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 역사전개의 올바른 방향성 탐구

아래 자료는 교육인적자원부 후원으로 2003년 9월 30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있었던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주관
“고대 한일 역사전개의 올바른 방향성 탐구” 학술대회 자료집 내용중 일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광복이후 최초로 우리의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여 민족사학자들이 주최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잃어버린 한국 고대사의 복원

                                                     글쓴이 : 홍순주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회장)


        목차

    1. 문제제기
    2. 두 개의 잃어버린 역사의 실체 파악
    3. 고대 한일 관계에 있어서 역사전개의 방향성 파악
    4. 한일 역사공동위원회의 효율적 기능을 위한 제언
    5. 결 론



(1) 문제제기


우리나라 고대사 분야에서 그간 많은 민족주의 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해왔지만 본인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74년도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성호 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과 대학시절 창작과비평지에 개제되었던 천관우 선생의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관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편의 글은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처음 엿본 것 같아서 당시로서는 꽤 충격적인 역사적 가설을 제기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우리 나라 고대사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숨겨진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으로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후 민족의 자긍심이 높아질 즈음 한단고기와 같은 상고사 분야에 대한 일련의 서적이 출간되면서 또다른 우리의 실종된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후 고대사 관련서적을 숙독해오면서 우리나라 역사에는 <두가지의 커다란 역사적 사실>이 사라진 채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먼저는 한국상고사 부문에서 고대 한중관계에 있어서 실질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가졌던 단군조선의 실존 역사가 단군신화로 그릇 해석되어 그 역사적 실체가 흔적만 남았으며,

두 번째는 옛 우리민족인 부여계 세력이 세운 비류백제의 역사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복한 후, 왜열도로 이주해가서 망명국가로서의 일본이라는 국가로 변신된 관계로 고대 비류백제의 역사가 실종되고만 사실이 그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회에서는 이와 같은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재조명이 국가나 민족에게 고대 한중 및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판단하여 실종된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고대 한일역사 전개의 올바른 방향성 탐구」을 주제로하여 학술 발표대회를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년간 이 분야에서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위해 애써오시고 개별적으로 연구해오신 원로 학자분들을 한자리에 모아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한일 고대사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명쾌하게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광복 후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기존 국내 사학계에서 이러한 학술적 논점(issue)들을 근거없는 학설로 등한시 해왔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를 전공한 전문적인 학자도 부족하고 연구실적도 빈약한 상태에서 사학자 스스로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하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는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에서 누군가는 이러한 난관을 뚫고 자랑스런 우리 역사를 회복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아 강대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2. 두 개의 잃어버린 역사의 실체 파악


가. 한국 상고사의 복원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통설의 근거는 단군조선의 역사(BC 2333년 건국)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설명하는 제왕운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옛 문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단군 이전 환인․환웅시대까지 다루고 한단고기 등 여러 책들이 상고시대의 민족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강단 사학에서는 이들을 정사(正史)가 아닌 2차 사료로 돌리고 있고 삼국유사의 단군기록마저 신화로 잘못 해석한 채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적 실체 파악을 회피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역사는 제 1대 단군 왕검(BC 2333)부터 시작하여 제 47대 단군 고열가(BC 238)까지 진행된 2000여년간 지속된 고대국가로서 당시 고대 중국 하․은․주 국가를 제후국으로 지배했던 자랑스런 민족의 원 역사라 간주할 수 있는 상징적인 시대이다.

단군조선은 북부여의 해모수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데(BC 238) 바로 그 당시의 중국 역사는 춘추전국시대로서 진시황제가 통일을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중국 한나라 때의 고조선은 단군조선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현 요서지방에 위치하였던 단군조선의 번조선으로서 기자(奇子)조선(단군 제 22대 색불루, BC 1285년 성립)을 말하는 것으로 뒤이어 위만조선으로 변경되었다가 BC 108년 우거왕 때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선사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신화적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문자시대에 와서 역사 사실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는 것과 동등한 것으로 단지 허구적 이야기가 아닌 선사시대를 표현하는 또다른 진실된 역사표현으로 단군신화는 단지 설화가 아닌 우리나라의 상고사의 살아있는 기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단군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삼황오제 및 하은주 시대로서 이들을 제후국가로서 다스리는 전성기의 역사이었는데, 삼국유사의 단군기록을 이해함에 있어서 선사시대의 역사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실제 사실을 신화적 기법으로 상징적 은유적 표현에 의해 씌여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곰 호랑이 설화적 이야기로 해석․처리됨으로써, 2000년간 중원을 지배했던 자랑스런 단군조선의 역사가 말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북부여에 의해서 단군조선이 멸망한 이후까지 존재했던 요서지역의 번조선이 우리 역사에서는 단군조선의 개념과 애매모호하게 혼동된 채 표현되어 오히려 한나라에게 망하여 한사군으로 설치되는 부끄러운 역사로 바뀌게 된다.

나. 비류백제(일본으로 간 백제의 통칭, 구다라)의 성립과 대외적 정복 과정.  

비류백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 먼저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의 행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고추모가 동부여의 금와왕을 피해 졸본 부여로 피해오고 그 지역 우태국의 족장 미망인 소서노와 결혼하여 온조를 낳아 전남편 소생 비류와 함께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한편 고추모의 전부인 소생 유리가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와 비류․온조 형제는 남쪽으로 피해 달아나 현난하 서쪽 발해만 내륙지역(기록 대방고지)에서 BC 18년경 비류를 중심으로 건국하게 된다.

그 후 인접한 낙랑군의 압력으로 비류계 남부여족은 선단으로 해상탈출하여 한반도 서해안 지역 미추홀로 이주해 오는데 안정적인 정착을 원했던 온조계 해씨는 형 비류와 갈라진 채 현 경기도 광주 부근으로가서 온조 십제를 건국하고, 반면 비류계 진씨는 한반도 남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목지국 등 토착 마한세력을 정복하고 AD 1C경까지 웅진(현 공주) 지역에서 비류백제를 완성시킨다.

해상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닌 비류백제는 AD 2C를 전후로 하여 점차 왜열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큐우슈우지역을 정복하고 현지 담로국(야뫼도 산문 등)을 세워 통치하였고 점차 세토나이까이내해를 거쳐 난파(난니와, 현 오오사카), 나라 등 근기지역까지 그 세력을 뻗치게 된다.  

한반도 남부와 왜열도까지 평정한 비류백제는 AD 3C중엽부터는 원거주지였던 중국대륙의 산둥 반도 및 발해만 지역으로 재진출하기 시작하였고, AD 4C초에는 고구려의 낙랑군 통합과 함께 대방지역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여 해상무역의 발판을 구축하고, 점차 AD 4C말경에는 옛 요서지역(현 난하서쪽)과 지금의 북경부근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그 세력권을 두게되자 황해를 백제내해로 하는 거대한 해상세력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비류백제의 정체는 이처럼 중국에 거점을 둔 외백제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온조계 포함한 본백제, 일본 열도에 진출한 왜백제 등 크게 세 지역을 기본세력권으로 통치하면서 22개 해외 담로국을 갖춘 동방의 로마제국 같은 해상제국 국가였던 것이다.

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비류백제의 실종원인  

여기서 그러면 왜 비류백제는 우리 역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온조백제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비류백제의 실종원인을 크게 세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일본서기의 의도적 역사 왜곡, 둘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의 온조백제 위주의 서술, 셋째는 일제 때 일본사학자에 의해 양성된 국내 친일역사가들에 의한 무비판적 식민사관 수용 및 유지등의 요인들로 볼 수 있다.

먼저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AD 396년(병신년) 비류백제 응신(應神)천황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격퇴당하자 해상탈출을 하여 당시 백제의 지배권에 있었던 왜열도로 달아나 AD 400년경 나라지역에 망명 정부(나라백제, 야마토 왜, 대화왜)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 수많은 백제유민들의 이주가 있었고 한반도의 온조 백제계와는 계속해서 정치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AD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한반도의 백제세력이 몰락하고 백제 부흥군도 와해되자 AD 670년 천지(天智)는 일본이라는 국가로 명칭을 바꾸어 새나라를 건립하게 되었고, 뒤이어 AD 720년까지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 가야, 신라계 등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이들 고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하는 의도적 역사왜곡이 최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일 고대관계의 역사전개는 중세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의 역사 진행과 흡사하다. 즉 프랑스 노르망디지역의 정복자 윌리암 공은 1066년 영국을 정벌하는데 성공하여 당시 영국의 귀족 지배계급은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프랑스인들이고 하층민은 영국 원주민으로 구성되었으나 영불간 10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각국의 입장은 서로 적대적이 되어 프랑스에서 건너간 고대 영불 양국의 친밀한 역사적 관계가 끊어지고 각자의 독립적인 국가 실체(Identity)를 찾아 서로 정치적으로 독립된 별개의 두 나라로 변모한 것처럼, 한일관계도 한반도의 백제세력이 정복민족이 되어 왜열도로 이주해 고대국가를 세웠으나 한반도 본백제의 멸망 후 일본이라는 실체의 인식과 더불어 별개의 국가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고려인종 때 김부식은 1145년경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왜열도로 건너간 비류백제계가 이미 일본국으로 변신된지 수백년이 흐른 뒤였고, 신라출신이었던 그의 역사관은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보아 그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과거 신라보다 그 정치적 우위에 서서 커다란 해상세력을 구축했던 비류백제의 활약을 없애버리고 한반도에 계속 남아있었던 온조 백제를 중심으로 새롭게 서술하였던 것이다.

그 예를 살펴본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비류와 온조를 언급하면서도 비류가 미추홀에서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여 역사의 흔적만 남기고 있는 점과 여우, 호랑이 등으로 표현한 비류계 세력에 의한 위례성 침입을 신화적 서술 방식으로 감추고 있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 온조계 개로왕 피살 후 공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의 경우 개로왕과는 군신관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관계로 서술하여 왕조를 잇게 한 점, 개로왕의 친동생 곤지에 의해 일본에서 양육된 무령왕이 일본 근처 사마섬에서 태어난 후 즉시 한반도로 되돌아 온 것으로 서술한 점 등으로 볼 때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비류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실에 대한 증명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에 건너온 동경제국대학 출신 역사학과 교수들은 조선총독부아래 조선사편수회에 소속 위촉되어 소위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인에게 열등감을 갖도록 조선사를 편찬하고 또한 한국의 고대 역사 문헌들을 수집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폐기 처리하였으며 더욱이 일본국 생성의 근원이 되는 비류백제의 역사를 은폐하려고 공주의 송산리고분 등 여러 고고학적 증거 유물을 약탈하는 등의 행위를 자행하였다.

당시 일본이 친일파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경성제국대학에서 이들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을 전수받은 이병도 등 친일계 사학자들은 이를 비판할만한 역사적 식견과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일본사학자들이 교묘하게 왜곡시킨 조선역사를 수정없이 받아들였고 해방 후에 이들이 국내 강단 사학계로 진출하여 역사학계의 기득권을 차지하게 되어, 일본사학자가 만들어 놓은 왜곡된 역사가 그대로 유지된 채 국내학계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식민사관 역사에 대한 꾸준한 문제제기와 정당한 역사회복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거나 반대하며 비류백제 등 우리의 중요한 역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3. 고대 한일 관계에 있어서 역사전개의 방향성 파악  

한일 고대역사의 그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의 성패는 단지 과거 역사의 기록을 사실적으로 나열하려는 것이 아닌 미래의 한일관계에 이런 사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21C 한일 양국간의 바람직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는 고대 한일역사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 한일 역사 흐름의 전개방향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수적인 절차라고 생각된다. 흔히들 한일간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말하는 것은 지역적인 근접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간 역사흐름의 방향을 서로 정반대로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즉 고대 한국의 가야, 백제 세력들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동진한 역사적 사실 곧 정복이나 이주과정을 통해 고대 한국계 정권이 왜열도내에서 탄생한 것이 역사의 진실인데도 불구하고 반면 일본측은 고대 한국인에 의해 자신의 고대국가의 기원이 된 사실을 전면 감추거나 부인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왜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양국간 고대 한일 관계의 역사 전개의 방향을 서로 달리 봄으로써 두나라는 가까운 이웃국가이면서도 정치적 마찰과 불행이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두나라의 올바른 역사 흐름을 살펴본다면 어떤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 시기상으로 볼 때 AD 1 - 4C 경에는 한반도에 있었던 비류백제계세력이 가야, 임나 등 남부지역을 지배, 장악하고 있다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왜열도로 달아나서 현지에서 백제 망명정부가 세워지고 한반도로 복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AD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왜열도의 백제계 야마토정부는 일본으로 변신한 후 AD 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삭제하고 왜열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일본의 모체가 되었던 비류 백제계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은 일본의 입장에서 마치 자신의 역사인양 편입시켜 서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탄생이 원래부터 왜열도에서 일어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서기는 천손강림설이나 고대 왕명 및 왕력의 연도조작(예 일본서기 웅신기년 2갑자 120년 소급)을 하여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역사적 시간만 달리하여 동일한 국가세력 이었던 비류백제의 한반도 남부지배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채택하는 이중적인 역사왜곡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식 역사해석으로 본다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러 왜열도에서 일본세력이 서진(西進)해온 것으로 보아 고대 한일 역사전개를 정반대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AD 4C말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실은 그 당시 한반도에 있었던 일본의 전신인 비류백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역사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한반도 남부는 한일간 공통으로 지배하였다고 주장되는 지역, 즉 역사시기만 달리하여 서로 겹쳐지는(overlapping) 동일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학계가 비류백제의 왜열도 진출을 밝히지 못하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것이 온조백제라는 기존 역사관을 계속 유지하고, 또한 고대한국의 영향없이 왜열도에서 저절로 일본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만일 현재처럼 수용한다면, 즉 고대한일양국이 서로 지역적으로 분리된 채 아무런 정치적 관계없이 서로의 독자적 국가세력으로 각각 발전하였다는 종래의 학설을 유지한다면 한일 양국간의 역사적 마찰과 정치적 분쟁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며 아마도 앞으로 불행한 과거가 되풀이 될 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과거 19C말 ~ 20C초 일본 정치가의 고토회복 주장 및 정한론, 일본 역사학계의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 등 식민지 지배이론으로 합리화 되었던 것이고 한일간의 불행한 정치 관계를 낳았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 년 전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도 이러한 일제시절의 국수주의의 재현과 군국주의 부활의지의 일부라고 볼 수 있으며 일본을 재무장하려는 맥락의 한 일환으로 사전작업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현재 양국간 역사인식을 위한 공식적인 채널기구인 한일 역사공동 위원회가 현재 활동 중인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동정의 역사 즉 비류백제계 등 고대 한국인들에 의한 고대 일본국가의 성립과정을 일본측에게 정확하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의 역할은 국민적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금번 학술회의는 기존 한국의 사학계가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진실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하여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적 전개가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진행되었다는 역사이론에 대한 문헌적 검증을 시도하고 한일 고대역사의 진실을 규명하여 한일 양민족의 역사적 동질성을 밝혀 냄으로써 21C 정치, 외교적으로 동반자적 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미래의 바람직한 이웃 국가상을 정립하는데 있다.

4.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의 효율적 기능을 위한 제언

과거 2 ~ 3년전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이 일어나 한일 양국간 첨예한 정치, 외교적 분쟁이 일어났었고 이에 대한 해결 대책의 일환으로 현재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가 발족되어 한일역사에 대한 공동토론 및 회의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연구회는 이런 공동위원회의 역사활동의 중요성을 알고 이 위원회에서 고대사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측 대표 세명의 교수들이 지니고 있는 고대한일 역사인식을 살펴본 결과 기존 강단 사학계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고대백제계의 왜열도 진출에 대한 역사적 통찰없이 한반도 내 온조백제의 입장에 서서 공동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역할이 고대한일관계의 역사적 전개 방향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고 또한 민족사학자들의 그간의 연구실적을 포함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단지 개인의 역사관을 전달하거나 양국간 역사분쟁이 재발되지 않을 정도의 서로 적당히 조율하는 정도의 타협적이고 소극적인 회의를 계속한다면 한일고대사의 비밀은 공식적으로 영원히 밝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막대한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국가적 단위의 공동회의 기능조차 무의미해지고 온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의 한일 역사 왜곡 수정에 대한 큰 기대도 할 수 없는 실정에 처해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본 연구회는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올바른 정립의 필요성과 한일 역사 공동회의의 원활한 역할을 위하여 국내 해당 사학자와 민족사학자간의 허심탄회한 논의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번에 균형적인 학술대회를 마련하였으나, 실제로 공동회의 담당자들이 종합토론을 할 수준의 연구 준비가 미비할 뿐 만 아니라 학술 토의 참가자체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이제 고대사 분야의 연구에 있어서도 강단사학자의 편협한 시야보다는 오히려 민족사학자들의 연구실적이 훨씬 높다고 보기 때문에 먼 장래를 보고 이와 같은 성격의 학술대회를 되풀이 개최하여 양진영간 학술 토론의 공동참여를 유도하고 점차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시도하여 이와 같은 가설에 대한 검증기회를 서로 가져 일반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 진실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이리하여 해방 후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사학 전공이 아닌 비전공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현실적 모순과 기존사학계의 이런 분야에 대한 전공기피 및 학위수여 제한, 학술대회 불참 등 역사연구의 비정상적인 파행을 막을 수 있도록 정부 및 시민단체에 의한 구조적인 정비 노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따라서 본 회의를 지원하기로 한 교육인적자원부의 결정은 한국 고대사의 올바른 진실 파악과 사학계의 구조적 난맥을 타파하고
장차 교과서 개편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며 앞으로 일본사학자를 포함시킨 국내외 사학자가 참여하는
국제 학술회의로 발전시키도록 계속 후원되어야 할 것이다.

5. 결론

(한국사학계의 구조적 모순 타파와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복원을 위한 실천 과제)  

일제 식민지 사학이 국내역사학계에 침투한 이후 과거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반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일제아래 일본인 사학자에게서 훈련받은 국내 원로 역사학자들이, 마치 정치, 언론, 문학 등 다른 여타 분야에서의 친일세력들이 해방 후 미군정아래 초기 이승만 정권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남게되어 과감히 처단되지 못하고 있었듯이, 오히려 강단 사학계를 비롯하여 역사, 문화 학술단체의 중추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때문이었다.

이는 초기 단계부터 한국 역사학계의 비극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친일적 인적자원 구성과 식민사학의 제한된 틀속에서 단군 고조선 및 비류백제 등 민족주의적인 역사를 전문화된 우수한 인재들이 전공하고 연구를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등 비합리적 학사 행정으로
이들 민족사학자들의 강단사학계 진입을 억제해왔으며, 이런 역사가설에 대한 학문적 검증을 할만한 각종 학술 대회 발표기회조차 규제하였던 것이다.

또한 오랜 외국의 침탈과 수난의 우리나라 역사 속 특히 일제치하 조선 총독부의 고대한국 역사자료의 강제 압수 및 폐기 처리로 인한
고대문헌의 빈약과 함께, 기존 식민사학자들의 기득권 보전을 위해서 자랑스런 역사를 연구하는 민족사학자들을 재야사학자로 폄하하고
그들의 자료를 2차적인 사료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또한 이들의 강단 진출이 막혀있는 상태에서 민족사학의 학맥을 잇는 후계자 양성이 불가능하였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런 한국 사학계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잃어버린 자랑스런 역사의 복원이 요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부 강단 사학자들의 방관적인 태도는 마치 중국정부가 고구려 고분 및 산성을 방치하고 있듯이 비애국적인 처사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우리역사 학계를 이끌어온 연유로 이제는 국가와 언론이 이들의 실상과 단면을 파헤칠 차례가 왔다고 생각된다.

이제 21C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 정부는 자랑스런 고대 한중 및 한일 역사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를 온 국민들이 인식하고 배울 수 있도록 정책적 시도를 통해 국민의 통합을 위한 긴급 과제의 하나로 강력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 인적 자원부를 비롯한 외교 통상부, 문화 관광부 등 유관 정부 부서와 국사편찬 위원회, 정신문화 연구원, 한일역사 공동위원회 등 국책수행기관들에 의한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이 절실하다고 보며,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KBS등 언론 매체들의 협조적인 보도가 절실하며 이를 보강하기 위해 과거 역사스페셜과 같은 대대적인 역사 프로그램제작 및 특집기획물 작성 등의 제반노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 외 역사문화 탐방기행물, 어린이 역사교육을 위한 고대역사 만화 Animation 보급 지원 및 삼국지와 같이 널리 읽히는 고대한국 역사소설의 대중화 작업 등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현재 진행중인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에서도 해당 사학자들이 국내 민족사학자들의 한일 고대사 재해석을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태도가 요구되며, 더욱이 일본사학자들과 회의할 때 이들의 역사해석을 검증, 토론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막연한 수정요구 보다는 먼저 국내교과서에 잘못 서술된 고대사 부문부터 먼저 전면 개편을 시도함으로써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올바르게 국민에게 인식시켜줄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에 와 있으며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이를 통해 고취하는데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측의 고대문헌의 자료이전과 훼손에 대해 정부측의 강한 항의가 요청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내의 궁내청과, 동경대 등 대학 도서관 및 역사 박물관 등에 보관하고 있는 한국 고대문헌 및 문화재 유물 등에 대한 반환작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회와 같은 역사 동호회, 각종 시민단체로부터 범국민적인 역사바로찾기 시민운동이 전개되어야하며 그 결과로 고대 문헌 자료의 적극적 수집이 행해지고 국사를 새로 편찬하며, 고대사 부문 전문연구 인력 양성을 위한 BK21 지원과 같은 국책 지원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해외사학계에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한 국제 학술대회를 자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며 국내주재 외국 대사관 공보처, 해외주재 한국 대사관등에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만 한다. 이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한 좋은 예를 프랑스 드레퓌스(Dreyfus)대위 진상조사 사건에 가담된 프랑스 시민단체의 노력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즉 과거 프랑스 드골 군부시절 파리주재 독일 무관 집 쓰레기에서 국방핵심 비밀각서가 발견되자 당시 최고 권위를 가진 군부의 명예실추를 막기 위해 군당국은 유태인계 장교인 드레퓌스에게 비밀정보 누설의 혐의를 씌었는데, 클레망소, 에밀졸라 등 당시 여러 사회적 저명인사가 포함된 시민단체가 진실 밝히기 위한 대정부 작업을 벌인 결과, 프랑스인 장교의 범죄 사실을 밝혀내어 군부정권을 몰아내고
시민정부를 새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21C 새로운 역사적 패러다임(paradigm)을 맞이하여 일제가 심어놓은 낡고 조작된 역사를 몰아내고 식민사학을 여전히 고수하려는 일부 사학계 인사 및 학술 단체 기관장의 대폭적 교체, 민족 사학자들의 강단 사학계진입과 후계자 양성 등 일단의 조치가 균형적으로 취해질 정도로 이제 언론 및 정부와 더불어 시민운동을 강력히 실천해야 할 시점에 놓여있다. <끝>

 

(참고 :  학술회의 일정)

일시 : 2003년 9월 30일 (火)
장소 : 600주년 기념관 6층 첨단 강의실(성균관대)            

진행 : 홍순주

오전                                                        

9시 20분 : 개회사                                                    
                                                              
9시 30분 : 본 학술 대회 기조 취지 발표 홍순주 (잃어버린 한국 고대사 연구회 회장)

10시 10분 : 중국 대륙에 있어서의 백제의 활동 최 진 (전 주중공사, 저서 : 다시 쓰는 한일 고대사)

10시 50분 : 휴식 (10분간)

11시 00분 : 광개토왕 비문의 백잔국과 잔국  김성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저서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

11시 40분 :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한일관계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 : 일본 고대사의 진실)

12시 20분 : 중식 및 휴식

오 후

1시 20분 : 왜의 실체에 관한 고찰   김산호 (현 태천단 총재, 저서 : 대조선제국사)

2시 00분 : 고대 한일 관계 -백제왜   홍원탁 (서울대 교수, 저서 : 백제와 야마토 일본의 기원)

2시 40분 : 일본어의 뿌리로 살펴본 고대 한일 관계   이남교 (국제 교육 진흥원, 저서 :재미있는 일본말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