능선사(不能善事)요 와해지여(瓦解之餘는 한신병선(韓信兵仙)이라도 역무내하(亦無奈何)니라-손을 묶인 듯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제갈공명의 묘계로도 능히 풀 수가 없고, 대세가 넘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은 한신(韓信) 같은 병선(兵仙)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느니라.  
병가(兵家)의 묘략(妙略)이 공명(孔明)은 능히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로 오게 하였고 손빈(孫月賓)은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해 질 무렵에 마릉(馬陵) 땅에 이르게 하였느니라. (道典)


공명(孔明)이 능히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로 오게 한 일화는 무엇인가.

조조가 적벽의 전투에서 패한 후 도망간 장소가 바로, 형주남군 화용현이다. 이 현의 남에는 광대한 소택지대인 운몽택이 펼쳐진다. 공명은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83만대군을  수장시키고, 도망쳐 오는 곳곳에 주도 면밀하게 군사들을  배치해서 공격하고, 허허실실(虛虛實實)병법을 이용해  조조를 화용도에 이르게 한다. 이 때 공명은  조조가 아직 죽은 명운(命運)이  이님을 알고, 또한 신의가 두텁고 인정이 많은  관운장이 조조를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옛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기 이해 운장을 화용도로  보낸다. 결국 운장은 조조의 옛 정을 생각해서 조조에게 길을 터준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조조를 화용도에서 놓아주고 왔을 때, 유비의 간청으로 관우를 살려준 제갈량이 유비에게 '아직 조조는 죽을 때가 안됐기 때문에 관우로 하여금 과거 조조에게 입은 은혜나 갚으라고 유독 그를 화용도로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다만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를 다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 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봉건 시대 중국에서, 관우는 의리와 용맹의 화신으로, 또 지극히 높은 위치의 신선으로 떠받들여지는 존재였다. 그러나 연의에서 가장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의(義)'일 것이다. 제50회에 나오는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고도 눈감아준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적벽에서 화공을 당해 심한 타격을 입은 조조는 패잔병을 데리고 밤새도록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치는 중에 계속되는 복병의 습격을 받았다. 때는 마침 한겨울이었다. 게다가 큰 비까지 내려 뒤따르는 병사의 군복이 완전히 젖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기에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화용도에 이르자 좁아진 길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노약자와 부상병이 계속 쓰러졌지만, 조조는 그 위를 밟고 지나가라며 질타했다. 그 때문에 죽는 자가 속출하여 남은 사람은 불과 삼백여 기(騎)에 불과했다. 그때 뜻하지 않은 포성이 울려 퍼지고, 기다리고 있던 관우가 언월도를 들고 오백의 병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조조의 군사는 완전히 지쳐서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다만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욱의 권유에 따른 조조는 전방에 나타난 관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짓을 하며 '여전한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뒤이어 이 자리를 눈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

관우는 조조가 예전에 자신에게 베푼 은의를 생각하니 공을 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말머리를 돌리며 부하를 향해 '흩어져서 벌려 서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조는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빠져 나갔다. 부하 장수와 병사들이 뒤를 따르려 했지만, 관우는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생각에 '멈춰라!'하는 호통을 쳤다. 관우의 외침에 조조군의 병사는 도망갈 엄두도 못내고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본 관우는 더욱 가여움을 느꼈다. 주저하고 있던 차에, 장료가 말을 달려 느슨한 포위를 뚫고 나갔다. 관우는 그를 보고 또 다시 옛날의 정이 생각나서, 긴 한숨을 내쉬며 전원을 못 본 척 눈감아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의로써 눈감아준 이야기는 이미 원대의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 원의 잡극 <황학루(黃鶴樓)>에 보인다. 수백년 동안 이 이야기는 민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의의 자세한 묘사에 의해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호북성 감리현 변하향 조교촌이 당시의 화용도의 유적이라고 한다. 조교촌의 북쪽에서부터 모가진에 이르는 전체 길이 7.5킬로미터의 도로이다.정사의 <위서> '무제기'의 주에서 인용한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를 보면, 적벽의 전투에서 실패를 맛본 조조는 확실히 군사를 정리하여 화용도에서 도보로 후퇴하였으며, 큰 비로 진흙탕이 된 길을 대가를 치르고 간신히 지나간 것도 사실이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기다리고 있는 장면에서, 사전에 조조를 눈감아준 자는 누구든 사형에 처한다는 군령이 떨어졌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가 되자, 관우는 역시 의를 어떤 것보다 중시하여 조조를 눈감아주었다. 의를 중시하여 자신의 목숨과 국면 전체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봉건 시대의 독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사람들은 관우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으로 은혜에 보답하고 천추에 의로운 이름을 떨쳤다는 찬사를 보냈다.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은혜와 원수의 갈림길에서 결국 의를 택한 것은 선명하게 빛나는 관우의 미덕을 보여 주었다고 할 것이다. (도서출판 청양 "삼국지 고증학")

당시 조조가 화용도에서 보인 다음의 일화는 제갈량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조의 의중을 들여다 보고 있으며 관우와 조조의 은원관계와 관우의 성품을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제갈량은 처음 관운장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자존심 상한 관우가 승상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조조를 붙잡아 처형하지 못하면 목을 내어 놓겠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제갈승상은 관운장의 이 약속이 조조에게 빚을 진 것이 있어 의인인 관우가 못 죽이리라고까지 정확하게 내다보고 조조의 천운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을 내다보고 수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토한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여다 본다.

-적벽에서 대패를 당한 조조는 오군을 피해 형주를 바라고 도망을 갔다. 조조는 한참을 도망가다가 추격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는 병사들과 쉬면서 주위를 보니 수목이 우거지고 산천이 험준하것을 보고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아무래도 주유와 제갈량이 꾀들이 없는 위인인것 같구나. 만약에 나더러 용병을 하라면 이곳에다 한 떼 군마를 미리 매복하여 두었을 것인데"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편으로부터 난데없는 북소리가 트게 일어나며 한 장수가 외치기를 "상산 조자룡이 군사의 장령을 받들어 예서 너희를 기다린지 오래니라" 이에 조조는 크게 놀라 한참을 도망을 치다가 다시 쉬면서 크게 웃으며 하는말이 "만약 네가 용병을 한다면 이곳에다 일표 군마를 매복하여 두었을 것이다. 설혹 우리가 성명은 보전하여 나간다 하더라도 필시 중상은 면치 못했을 터인데, 저희들의 소견이 예까지는 미치지 못하니 우습지가 않는가?" 바야흐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앞뒤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함성이 일면서 군마가 앞을 가로막고 그 앞에 대장은 연인 장비이다. 조조는 소스라치게 놀라 갑옷도 찾아 입지 못하고 말에 뛰어올라 한참을 도망을 가다가 갈림길에 다다러서 멀리 보니 한쪽 산벽 소로에는 연기가 일고 대로에는 아무 동정이 없는 것을 보고는 좁은 길로 병사들을 이끌고 간다. 이에 수하 장수들이 묻기를 "연기가 인다면 필시 군마가 있기 때문일 터인데, 일부러 그 길로 가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제갈량이 꾀가 많아서 일부러 사람을 시켜 산벽 소로에는 연기를 내게 하여 우리 군사가 감히 그리로 못가게 하고 정작 군사는 대로상에다 매복을 시켜 놓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니 내가 어찌 그길로 가겠소" 조조와 군사들이 산벽 소로로 한 10리를 갔을때 조조가 또 한번 크게 웃으며 하는 말이 "만약에 이곳에 군사 몇 백 만 깔아 놓는다면 우리들이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지 면할 도리가 없을게 아닌가"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오백 가량의 군사가 몰려나오고 그 앞을 보니 관운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조조는 체념을 하고 한번 죽을 각오로 싸워보기나 하려 할때 정욱이 앞으로 나오면서 과거에 관우에게 배푼 은혜가 있고 관우가 의리가 있는 장수이니 말로 설득을 하면 이 곤경을 무사히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조조가 앞으로 나와서 관우에게 지난일을 이야기 하며 길을 비켜줄것을 청하자 관우는 지난 일을 잊지 못하고 병사를 돌려 돌아 갔다. 결국 조조가 화용도의 난을 피하고 형주에 다다랐을 때 수하에 병사가 100여기도 남지 않았다.-

화용도 사건은 읍참마속의 예에서 본 것처럼 제갈공명의 공명정대한 일 처사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침이 없이 인사문제를 천시에 맞게 처리하되 지리적인 모계와 실타래같이 얽힌 은연의 근본까지 곁들여 작전을 구사하여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제갈량의 모사는 정대함의 으뜸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위연에 대한 3번째  일화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그의 정대함이 무엇인지 엿보기로 한다.

*강표 의양 사람으로 자는 문장이다. 본래 유표의 장수로 유비가 조조의 침공을 받아 신야, 번성을 차례로 빼앗기고 양양에 의지하려 했을 때 성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려다가 이를 막는 문빙과 싸우다 불리해지자 혼자서 장사 태수 한현에게로 귀순했다. 적벽대전 후 장사를 치러 온 유비에게 한현의 목을 베고 황충과 함께 항복하였다. 제갈량은 그의 뒤통수에 반골의 상이 있다고 하여 그를 목 베려고 했으나, 유비의 만류로 살려두었다.

노장 황충과 서촉 평정에 큰 공을 세우고 유비가 한중을 빼앗을 때도 활을 쏘아 조조의 앞니를 부러뜨리고 낙마시켰다. 그리고 그간의 공로로 한중태수에 임명되었다. 간혹 공을 다투다가 아군 장수들 사이에 불화도 조성했으나 제갈량의 남만정벌 때 조자룡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북벌에 나섰을 때 제갈량에게 계책을 올렸으나 묵살당하자, 제갈량의 너무 꼼꼼한 군사행동을 비방하고 돌아다녔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임종 직전 양의에게 모든 군권을 주면서 위연이 반역할 것을 대비해 살해 계책을 알려주었다. 제갈량이 죽던 날 밤 위연은 머리에 뿔이 돋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위연은 부장 마대와 함께 반역을 일으켰으나, 위장으로 협조한 마대에 의해 머리에 칼을 맞게 된다. 꿈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처음부터 제갈량에게 잘못 보여 전투에 이용만 당하고 죽었다. 삼국연의에서는 처음부터 그를 나쁘게 평가했지만, 정사에서 후주유 선은 그를 고이 장사지내주었다. 위연은 훌륭한 무장이었지만, 제갈량의 후계자리를 놓고 양의와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하여 결국 반역자로 기록되었다.  


* 위연의 자오곡(子午谷)의 계책
(인용;http://newexpt.com.ne.kr/sam/sam16.html)

위연(魏延: ?-234)의 자는 문장(文長)이며 의양(지금의 하남성 동백의 동쪽) 사람이다. 원래 형주목 유표의 부장이었지만 나중에 유비에게 투신하였다. 유비가 서천을 공격할 때에 여러번 전공을 올렸다. 건흥 5년(227)에 제갈량이 한중을 공략하며 북벌을 시작했을 때, 위연은 진북대장군 도정후의 신분으로 도전부(都前部)에 임명되었고, 승상사마 양주태수를 역임하며 북벌에 참가했다.

연의 제92회에서 북벌에 나선 제갈량은 면양에서 마초의 묘를 참배하고 영채로 돌아갔다. 이때 위주 조예가 파견한 부마(황제의 사위) 하후무가 관중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대항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위연은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의 진영을 방문하여 대책을 바쳤다.

"하후무는 계략도 모르고 패기도 없습니다. 저에게 정예병 오천을 주십시오. 포중(褒中)에서 진령(秦嶺)을 따라 동으로 올라가 자오곡에서 북으로 쳐들어가면 열흘 안에 장안을 습격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성을 버리고 저각 횡문으로 도망칠 것입니다. 이때 제가 동쪽에서 공격하고 승상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야곡에서 진격한다면, 함양(咸陽)의 서쪽 지역을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이 말을 듣고 웃어넘겼다.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귀공은 중원에는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진언하는 사람이 있어 산간 지역을 막는다면, 오천의 정예병을 잃을 뿐 아니라, 우리 군의 사기가 꺾이게 된다. 이 계책은 절대로 쓸 수 없다."

"승상 전하께서 큰 길을 따라 진격하시면, 적은 관중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큰 길을 막을 것입니다. 그러면 쌍방 모두 서로 물러서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로 대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 평정은 언제가 될지 모릅니다."

"내가 먼저 농우를 뺏고, 병법에 따라 평평한 길로 군사를 몰아간다면 승리를 거두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위연의 계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사 <위연전>의 배송지 주는 <위략>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연의 계책은 '자오곡의 계책'으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은 연의에서 이 장면을 과장하였지만, 사실에 의거하고 있다.

자오곡의 계책이 어떠한 효과를 가졌는가는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분석과 평론은 제갈량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과 위연의 계략이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요행 심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진수가 계책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제갈량을 평한 것은 매우 합당한 처사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왕치진(王輜塵)의 <제갈충무후평전>에서는, 제갈량의 자오곡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은 모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럼 위연의 계책이 위험하다며 쓰지 않은 것은 제갈량이 겁쟁이였기 때문인가?

사실 제갈량이 이 계책을 쓰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그가 한 말을 빌리자면, 이 계책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보다 전에 맹달이 경솔하여서 사마의에게 생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제갈량이 위의 내부에서 반역을 일으키게 하는 공작이 중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 때문에 위연이 내놓은 자오곡의 계책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여 위연의 계략은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만약 하후무가 관문을 닫아건 채 싸우려 하지 않고, 촉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으로 나왔다면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후세에 제갈량이 이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군사가가 반드시 백퍼센트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육십 퍼센트의 희망만 있어도 해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생 신중히 생각해 온 제갈량에게 있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촉은 소국이고 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손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제갈량으로서는 전망이 서지 않는 상황하에서 병사를 헛되게 희생할 수는 없었다.

병사를 아끼고 전쟁에 신중한 것은 바로 정치가겸 군사가로서 제갈량의 귀중한 자질이었다. 제갈량이 전쟁에 신중하고, 계책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며, 위연의 자오곡의 계책을 쓰지 않았던 것은 그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군사를 사용하는 데에 신중했던 증거이다.

그러나 촉은 소국이고 병력은 적어서 큰 손실에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제갈량이 병사를 아끼고 전쟁에 신중했던 것의 합리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정말로 촉은 소국이고 병력이 부족하였다면,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한다. 쌍방 모두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로 대치하는 전쟁은 병력이 많고 물자가 충분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은 촉한에게 불리한 점이었다. 그러므로 촉한이 북벌에 성공하여 한실을 부흥시키고자 했다면, 전쟁에서는 속이는 것을 사양하지 말고 기병기모(奇兵奇謀)를 많이 써야만 했다.

*위연(魏延)에 대해

나관중이 그리는 위연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낭성(朗星: 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다. 연의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관중은 이 이미지를 끝까지 관철하여, 마지막에는 반역을 기성(旣成)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연의 제104회에서 제갈량은 임종에 즈음하여, 양의(楊儀)를 불러 비단 주머니를 주며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위연은 반드시 반역할 것이다. 그때 전장에서 이 주머니를 열어 보아라. 스스로 위연을 베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 위연은 진중에서 자면서, 머리에 돌연 뿔 두 개가 나는 꿈을 꾸었다. 행군사마(行軍司馬) 조직(趙直)은 길조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것을 상서(尙書) 비의에게 알렸다. 비의는 위연의 진중을 방문하여, 제갈량이 죽은 것과 유언에 따라 후미의 군사를 맡으라고 명령을 전했다. 위연이 물었다.

"승상이 하던 일은 누가 맡게 되는 것이오?"
"승상께서 하시던 일은 모두 양의에게 맡기셨고,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강유에게 맡기셨소."
비의의 대답에 위연은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승상은 죽었으나 내가 아직 살아 있소. 양의는 한낱 장사(長史)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 큰일을 해낼수 있단 말이오? 그는 그저 관을 지키며 서천으로 돌아가 장례나 잘 치르라고 하시오. 나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하여 반드시 물리쳐 보이겠소. 승상 한명의 말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폐할 수는 없소. 나는 양의 따위의 후미를 지켜줄 생각은 없소."

비의가 양의에게 위연의 일을 전하자, 양의는 승상이 남긴 말처럼 역시 위연은 두 마음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시 강유에게 후미를 맡도록 명했다. 이것을 안 위연은 격노했다.

"썩어빠진 유학자가 잘도 나를 속였구나! 내 반드시 그놈을 죽이고 말겠다."

이어서 연의 제105회에서 위연은 절벽에 놓인 다리에서 양의의 앞길을 막았다. 양의는 제갈량인 남긴 금낭의 묘계를 숨기고 한중으로 물러나서 위연을 맞이하였다. 양의는 하평(何平)에게 명하여 싸우게 했지만, 위연과 마대는 하평을 물리치고 남정(南鄭)으로 몰려들었다. 양의와 강유가 치고 나왔다. 양의가 위연을 향해 말했다.

"승상께서는 생전에 네가 언젠가 반역할 것이라고 하시며, 내게 그걸 준비케 하시더니 이제 정말로 그렇게 되었구나. 너는 말위에서 '누가 감히 나를 죽일 것인가?'라고 세 번 외쳐 보아라. 그 용기가 있다면 진짜 대장부다. 그러면 나는 한중의 성지(城池)를 네게 바치겠다."

위연은 칼을 든채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그 소리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죽여 주겠다!"

그는 말 뿐만 아니라 한칼에 위연을 베어 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 사람이 바로 마대였다. 실은 모두 제갈량이 임종때에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역사상의 위연은 어떤가? 정사 등의 사료를 보면, 그는 삼군의 우두머리인 촉의 맹장이며, 촉에 충성을 다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을 공략한 후에 유비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 수비의 대임을 위연에게 주었다. 제갈량이 제1차 북벌에서는 자오곡의 기습 작전을 헌상하였다. 그의 계책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시종 분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위연의 죽음에 대하여 기술한 정사의 <위연전(魏延傳)>을 보면, 양의가 마대를 보내 위연을 쫓고, 결국 붙잡아 죽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 이유가 연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역모 때문이었을까?

정사의 <후주전>과 <위연전>의 주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위연에게는 원래 촉에 반역할 의지는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 때문이었다.

또 연의에서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묘사되었고, 반역의 악명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 위연은 억울한가.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할까.

현재의 많은 학자는 위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므로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량소(譚良嘯)·장대가(張大可)의 공동 저작인 <삼국인물평전(三國人物評傳)>의 위연평정(魏延評傳)>과 성도 무후사 박물관에서 펴낸 <무후사대관>의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 등에서도 모두 위연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논자는 위연을 촉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늬 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오곡의 계책은 북벌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이 거병(擧兵)한 것은 양의 때문이었지 반역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왔다.

역사적 인물로서 위연은 확실히 행실이 나쁜점이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그는 풍운을 질타한 촉의 대장이었고, 촉한 정권을 위해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소한 못된짓을 꼬투리 잡아 꾸며진 문학적 이미지는 시종 악인이었지만, 이것은 역사상의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상의 이미지가 역사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역사상의 위연을 평가하는 경우라면 문학적 이미지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대해서는 역사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성공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위연의 평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제갈량의 사후에 양의와 싸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위연의 큰 잘못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위연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소동을 벌인 것은 위에 투항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소동의 성질과 결과는 분명히 촉에 대한 역모이며 적대 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며, 억울한 죄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판정을 뒤엎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위연은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정사의 <양의전(楊儀傳)>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蔣琬)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털댔다.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비의가 깜짝놀라 이것을 후주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후에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쪽의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기술에서 적어도 두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역모의 생각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근 이 문제에 관하여 <사천문물(四川文物)>(1989년 제4기)에 도유지(陶喩之)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현재의 한중 석마파(石馬坡) 유적을 고증함으로써,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장완과 비의에 의하여 이미 억울함이 풀렸던 것과 역사상의 위연이 언제까지라도 억울한 죄를 쓴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도씨의 논문은 현재의 한중 북문 밖의 석마파 유적이야말로 위연의 억울함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석마파 유적 내에는 위연의 묘가 있고, 석마 한 마리는 파손되고 한 마리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석마의 모양과 풍격, 조각 기법은 후한 후기의 석각(石刻)과 일치한다. 석마는 현재 한중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도씨의 논문은 청의 건륭(乾隆) 연간에 왕행검(王行劍)이 펴낸 <남정현지(南鄭縣志)> 중의 <석마유적>이라는 대목을 인용하였다.

위연은 원래 노장(老將)으로 전공(戰功)이 있다. 말년에 함부로 날뛰어 자신도 죽고 가족도 몰살되었지만, 장완은 그 본의를 헤아려 양의를 죽이고자 하였을 뿐, 위연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에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여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석마의 유적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연은 억울하니 그 동안의 판결을 뒤엎어야만 할 것인가. 위연이 죽은 얼마후에 조정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그를 둘러싼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래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만약 한중의 석마 유적이 장완 등에 의한 시정의 움직임이며, 위연의 명예를 회복할 역사적 증거라고 한다면, 더욱 신뢰할수 있는 역사 기록을 찾아내서 이 견해를 보강해야만 한다. 둘째, 왕행검의 <남정현지(南鄭縣志)>에서는, 석마 유적을 장완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 준 증거로 삼았지만, 이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위의 삼국지 자료는 인터넷에 올려진 수많은 자료 중에서 서술이 잘 된 것을 추려 설명하기 위한 자료이므로 필자의 글은 아니다. 다음에는 한신에 대한 내용이다. 이 내용도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인데 필자가 중국에서 구해온 향토사료에서 발췌했다.

이 내용을 보면 장자방의 일화가 한의 왕실에 의해 조작된 것과 같이 한신이 마치 역심을 품어 당연히 죽인 것처럼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밝힌대로 한신이 유방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유방이 후세를 위해 공신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과정에서 한신을 토사구팽한 것이다.


-한신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제패한 대 공신이다. 그러나 공을 이룬 후에, 그는 토사구팽되었다. 그가 살해된 원인은 한결같지 않다.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한신은 모반한 것으로 인해 피살되었다. 일찍이 초한전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동이족 한신은 동이족의 전통적 근거지인 산동성 제(齊)나라 왕으로 봉해줄 것을 위협해 야심가의 취검(嘴 :부리와 얼굴)을 완전히 폭로함으로써 초한전이 막혀 지체되므로 유방은 그의 병권을 빼앗고 아울러 그를 같은 동이족의 초(楚)나라의 왕으로 바꿔치기 해 버린다.

한신은 초(楚)에 가서도 야심이 죽지 않아 관할 현읍을 순행하며 병장구를 진열하여 사람들에게 고발되었다. 유방은 진평(陳平)이 건의한 호랑이를 산에서 몰아내 물로 끌어들이는 주호이산계( 虎離山計)를 채용하여 운몽(雲夢)으로 출유(出遊)하여 노닌다는 명분으로 제후들을 진(陳)에 모이게 한 뒤 한신이 조회하러 오자 그를 체포해 버린다.(이때 그가 조회하기 전, 상희(相姬)가 진평의 모계임을 알고 가면 끝이라는 말을 해 주며 구명운동을 위해 보물창고의 패옥을 쓸 수 있도록 미리 한신에게 허락받는다. 한신은 막상 잡히자 자신이 상희의 충간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유방은 그가 세운 큰공을 생각해 그를 사면해 주어, 회음후(淮陰侯)에 강등해 봉한 후 신병은 장안(長安)에 거주하게 해 사실상 주거이주를 제한시킨다. 한신은 "이를 좇아 칭병해 조회하지 않고, 날로 원망하고 늘 앙앙불락하며 지냈다"(「사기」<회음후열전>)  서기전 200년 그는 중병(重兵)을 거느린 변방의 장수 진희(陳 )와 결탁해 재차 반란을 음모했다.

서기전 197년 진희는 과연 대(代)에서 모반하니 한고조가 친히 정벌했으며, 한신은 병을 핑계로 정벌에 수행하지 않았다. 음(陰:한신)은 사람을 진희에게 보내 말하기를 "만일 거병하면 내가 이를 좇아 공을 돕겠다"(「사기」<회음후열전>) 바로 이때, 그의 음모는 재차 사람들에게 고발되었다. 소하와 여후는 한신을 체포해 죽일 계획을 세워, 이 시끄러운 분열, 모반 반란분자를 깨끗이 제거했다. 사람들은 주(周)가 망하고 진(秦)나라의 혼란한 전쟁판 뒤의 한초(漢初) 사회 각 계급이 모두 휴식 보양할 여유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인정한다.

한신은 개인 은원(恩怨)으로 출발해 새로운 동란을 만들어 역사발전 추세를 위배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후(呂后)는 제 2차 초한 전쟁을 피하고 역사를 진보시키기 위해 위해 한신을 살해한 것이다. 새로 건설한 서한(西漢) 왕조는 겨우 소용돌이와  엄청난 피해를 없앨 수 있었다.(彭衛 <應當正確評價呂后>,<人文雜志> 1979년 제 2期)

이와 상반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한신이 모반할 뜻이 없었다고 말하여, 그의 피살이 완전히 공신들을 베어죽이는 차원에서 벌어진 것이라 말한다.  소위 한신이 밀모했다는 소위 "거짓말로 제 궁노(宮奴)들을 사면한다고 전해서 여후와 태자를 습격하려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반장(反將) 진희(陳 )와 더불어 밖에서 투합하려 했다는 것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고발자는 한신의 죽음을 준비한 일개 죄를 지은 동생이었다. 즉 그가 한신이 모의를 하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에 대해 그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다음, 한신이 제(齊)나라에서 세력있는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권하기를, "한(漢)에 반기를 들어 항우의 초(楚)와 3분 천하 하여 왕을 하라" 했으나 한신은 이를 물리쳐 "한왕이 나를 심히 우대했다", "내가 어찌 의(義)를 등지고 이(利)를 향하리오"(「사기」<회음후열전>)

그는 절대 유리한 조건 아래서도 오히려 모반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그가 장안에서 한가로이 유폐되어 있을 시에는 이미 병권과 무장이 몰수되어 없을 때인데 어떻게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재차, 한신이 체포된 이후 곧 즉시, 장락궁(長樂宮) 종실(鍾室)에서 참형되었다.

궁중의 종이 달린 종실이 어찌 형장이겠는가. 실제상으로는 이미 그가 암살된 것이다. 만일 모반이 근거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모반에 연루된 군신들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한(漢) 고조가 진희(陳 )를 평정한 것이 한(漢) 11년 10월에서 11월에 있었는데, 12월에 동원(東垣)을 공격하고, 한신이 모반했다 한 것은 제 2년 춘정월이었다.

진희는 이미 병사가 소멸 와해된 때인데 한신이 이러한 와중에도 능히 이에 응했겠는가. 한 고조가 진희를 평정하고 돌아와, "믿음을 주었던 신하가 죽는 것을 보니 기쁘면서도 이를 가엾게 생각한다"(「한서」作 "기쁘고도 슬프다(且喜且哀之)") 기쁜 것은 후사에게 두려운 장수가 죽었기 때문이요, 슬프고 가엾은 것은 무고한 대신이 살육된 것 때문이다.

이런 심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유방 자신도 한신이 진실로 모반하려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민(昭岷) <공신과 오래된 장수를 모해함은 여후가 권력을 찬탈해 반국(叛國)하기 위해 이미 방침을 정한 것이다. <무한대학 학보> 1977년 제 1기; 사계구<한신의 죽음을 논함>-호남사범학보 1980.4 게재)

사람들은 한(漢) 초에 성(姓)이 다른 제후 왕의 명운을 분석해 다음 3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학자들은 배신한 것과 배신하지 않은 것 2가지 경우로 보아 한신은 2가지 케이스로 중복한다) 하나는 한신과 같은 부류로 모반한 적이 없어 죄가 없는데도 마침내 모반죄를 덮어씌워 피살한 자로 양왕(梁王) 팽월(彭越), 조왕(趙王) 장오(張敖)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또 한 부류는 한왕(韓王) 신(信)과 같이 유방이 의심하여 핍박한 나머지 계속 몰고 나아가 반역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 케이스로 회남왕(淮南王) 경포( 布), 연왕(燕王:연은 동이족 혈통) 노관(盧 )이 바로 그들이다.

마지막 한 부류는 살륙을 면한 부류로 세력이 가장 작은 오예(吳芮)다. 다소 높은 공을 세워 황제 자리를 흔들 것 같으면 반란을 주관하지않든 안하든 상관없이 황제는 이유를 찾아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유방은 한신에 대해 이미 그가 패복(佩服)하여 백만의 군사를 끌고 전쟁마다 필승하고 공을 반드시 취한 군사재능으로 스스로 "불여(不如)"(「사기」<고조본기>)라 칭하고, 동시에 그에 대한 재능을 극히 조심하여 한신에 대해 대응한 정책은 곧 그를 중용해 썼다가 권력을 제한하고 그 다음은 주살한 것이니

곧, 전쟁 중에 자신에게 효력이 있는 필요한 장점을 취해 썼다가 전쟁이 점점 지연되는 추세를 보이자 점점 권한을 제한하여 일단 전국을 호령하던 대장군내지 한왕의 지위를 탈취하여 그 재능을 오래가지 못하도록 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같이 한신은 당연히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모반운운은 단지 유방과 여씨가 정권을 손에 넣은 후 공신과 맹장들을 구실을 잡아 살육한데 불과하다.(구명고(邱鳴皐) <위한신변무(爲韓信辯誣)> 서주사원(徐州師院)학보 1980.3 게재>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