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시대’ 주인공 김두한은 ‘협객’이었나
             
                        <신동아2002년10월호>                   

‘장군의 아들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한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고 있다.
주먹 하나로 일제의 폭압에 맞선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김두한은 과연 시대의 영웅인가.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살펴봄으로써 ‘장군의 아들’의 실체에 접근해보자.

역대 국회의원 인명록에 나타난 김두한의 기록을 보면 “김좌진 장군의 2세이자 장자구다리(지금의 광교) 아래서 자고 밥을 얻어 나르던 똘마니였다. ‘입뽕’이란 이름의 협객이 되어 종로를 어지럽히던 신마적·구마적을 때려눕히고 공산당을 때려잡던 옛날 얘기로 유명하다. 3대(종로을·무소속), 6대(용산·한독당)에 걸쳐 재선의원이 되었다. 가는 데마다 뉴스를 만들고 트러블을 만드는 사나이. 6대 국회에서는 오물투척사건으로 구속까지 되었다. 형무소 출입만 해도 무려 80여 회에 달한다.”(‘역대 국회의원 약력 및 헌정일지’, 한국근현대사 인명록6, 여강출판사)

이 기록에 의거하더라도 우리는 김두한의 일생에서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읽어낼 수 있다. 아마 이런 이유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주먹들이 명멸했지만 김두한만큼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인물이 없을 것이다. 만화에서부터 소설,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김두한은 장르와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그것도 ‘긍정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이 한창 진행되는 오늘날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김두한의 삶이 이렇게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재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을 김두한 실제 삶의 궤적을 추적해 살펴보자.

김두한은 1918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했다. 청산리에서 일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다보니 교동 보통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장군의 아들은 청계천의 수표교 밑에서 자랐다. 청계천은 옛 서울의 남쪽과 북쪽을 나누는 경계였으며 그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수표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현 장충단공원으로 이전)는 청계천 상류에 위치한 다리로 지금은 복개되어 수표교길(현 가회동에서 내려와 종로를 지나 영희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주먹’이 된 장군의 아들

조선이 개항한 뒤 서울에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는데 그들의 거주지역은 궁궐을 기준으로 할 때 개천의 바깥쪽으로 한정되었다. 먼저 개천의 남단에는 중국인들이 둥지를 틀었다. 수표교 남단, 지금의 소공동과 서소문 일대에 중국인 상가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다. 그후에는 일본인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의 거주지역이 충무로 일대에서 남대문과 수표교 남단, 을지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여전히 청계천을 넘지 못했고 넘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본은 과거 청계천을 경계로 구분되었던 지역간 위상을 역전시켜 나갔다.

도시기반 시설 정비를 위한 모든 재원이 청계천 이남으로 집중되면서 청계천은 우리의 옛것이 지켜지는 야만의 조선 ‘북촌’과 일본화된 문명의 ‘남촌’을 가르는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니 천변의 북촌 조선인 거주지역의 생활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빨래터요 야채 세척장이었다. 이 지역에는 계속 물장수가 돌아다녔고 아낙네들은 빨랫감을 들고 나왔다. 

또 조선인에게 본래 개천 다리 밑은 일찍부터 거지들의 자리였다. 석교(石橋) 아래는 거지들의 훌륭한 주거지 구실을 했다. 그래서 천변은 치안의 사각지대가 되어갔다.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나 천변은 우범지대였다. 특히 수표교 건너 수표동과 관철동 일대에는 기생집이 밀집해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기생집을 중심으로 술과 돈, 그리고 여자와 권력이 모여드는 곳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밤의 사람들’인 깡패, 건달, 주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고아나 다름없게 된 김두한이 자란 곳이 바로 이 수표교 밑이다. 김두한은 해방공간에서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정진용(YMCA 권투부 출신)과 함께 시멘트로 만든 역기와 철봉틀로 몸을 단련했다. 이 점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많은 주먹들이 권투나 유도선수 출신인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김두한은 평소 자신 때문에 종로 주먹패의 본거지로 유명해진 종로 우미관(관철동 89번지) 뒷골목 음식점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우미관은 한국인들이 출입하는 대중영화관으로 그 뒷골목에는 부경루, 태왕루라는 큰 음식점들이 즐비했고 인사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특히 여기서 김두한은 숙식을 해결했다. 김두한은 유흥가나 상가주변을 배회하면서 ‘힘’으로 호구를 해결하는 주먹패였던 것이다. 그를 ‘협객’ 또는 ‘항일주먹’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청계천 북쪽의 북촌마을까지 세를 확장하려 한 일본 깡패들과의 ‘터 싸움’에 기인한다.

김두한말고도 해방 전에 ‘항일주먹’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주대륙의 ‘시라소니 이성순’ 씨름꾼 출신의 ‘상하이독수리 장천용’ 박차기의 명수 ‘호랑이 이상대’ 연전 출신의 유도사범 ‘김후옥’ 일본 명치대 상과 출신의 ‘박주용’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중에서 유독 김두한이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강한 ‘저항민족주의’가 담겨져 있다. 즉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민족적 상징으로 재현될 수 있는 혈통적 요소를 갖고 있다.

저항민족주의와 향수의 정치

따라서 그가 일본깡패들과 일시적이나마 적대적 대립관계를 가졌다는 점은 그러한 상징성을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저항민족주의의 재현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두한의 재현은 민족적 고난에 대한 기억과 그것의 극복을 지속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사회적 내부갈등을 봉합하려는 지배세력의 ‘기억의 정치’에 기여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또는 나의 과거에 대해 기억해보자.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과거의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를 ‘주관적으로 재처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의 기억을 다시 프로그래밍하는 수단들, 즉 TV와 영화들은 너무나 쉽게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는 틀을 대중에게 강요한다. 이를 통해 대중은 자신들이 실제 기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억의 재현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실 김두한이 주먹이라는 ‘폭력’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깡패에 불과했다는 ‘기록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침묵된’ 기억들 속에는 김두한이 깡패라는 점이 역으로 대중을 흡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숭고한 이념과 자기헌신이 아니라 즉각적인 행동과 보복은 민중이 갖고 있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다시 말해 일제의 억압통치 시기에도 서울의 어느 한 곳에서는 의인(義人)이 있었고, 그 사람은 일자무식이지만 일본깡패와 싸워 통쾌하게 승리했다는 과장된 사실은 그것이 사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이 점에서 김두한의 재현에는 저항민족주의와 대중적 영웅주의가 접합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몰아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주먹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보다는 일제와 타협한 경우가 많았던 우익세력들은 해방공간에서 국가형성의 주체로 인정받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즉 우익은 취약한 정당성으로 인해 해방 후 정치활동에서 좌익세력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익은 일찍부터 취약한 정치세력을 보완하고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설기관인 청년단체를 활용했다. 사실 이들 청년단체는 임원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씨름, 유도, 권투를 했던 운동선수들이나 주먹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암흑가의 주먹들이 공적인 정치영역에 동원되어 자유당시절에 유명했던 이정재·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의 효시가된 것이다. 물론 해방정국이라는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청년들을 동원한 것이 우익만은 아니었다. 좌익에서도 청년들을 조직화했고 이 과정에서 한때 수표교 밑의 절친한 친구요 동지였던 김두한과 정진용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정진용은 좌익의 ‘조선청년전위대 행동대장’이 되었고 김두한은 유진산이 조직한 우익의 ‘대한민주청년동맹’(이하 대한민청·1946년 4월 결성)의 행동대장격인 감찰부장이 되었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이 민족주의 내부의 갈등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아마도 김두한으로 하여금 맹목적인 ‘반공투사’가 되도록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김두한은 좌우대립이 빚어낸 극한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상황에서 누구보다도 확실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력충돌을 일삼았다. 일자무식인 김두한이 좌익투쟁 선봉장이 되도록 한 것은 우익지도자들의 입김이었다.

김구·이승만을 위시하여 수많은 우익의 지도자들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계기로 이 주먹들을 규합하여 ‘행동화의 명분’을 제시해주고, 좌익과의 투쟁대열에 동원했다. 경찰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좌익세력을 직접적으로 탄압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뒤에서 우익과 경찰의 비호를 받는 청년단원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직접 ‘피’의 투쟁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청년단체와 경찰의 공공연한 관계는 김두한의 회고록에서도 읽을 수 있다.

‘좌익과의 투쟁을 위해 때로는 협박공갈로 조달된 자금으로 대한민청 감찰부와 별동대 운영에 충당했다.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 그리고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묵인하에 수차례에 걸친 강도행위로 반탁자금 7천 만원을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김두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반공(反共)의 화신으로 변신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청년단체들이 동원되었다. 이 진압에 가장 공이 컸던 단체가 주먹패로만 이루어진,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 별동대원’이다. 이들은 장택상이 넘겨준 경찰전문학교 실습용 총 300여 정과 수류탄 3상자를 가지고 용산철도파업현장을 습격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김두한 스스로 ‘죽창으로 전평(좌익의 전국노동자평의회) 대원을 죽이고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곧 이어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로 인해 발생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처절한 생존투쟁) 기간에도 김두한은 경찰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하고 대구로 파견되어 경찰과 합동작전으로 좌익을 타도했다. 이들의 진압이 얼마나 철저했으면 미군정조차도 청년단체들을 이용한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기록할 정도다. 좌익에 대한 진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항쟁 후 1년에 걸친 우익청년단원들의 보복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방첩대’란 간판 아래 서울서 파견되어 왔다는 군복차림의 청년들은 대구 시내 중심지에 있는 귀속가옥을 근거해서 급조유치장을 만들고 영장 없이 지방유지, 교육자, 신문인, 실업인들을 대량으로 잡아 가두고는 구타 등 사형(死刑)을 가하고 감금했다. … 그들은 지방민을 괴롭혔는데 ‘너는 빨갱이가 아니냐’고 물었다.”(이목우, ‘대구 10·1 폭동사건’, 세대, 1965)

이렇게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의 무자비한 진압이 성공하고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검거가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역으로 경찰과 우익의 힘이 증대되었다. 경찰의 실질적인 보조기구 역할을 했던 우익청년단원들의 잔인한 행동들은 ‘반공’에 앞장서 고귀한 희생을 치른 애국적인 행동으로 탈바꿈해버렸다.

그러나 미군정으로서는 이들의 지나친 대공투쟁을 무작정 방관할 수 없었다. 1947년 4월 김두한은 좌익이 주관하는 연극 ‘제3전선’이란 공연이 열리던 시공관을 습격하여 3명의 좌익인사를 납치, 죽이는 사건에 가담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김두한은 투옥되고 1947년 5월 대한민청은 미군정청 해산명령 제1호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해산된 민청은 곧 유진산에 의해 청년조선총동맹으로 재건되었다.)

이러한 김두한의 반공주의적 행태 역시 김두한이 지속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즉, 지배세력의 ‘기억의 정치’란 구미에 잘 맞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두한의 재현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 지배세력의 아킬레스건인 ‘친일주의자=반공주의자’라는 등식을 해체하고, ‘민족주의자=반공주의자’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김두한은 지배세력의 약점을 가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종로깡패에서 정치인으로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기존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이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삼았다. 대한청년단 지부가 만들어지고 각 지부를 중심으로 주먹세계도 새롭게 재편되었다. 물론 대한청년단과 주먹세계는 별개의 조직이었지만 대한청년단 각 지부 및 단원들 중에는 주먹출신들이 많았다.

이승만 자유당시절 주먹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깡패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깡패들이 기존의 주먹들과 다른 점은 이들이 정치권력의 하수인으로 들어가 반대 정치세력들에게 정치폭력을 휘두르는 대가로 생존하면서 권력의 비호 아래 힘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과 자유당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의 배후에는 사병처럼 동원된 정치깡패들이 있었다.

1951년 부산정치파동(장기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 파동) 때에는 백골단, 딱벌레, 민중자결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동원되어 야당의원들과 국민을 협박했고,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4·18 고대생 시위대를 습격한 것도 이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정재 사단을 들 수 있다. 원래 이정재는 대한청년단 서울시 당지부장(종로)으로 씨름을 매우 잘했다. 자유당내 족청과 비족청계의 내분과정에서 족청계 타도에 동원되어 자유당 조직부차장까지 역임했다. 그가 당시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를 배경으로 이기붕 시절 권력의 배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자유당 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다.

시공관 사건으로 투옥된 후 풀려나온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후신인 청년동맹 감찰부장을 거쳐 대한청년단 감찰부국장이 되었다. 여전히 화신백화점과 단성사 일대에 힘을 가졌지만 대한민청의 해산으로 그 조직은 거의 와해되어 있었다. 그후 김두한은 특별한 출생과 반공투사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노총 중앙위원과 자유당위원을 거쳐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주먹시절 자신의 무대였던 종로을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주먹에서 정치가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한다. 많은 사람들은 김두한이 종로을구 유곽창녀들의 덕택으로 의원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여기에는 1954년 한국정치의 특수한 맥락이 있다.

사사오입에 반대해 민주당으로

1951년 전쟁이라는 국가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 제한 철폐’라는 개헌을 기도한 것. 이를 위해서 여당이 주도하는 의회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유례 없는 부정선거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청년단을 위시하여 이승만을 추종하는 4개 관변단체(노총, 농총, 대한부인회, 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이 급조되어 창당되었고 여기에 흡수된 세력이 3대 선거에 후보로 대거 출마했다.

자유당의 이름을 걸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두한도 그중 한 명이다. 당시 많은 후보들이 정당의 이름을 걸기보다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그것은 ‘정당’보다는 ‘인물’ 중심이 투표선택의 기준이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김두한이 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덕분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온건 좌파 및 통일지향적 중간파 세력들(원세훈, 조소앙), 민족주의 세력(김구, 오하영) 들이 한국전쟁 전후로 납북되거나 피살되고 분단의 고착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좌익뿐 아니라 우익세력의 일부까지도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져버렸다. 극도로 보수 우익화한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틈새에서 극우 반공주의자 ‘김두한’ 의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결과는 예정대로 자유당의 승리였다. 전국적으로 자유당은 친(親)자유당 무소속후보 15명을 포함하여 114석을 얻었고, 유일 야당인 민국당이 15석을, 나머지 군소 정당 7석, 무소속이 67석을 차지했다. 그래도 총선결과는 자유당이나 이승만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소속의원을 끌어들여야 했다. 결국 이승만의 적극적인 회유와 협박으로 개헌 가능 의석인 136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4년 9월6일 실시된 개헌안은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것을 이승만이 사사오입하여 가결시킴으로써 집권 연장을 꾀하자 이를 계기로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범야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두한은 과거 친분이 있던 유진산·조병옥을 따라 한국 야당의 대표격이 된 ‘민주당’에 가담함으로써 극우반공투사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적’ 반공투사로 또 한번 변신하게 된다.

그러나 원래 친일세력의 본거지였던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을 중심으로 새로 창당된 민주당의 ‘민주주의’란 ‘반이승만주의=반독재’의 의미만을 갖는 ‘반공보수적’ 자유민주주의였을 뿐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여전히 야당정치인들의 배후에는 해방공간에서부터 물려받은 주먹들의 비호가 있었다. 이들의 정치행태는 사실상 이승만에 반대한다는 사실만 빼고는 더 비민주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야당에 가담했던 주먹들은 자신들이 자유당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이정재·유지광 사단에 포섭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배고픈 야당정치인들과 동고동락했다는 것을 내세워 ‘의리와 명분’을 지킨 주먹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이들 양 주먹들은 1957년 5월15일 민주당의 장충단 시국강연회장에서 맞붙게 되는데 이때 강연회장에 난입한 난동의 책임자는 이정재 휘하의 유지광이고, 강연회 주최측 경비 담당자는 김두한 의원이다. 

대중에게 카타르시스 안겨

그러나 이렇게 정치가로 변신한 주먹출신 김두한 의원(6대 국회의원 용산구 보궐선거에서 한독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됨)이 독재에 항거하는 정치활약이 두드러졌던 때는 이승만 정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서다.

1966년 한국비료공업(사주 이병철)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른바 1963년 삼분폭리(설탕, 밀가루, 시멘트) 사건과 함께 누군가 부정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을 담보로 일어났다. 때문에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와 무관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김두한은 국회에 출석한 국무위원석에 직접 분뇨를 뿌려 구린내 나는 부패정권을 규탄했다. 그 유명한 국회 오물투척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은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결국 이때의 고초로 폐인이 된 김두한 의원이 제명대로 살지 못한 이유는 김형욱의 고문이 원인이었다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말한다. 그리고 장준하 의원은 규탄궐기대회에서 박정희를 심하게 몰아붙여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박정희 부패정권에 저항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바로 이점, 즉 장준하와는 다른 출신과 성장 배경을 갖고 있는 김두한이 국회에서 오물을 투척했다는 사실은 김두한을 또 다시 민중적 요구의 대변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한국 현대정치의 민중적 요구와의 단절을 통렬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것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김두한의 모습은 민중이 영웅시할 만한 자격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한 인물이 공식적 수준에서 이토록 지속적으로 재현된다는 것, 그것도 한국과 같은 반공규율사회에서 그렇다는 것은 김두한이 지배세력의 구미에 맞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역으로 김두한에 대한 재현이 일관되게 대중의 흥미(일자무식이지만 ‘정의’롭고 정의를 실제 실현하고 있는 모습)를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두한의 재현은 지배세력의 요구와 피지배세력의 요구가 접합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덧붙여 김두한의 재현에는 영웅주의의 하위담론으로 ‘사나이 담론’이 놓여있다. 의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나이 담론은 사실상 무협소설 혹은 무협영화(홍콩 느와르는 이 연장선에 있다)를 관통하는 코드로 이는 전형적인 남성대중문화의 핵심코드다. 이 점 역시 김두한에 대한 재현물에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것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김두한에 대한 재현, 그리고 그것으로 구성되는 김두한 담론은 크게 보아 3개의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주의·반공주의·민중적 영웅주의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김두한의 존재를 규정짓는 ‘폭력주의’가 빠져 있다.   

폭력의 논리와 영웅의 논리

‘협객’을 닮은 해방전후의 주먹이 의리와 이념에 따라 움직였다면 요즘은 철저하게 돈과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조폭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되었다. 주먹패, 깡패, 조폭이 사용하는 폭력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차이’란 어디쯤일까.

폭력은 우리 현실 속에 광범위한 현상으로 엄연한 사실로 존재해왔다. 구타, 살인, 고문, 학살, 테러 등으로 상징되는 폭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시대 김두한은 생존을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살아왔고 해방공간에서는 반공을 위해 민중의 자율적 결사를 폭력으로 파괴하면서 수많은 역사적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성장에 커다란 해를 끼쳤다. 그리므로 우리는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폭력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개인적인 삶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삶으로 역사에 진 빚이 많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김두한이 박정희 독재라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또 다른 아이러니다.   (끝)

                               오유석·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소 연구원 ysoh@mail.s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