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도덕경

<노자를 웃긴 남자>를보고 구름이 도올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하여 도올 비판 내용을 빼고 구름의 해설 만을 발췌하여 보았다.도올의 해석을 비판 하는 글과 구름의 해설이 같이 섞여 있어 구름의 해설 부분만 발췌하다 보니 앞뒤 문맥이 어색한곳이 곳곳에 보이고 좀 싱거워 진감은 든다.그러나 전체적으로 도덕경의 참뜻을 이해 하는데 별로 부족함은 없는 듯하다.구름이 후일 자신의 도덕경 해설서를 집필할 것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꼭 실행되어 도덕경의 참뜻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되기를 기대한다.동양철학이 이렇게 엉터리로 왜곡되어 있는줄 몰랐다.꼭 우리 역사왜곡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도올도 이야기 하더만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따로 떨어져서 기능할수 없는거라고.역사에 이어서 철학도 이렇게 개판이니 그동안 우리민족이 영위해온 문학 또한 제대로 일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짜가 온통 이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아 머리속이 혼란스럽다.도대체 어찌하다 이꼴이 됐는가? 구름의 <노자를 웃긴 남자>가 발간된지도 꽤됐는데 학계의 인사가 구름의 해석을 지지한 사람은 없는 듯하여 자못 섭섭하다.무릇 양심있는 학자는 기존의 해석이 잘못된걸 알았다면 옳은건 옳다해야 마땅한데 작의적으로 외면하는 듯 보여 서운함을 금할수 없다.도올처럼 9단과 9급으로 치부하겠다는건가? 학문하는 사람들의 용기와 양심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운영자>



우리 할아방의 썰이 어떤 사람들한테는 별로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마

는 진짜 탄복할 만큼 재미난 내용들이 많다. 그리고 구름의 이번 연재를

찬찬히 읽어보면 한문으로 쓰여진 고전의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감이 잡힐거다. 한문고전 번역의 방법론을 배울 수 있을거라는 얘

기다. 이런건 절대 교수들한테서도 못 배우는거다. 구름이니까 해줄 수

있는거다.

우리 할아방 야그도 들어보고 한문 고전의 해석법에

대해서도 봐두는 기회로 삼으면 다 도움이 된다. 배우는게 남는거다.

노자 할아방의 불후의 명저인 <도덕경>의 원문을 살펴 보자.

제1장

도덕경 제1장의 첫 문장은 이런 소리로 시작한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글자지만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

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할아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생각 함 해봐바.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다. '가(可)'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道可道)'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라

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非常道)'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할아방이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道)'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알아먹고 2천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거다. 이름을 '깨달음'이라 해도 좋고, '섭리'라 해도 좋고, '법칙'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

오한 뜻이 있지 않은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할

아방의 무시기에 대해 붙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불교가 동양 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 때문이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이라고 음역을 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말에는 아

무런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되버린다. 할아방이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

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

도 무방하다.'라고.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란 다음 구절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

道)'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

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

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던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인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서 정말로 그런가 확인하자.


無名天地之時,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유명만물지모)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할아방이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

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

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 (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할아방은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

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던 안붙이던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

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우주'

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

입되는 것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이다. 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할아방

은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붙

이고 나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네 글자로 해치워 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라운 바다. 문자 발명 이후에 인류의 기록 중에 여기에 견줄만한 것은 <천

부경>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런 까무러칠만한 철학적 사변과 기록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자라는 문자의 위력이다. 그 어떤 문자도 이런 괴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천지지시(天地之時)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

나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

의하며 전세계(前世界)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

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할아방은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이라던가 '태극'이라던가 물리학적 용어로 '우주

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故常無慾以觀其妙,常有慾以觀其僥 (고상무욕이관기묘,상유욕이관기요)


저 '요'자는 '지름길, 샛길 요'자다. '돌 요'로도 쓰인다. 우

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 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이 구절에 쓰인 '욕(慾)'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 보자. 이름(名)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慾)이란 글자가 튀어 나오냐 말이다. 욕(慾)은 '하고 싶어하

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無慾)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慾)'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名)이다.

그래서 '고상무욕(故常無慾)'은 '꼭(굳이) (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이관기묘(以觀其妙)' 이 말은 '그 (도의) 묘(妙)를 볼 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할아방이 뭐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으

니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된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아진다. 상유욕(常有慾),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僥 )를 볼 것이다.' 두 문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묘)의 요(僥)를 보게 된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妙)와 요(僥)의 의미가 무엇이냐이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

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출이이명)
 

한자는 소리문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나는대로 옮겨적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조사, 접속사, 관계사 등이 부족하고 띄워쓰기, 어순 등의 문법도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옛날로 거슬러갈 수록 그런 것은 더욱 심하다. 할아방이

살았던 시대는 후주 시대로 소위 말하는 춘추시대로 공자와 동시대이다. 영어가

오늘날의 영어일 수 있는 것은 '세익스피어' 때문인 것처럼 한자가 오늘의 한자일

수 있는 데는 공자의 공이 지극히 크다. 공자가 사용한 문장의 구사법을 '춘추필

법'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한자를 가지고 문장을 기록하는 방법

론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의의를 가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공자 이전에

는 한자의 기록법이 중구난방이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아방의 <도덕

경>을 볼 때에 그 해석에 고심하게 되는 것도 한자 기록의 규칙, 즉 문법이 확립

되고 통일되기 전의 기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 이전의 저작물들은

글을 쓴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필법을 가지고 썼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

던 시대의 기록인 <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한자 실력만 믿고 또는 옥편 한권 들고 앉아서 해석해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원문의 내용이 문자로서와 동시에 심안으로서 읽혀져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가지 측면은 인쇄술이 없어서 일일이 필사해서 책을

만들었던 고대에는 책을 아예 외워버리는 암송이 공부하는 방법이었고, 일부의

경전은 쉬운 암송을 위하여 소리나는 대로 읽을 때의 리듬과 가락을 염두에 두고

적은 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경>도 암송시에 리듬과가락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일종의 산문시이다.

<도덕경>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도교는 중이 독경을 하듯이 <도덕경>을 가지고

노래를 부른다. <도덕경>의 독경 을 들어보면 불경 못지않게 구성지고 듣기좋은

가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옛 소설들도 마찬가지로

가락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판소리로 부를 때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고 가락이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음악적 효과를 위해서 문장의 이해에 도움이 될 조사류를 생략하거나

어순을 바꾸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문장을 구속하기도 한다.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워쓰기가 없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

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여덜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글자로 둘로

갈라지지 세글자, 다섯글자, 혹은 여섯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글자가 '◎◎ ◎◎'이면, 뒤의 네글자도 '◎◎ ◎◎'가 되고 앞부분

이 '◎◎◎ ◎'이면 뒤도 '◎◎◎ ◎'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 할아방은 결벽증이 있는지 자기 글 속에 고유한 글버릇으로서 이런 규칙성

을 대단히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가 할아방의 글 의도를 유추하

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此兩者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양자동(此兩者同'이란 앞 부분을 띄워쓰

면 '차양자 동'이 된다. 즉 '이 두가지(차양자)는 같다(동)'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워 읽으면 정확한 할아방의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 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출이이) 이름(명)이다'라는 문장이다.

이것을 '출이 이명'으로 읽으면 '다른 이름(이명)으로 나온 것(출이)이다'라는

의미가 다른 글이 되어 버린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름이다'와 '다른 이름으

로 나온 것이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사뭇 다른 것이다.

후자를 택하게 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할아방이 이야기 해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

이고 안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었다. 무명(無名)이냐 유명(有名)'

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해온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

해온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

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

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정

확한 것이 된다.


'저 두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름이다(있느냐 없느냐)'


보고 있듯이 할아방의 글은 건너 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여들거

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同謂之玄,玄之又玄 (동위지현,현지우현)


'현(玄)'은 '검을 현'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르키는 '흑(黑)' 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글자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

스러운 궁창의 색이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는 뜻이다. 바꾸어 표현하면 '검기는 마찬가지다'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 무엇은

사람이 뭐라고 나발을 불던지간에 검기는 마찬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할아방은

말하고 있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은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라

는 말이다.

앞의 현(玄)은 묘(妙)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又玄)은 요(僥)의 성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지가 검

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는 설명인

것이다. 여기서 할아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道)'라고 이

름을 붙여서 뭔가를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쓰지 말자는 소리다. 그 이름이 도이건 다른 무엇이건 굳이

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던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리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

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名)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道以衆妙之門)'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긍께 그쯤만 알고 다음 썰을 들어보란 말

이여'하고 할아방은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고 있음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도(道)'

라는 이름에 사로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

제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1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덕경 제1장>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時,有名萬物之母,故常無慾以觀其妙,常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무명천지지시,유명만물지모,고상무욕이관기묘,상


有慾以觀其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유욕이관기요,차양자동,출이이명,동위지현,현지우현,중묘지문


도(는 그 이름을 )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2장

 
도덕경 제2장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사악이)


제2장의 첫 줄은 서두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도덕경> 전체를 파악하는데 대단

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 <도덕경>의 열쇠를 푸는 키가 숨어있기 때문이

다. 그 열쇠는 바로 '위(爲)'라는 한 글자이다. 할아방은 <도덕경> 전체를 통털어

이 '위'라는 글자를 오로지 한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학생들을 붙들고 노자 사상이 뭐냐고 물어봐도 '무위(無爲) 사상 아입니껴?'

정도의 대답은 듣는다. '무위'는 노자 사상의 상징어다.

할아방은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2장으

로 넘어오면서 곧바로 이 '위(爲)'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할아방이 <도덕경>을

써나간 순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제2장의 첫 줄은 바로 할아방 사상의 핵심인 '위(爲)'에 대한 설명이다.

우선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부터 보자. '개(皆)'는 '모두 개'니

까 '천하개지(天下皆知)'는 '온 세상이 다 안다'는 뜻이다. 뭣을? '미지(美之)'니

까 '아름답다는 것을'이다. 그러니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는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의 두글자가 있다. 바로 '위미(爲美)'다.

'위(爲)'자는 '만들 위, 꾸밀 위'다. 그러니까 '위미(爲美)'는 '꾸며진 아름다

움'이다. 이제 감이 잡히제? 항께로 저 문장의 올바른 의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다.라고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사악이(斯惡已)'라고 했다. 즉 '그것은 나쁜 일이다'이다.

이 한줄만 가지고는 혹시 부족해서 헷갈릴까봐 할아방이 또 한줄 써놨다.


'천하개지선지위선사불선이(天下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위선)이니 이것은

불선이다'

<도덕경> 전체를 보고 나면 자연히 알겠지만, 할아방은 아름다움(美)과 착함(善)

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醜)함과 악(惡)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할아방은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구별 자체를 싫어한 사람이다. 뒷 장에 가

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라는 말이 나오는데

할아방은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할아방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爲)'다. 악(惡)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

爲善)을 멀리했고, '추(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爲美)'를 미워했다.

자연(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무위자연'이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을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대로 착한 것은 착한대로 악한 것은 악한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상태가 바로 할아방이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선악미추가 모두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해야지 위선, 위악, 위미, 위

추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 모든 일에 '위(爲)'가 끼여

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설명한 내용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도덕경>에서 할아방은 이 '위(爲)'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

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자가 들어간 문장은 대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서 유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할아방은 미(美)와 위미(爲美), 선(善)과 위선(爲善)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서 위(爲)에 대한 용례를 보여줬다. 할아방은 글을 구르미맹쿠로 친절하게 쓰는

사람이다. 혹시나 남이 이해를 못

할까,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펴서 그런 오해가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글 속에 마련해놓는 사람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故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較,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고유무상생,난이상성,장단상교,고하상경,음성상화,전후상수


이 문장들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들이며, 할아방이 왜 위미

(爲美)와 위선(爲善)을 악(惡)과 불선(不善)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이라는거다. 우리 할아방이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정리해보면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

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

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

게 된다. 이것을 미(美)와 선(善)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

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것처럼 꾸며서 속이면

진짜 선한 것이 선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하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거나

선을 가장하는 짓은 나쁜 짓이니라.(惡, 不善)'

이게 바로 할아방이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

音聲), 전후(前後)를 주욱 나열하여 말한 요지이다.

내가 중학교 댕길 때 우리집 다락방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색이 바랜데다가 크기

는 수첩만한데 표지 뒷면을 보니 소화 13년에 인쇄했다고 적힌 책을 하나 발견했

다. 왜넘들이 찍은 <도덕경>이었다. 해석도 없고 풀이도 없이 한자로 적힌 원문만

빽빽한 조잡한 책이었는데 그것을 읽다가 소녀 시절에 구르미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린다. 영혼을 두들기는 북소리가 들렸고 마음의 심연을 흔드는 폭풍이 일었고

무수한 생과 생을 넘어 찾아온 고향을 눈앞에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린다.

한 구절 한구절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명문들이었던가? 그 어떤 명작 소설이 그

토록 아름다우며, 어떤 경전이 그토록 마음을 깨끗히 하여주던가? 노자 할아방의

손을 잡고 무릉도원의 숲속을 거닐며 웃고 까불던 그 날들이 어제처럼 아련하다.

할아방의 순진무구하며 티끌 한점 없는 그 마음의 경계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도덕경>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 그냥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평생을 걸고.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에서 '정열의 꽃'이 연주되어 흘러나오고 있다.

창밖에는 고즈늑히 어둠이 깔리고 가을 밤이 깊어가면 한줄 고전에 눈물을 쏟고

싶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할아방의 다음 말씀이다. 성인이 별끼 아이다. 꾸미지 않고(無爲)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게 성인이다. 노자의 위(爲)는 '꾸밈이 있는 것'이고 무위(無爲)

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無爲)요 추한 것이 있

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無爲)다. 선한 것도 무위(無爲)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無爲)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

다운 것으로 위장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미추장단고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無爲)인 것이다. 위(爲)란 꾸밈이요, 무위(無爲)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

러남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行)에 있다. '무위(無爲)의 행(行)' 이것이 바

로 노자 사상이다. 꾸미고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

인 것이다.


萬物作焉而不辭,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생이불유)


우선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다. 여기서 사(辭) 자는 '말할 사'다.

그랑께로 '불사(不辭)'는 말하지 않는다, 또는 말이 없다'란 뜻이다.

'작(作)'은 '짓다, 만든다'는 뜻이다. 행(行)과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다.

'언(焉)'은 '어찌 언'인데 문미에 쓰일 경우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거고. 그러면

다 끝났다. '성인은 만가지 사물을 만들지라도 말로 떠들지 않는다. 즉 자랑삼지

않는다.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제.

할아방의 저 이바구를 쪼께 바까가 말하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다

해도 말로 자랑치 않고 실천으로서 행한다'가 되는거다.

그 담에 나오는 말이 뭐꼬? '생이불유(生而不有)'네. '날 생' 모리는 사람 있나?

'아니 불' 모리는 사람도 없제?

'있을 유'를 모른다꼬? 장난은 치지 말고. 다 아는 글자다? '이' 자는 첨 보나?

그건 그냥 접속사다. 몰라도 관계엄따. 그대로 글자 따라 읽으면 된다.

'나긴 났는데(生), 있지가 않다(不有)' 이러면 해석 끝난거다. 문장이 쪼매 이

상하나? 그람 쪼께 다듬어보지 뭐. '있지 않은 듯이 났다' 이라면 약간 뜻이 통한

가? 그래도 이상하나? 조금 더 비틀어보까? '없는 듯이 산다'는 어떻노? 이게 정

답이다. 한 번만 더 비틀면 아주 쉬운 말이 되분다. '생이불유(生而不有)'즉슨,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드물지만 이런 류의 사람을 가

끔 만날 수 있다. 함께 있으면서도 말로 떠들거나 다투는 법이 없이 항상 조용하게

자기 일만 성실히 하는 사람이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

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할아방이 말하고 있는거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

습'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이 바로 '살면서 튀지 마라'는 당부다.

잘난 척 튀지 말고 파묻혀서 없는 듯 있게 사는 게 만수무강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爲而不恃,功成而不居 (위이불시,공성이불거)


앞서 말했다시피 '위(爲)'라는 글자는 <도덕경> 전체의 중심어 역할을 하고 있는

글자다. '만들 위, 지을 위'다. 그런데 할아방은 이 책 속에서 위(爲)라는 글자를

좋은 의미로 사용한 적이 없다. 언제나 '(허위로)꾸며낸다, (거짓으로)지어낸다,

또는 가식한다' 따위의 의미로서 그렇지 말아야할 불선(不善)과 악(惡)의 원인 내

지는 근원으로 보고 있다. 해서 노자는 무위(無爲)를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

는 것이제.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글자를 고르라고 하면 바로 이 위(爲) 자

가 정답인 것이고, <도덕경>을 볼 때 이 글자가 사용되어 있으면 한번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 된다 말이다.

위의 문장에 이 위(爲)가 첫머리에 나오면 이기 뭔 말이겠노? '위이불시

(爲而不恃)'는 바로 '꾸며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주어

는 '성인'이다. '성인은 자기 일을 할 때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살아가기를 마치

없는 듯이 하며,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다. 즉 성인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아니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결코

꾸미거나 지어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저 문장에서 거(居) 자를 '쌓을 거'로 읽어야 한다. 즉 '공을 이루어도 그것을 쌓

아두지 않는다'이다. 왜 '살 거'가 아니고 '쌓을 거'라야 하는지 다음 문장을 보면

서 설명하자.


夫唯弗居,是以不去 (부유불거,시이불거)


부유는 대저(夫)'와 '오로지(唯)' 라는 말이다.

앞의 문장까지는 주어가 '성인'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바로 '공(功)'

이다. '공을 쌓아두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떠나지 아니한다(없어지지 않는다

또는 흩어지지 않는다.'라는 글이다.


제2장의 원문 전체를 번역을 해보자.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故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

천하개지미지위미,사악이,개지선지위선,사불선이,고유무상생,난이상성,장단



相較,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萬物作焉

상교,고하상경,음성상화,전후상수,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만물작언



而不辭,生而不有,爲而不恃,功成而不居,夫唯弗居,是以不去

이불사,생이불유,위이불시,공성이불거,부유불거,시이불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니

이것(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다운 것처럼 꾸며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악한 짓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또는 사람)이

사실은 선함을 가장한 것이니

이것(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척하는 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다.

(만약에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지어내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거나

어려운데 쉬운 것처럼 가장하거나

짧은데도 긴 것처럼 속이거나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과장하거나

소리를 음악이라고 우기고 앞과 뒤가 헷갈리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로 아름답고 추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한 것과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과

어렵고 쉬운 것과 높고 낮음과

음악과 소리의 구별을 하지 못하며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며대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실천함으로서 가르치고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다.

살면서도 (드러내지 않기를) 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쌓아 두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쌓지 않음으로서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제3장 


이제 <도덕경> 제3장이다. 첫 구절부터 보자.


不尙賢,使民不爭  (불상현,사민부쟁)


'상(尙)'은 '높일 상, 숭상할 상, 우르럴 상'이다. 그러니까 '상현(尙賢)'이란

말은 '현명함을 높이 산다'는 의미다. 이때는 현명함이나, 유식함, 똑똑함 등을 총

칭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고, 현명한 사람, 유식한 사람의 뜻으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현명함(또는 현명한 사람, 현자)을 높이 받들지 않으면 사

람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가 된다. 똑똑하고 유식하고 현명한 것을 높이 사는 사회

는 경쟁 사회다. 똑똑하고 아는 것을 서로 재고 경쟁해서 보다 잘난 넘이 위로 가

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경쟁과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물론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은 이러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아프리카

나 인도네시아의 오지에나 가야 똑똑한게 별볼일 없는 동네를 찾을 수 있다.


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사민불위도)


불귀난득지화(不貴難得之貨)는 '귀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보화이니'

라고 옮겨야 정답이다. '불귀(不貴)'는 '귀하지 않은 것'이다. 글고 '난득지화

(難得之貨)'는 말 그대로 '얻기 어려운 보물이다' 이 소리다.

왜 할아방이 귀하지 않은 하찮은 것이야말로 가장 얻기 힘든 귀한 보물이라고 말

하는지 함 생각해보자. 도둑맞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민불위도(使民不爲

盜) 즉,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할 생각이 없게 만든다'이다. 처음부터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도심을 안 일으키는 것이고 그

렇기 때문에 하찮은 것이야 말로 '가장 '얻기 어려운 보물이니라' 이 소리다.

우리가 귀하다고 여기는 보물들은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고

사람들을 다투게 하므로 그런 것들은 보물이 아니니라. 이 말이다.


不見可慾,使民心不亂  (불견가욕,사민심불란)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 길

이다.'


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

시이성인지치,허기심,실기복,약기지,강기골


'시이성인지치(是以聖人之治)'는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의 뜻이다.

이거야 별 어려블끼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허기심(虛其心),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강기골(强其骨)' 이기 무신 소리고? 찬찬히 읽어보자. '허기심(虛

其心)'잉께로 이거는 '마음을 비우고'라는 소리네. 그 담에 '실기복(實其腹)'은 '

배를 채우라' 소린갑네. 그라마 '약기지(弱其志)'는 뭐꼬? '뜻을 약하게 해라'는

말쌈이고, '강기골(强其骨)'은 '뼈를 튼튼하게 해라' 이 소리네. 에이, 뭐 별로 어

려븐 소리도 아이네. 괜히 쫄았다.

주욱 붙여갖꼬 함 읽어보까?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백성들의 마음을 비

우고 배를 채워주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소리네.

쪼께 해설을 붙이면,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는 마음과 뜻 즉 심지(心志)

를 비우고 약하게 만들고(虛弱), 반면에 그 배와 뼈는 채우고 강하게(實强)하는 것

이어야 한다'는 말로써 노자 정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쓸데없는 야심이나 큰 뜻을 세우는 주제넘은 생각을 못하

게 하면서 그 대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라는 소리다. 복실골강(服實骨强)이란

쉽게 말하면 '배부르고 등 따시다'는 말이다. 노자는 정치 사상적으로는 우민정책

(愚民政策)의 주창자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의 우민은 애민을 위한 우민인 것이

마키아벨리즘적 우민정책과 차이점이제. 즉 다스리는 자를 위한 우민이 아니라 다

스림을 받는 백성을 위한 우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부르고 등 따신 백성이 제일

행복한 백성이라고 노자는 보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야 말로 성인의 정

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백성을 힘센 소나 배부른 돼지가 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할아방의 정치 노선이다. 구르미도 이런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바이다. 단 이러기

위해서는 간단한 몇마디 말로 되는기 아이다.

지금부터 할아방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常使民無知無慾,使夫智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사부지자불감위야


'사부지자,불감위야(使夫智者,不敢爲也)' 이 한마디야말로 노자의 정치 사상이

단순한 우민 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앞 구절에서 할아방이 머시라 카노? '언제나 백성들을 잘 모르게 하고 욕심이 없

게 만들어라'했다. 이 말은 이것만 가지고 보면 대단히 반인류적이고 비인도적인

반동 사상가로 오해를 받을 만 하다. 그래서 할아방이 2천년 동안 유자(儒者)들로

부터 왕따를 당한거다.그것은 왕삐라는 애송이부터 후대 학자들이 그 말 다음에 할아방이

뭐라 했는 지를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상사민무지무욕(常使民無知無

慾)'이라는 말은 쉽게 풀이하면 백성들을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낼 줄 모르는

촌무지렁이로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다. 그저 '송충이는 솔잎먹고 살아야 하는겨'함

시로 자기 주제파악을 확실히 하고 땅이나 파면 된다는 그런 말로 들리는 것이 사

실이다. 백성들을 그렇게 만든다 쳤을 때 아는 것도 없고 욕심낼 줄도 모르는 어린

백성들은 그야말로 통치자들의 노예가 될게 뻔하다.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들이야

사실 지배 세력에게는 이상적인 백성일테고 심하게 말하면 그들이 소유한 가축의

무리와 마찬가지 아이겠나? 소수의 많이 알고, 욕심만만한 무리들(지배계층)과 아

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없는 어린 백성들로 이루어진 나라를 과연 할아방은 이상

국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배계급과 일반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몽땅 다 무지하고 무욕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일까? 만약에 전자라면 노자는 우민화를 부르짖은 반동이요, 후자라면 노자는 사상

가가 아니라 몽상가이다. 그러나 문맥상 후자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

냐하면 사(使)란 글자는 만든다, 하게 시킨다라는 뜻의 글자이므로 '백성들을 무지

하고 무욕하게 만들어라'고 할아방이 사주를 하고 어떤 상대가 있다. 바로 지배 계

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배 계층이 바로 '많이 아는 무리'들이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지자(智者)'가 바로 그들이다. 즉 식자(識者), 지식층(知識層)을

말한다. 이 지자(智者)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따라서 뒤의 구절은

이 지식층에 대한 당부이고 그들이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들어 통치하는 반대 급

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성이 무지무욕하여야 한다면 반면에 너희 지식

층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뭐냐? 바로 '지자불감위야(智者不敢爲也

)'다. 백성들과는 다르게 많이 아는 지자(智者)들은 절대로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

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백성들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지한 백성을 속이는 지자(智者)가 없어야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불감위

야(不敢爲也)'는 '감히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자

는 <도덕경> 전체를 통털어 위(爲)라는 글자를 '속이는 일, 꾸며대는 일, 가장하는

일, 가식하여 하는 일'이란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때문에 여기서의 위(爲)도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을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한 나라의 지도층이 백성을 속

이고 꾸며대지 않는다면(不爲), 일반 백성들은 설사 무지하다 해도 안심하고 살아

갈 수 있음을 갈파하고 있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다.

생각해 보자. 지도층이 없이 국민 전체가 무식한 국가가 존립할 수 있겠나?

글고 지식층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하끼고? 노자는 앞에서 그런 지도층

이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자(智者)가 감히 뭘 한다

고 까불지 못하게 하면 어쩌자는 것이야? 지자(智者)들이야 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많은 일들을 맡아서 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까불어야 나라꼴이

똑바로 될 터인데 못 까불게 하자? 그게 노자의 사상인가? 그런 게 노자의 사상이

라면 미련 없이 갖다 버려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 사상이 비판받을 소지는 남아 있다. 즉

현실 정치를 도외시한 이상가의 꿈같은 소리다라는 공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

이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지도층이 과연 국민들에게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숨기거나 꾸며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하는 것

이다. 우리 할아방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비판에 대한 대답까지도 제시하고 있

다는 데에 있다. 노자의 통찰력은 바로 다음의 한 줄에 집약되어 있다.

처음 출발을 잘못하면 끝까지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경>이란 책이다.

아니면 앞 줄 얘기가 틀리고 뒷줄 얘기가 따로 노는 비논리적이고 몽환적인 이상

한 책이 되분다. 어쨌거나 이 다음에 할아방이 해논 소리를 보면 진짜 기가 막힌다.

그런 걸 읽어낼 수 있어야 할아방을 만날 수가 있다.


爲無爲,則無不治  (위무위,즉무불치)


노자에 대해서 감탄을 하고 반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도덕경>

은 여러번의 탄복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도덕경>의 뜻을 제

대로 알고 읽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구름의 글을 읽어온 사람이면 '위무위(爲無爲)의 뜻을 알기 어렵지 않

으끼야. 이기 어려블끼 뭐 있노 말이다. '무위(無爲)'가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위무위'는 뭐겠노? 바로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다.

즉 정치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무위(無爲)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무위(無爲)

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라는 말이다. 즉 백성을 어쩔 수 없이 속여야 할 경우에도

백성들이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속이라는 정치술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거다.

그게 바로 '위무위(爲無爲)'다.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無爲)의 치(治)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아방은 그래서 무위(無爲)를 위(爲)하라고 하는 것이

다. 여기에 노자의 위대함이 있다.

무위(無爲)가 어렵다 해서 유위(有爲)를 택하지 말고 무위(無爲)를 위(爲)함으로

서 현실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慾)하고 지자(智者)들

이 무위(無爲)로 다스린다면 노자가 그리는 이상향이겠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백성은 무지무욕(無知無慾)하고 지자(智者)들은 무위(無爲)한 척이라도 해야 되겠

다는 할아방의 희망사항이다. 백성들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어서 단순 소박하다 해

도 그것을 기화로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이나 하면 백성의 단순 소

박함이 유지될 수가 없고, 반드시 소요와 혼란이 일어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하

지만 지도층이 최소한 백성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숨길 수 있는 염치와 지혜로

움만 있어도 나라는 잘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할아방은 말하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 유위(有爲)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졌을 때이다. 백

성들이 모르게 하는 정도의 위(爲)는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고 노자는 생각한 듯

하다. 그래서 '위무위(爲無爲)하면 즉무불치(則無不治)'라 즉 피치 못할 일이라도

백성들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지금 한빛 사건이니 선거 자금이니 온 세상이 시끄러븐 것도 다 정치하는 넘들

이 '위무위'를 할줄 몰라서 그렇다. 현실 정치라 카능기 돈없이 될 수 있나? 정치

자금이라는거 필요하지. 그런걸 해먹더라도 정도껏 하고 받을 돈을 받고 받더라도

국민들이 모르게 좀 요령껏 재주껏 해야지 일마들 하는 짓을 보면 걍 내놓고 도둑

질 하능기야. 그리고 서로 캥기는 넘들끼리 동네방네 나발을 불면서 물고 뜯고 싸

우능기야. 그랑께 우찌 백성들이 그 추잡한 짓거리를 모를 수가 있겠노? 암만 무지

하고 무욕한 백성들이라도 그런 꼬라지를 자꾸 보게 되면 무지무욕이 유지될 수가

없능기야. 그래서 할아방이 제발 백성들이 모르게 '위무위'하라고 당부를 하는거

다. 그래야 백성들이 속는 줄을 모릉께로 지도자들을 믿고 맘 편하게 산다 말이다.

물론 이게 백성들의 눈과 입을 강제로 막고 속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인의 치는

불위함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위무위'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염치껏 요령껏 하라는 소리다. 알겄제?



제3장의 원문을 전체적으로 보자.


不常賢,使民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不見可慾,使民心不亂,是以聖人之治,

불상현,사민부쟁,불귀난득지화,사민불위도,불견가욕,사민심불란,시이성인지치,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常使民無知無慾,使夫智者不敢爲也,爲無爲,則無不治

허기심,실기복,약기지,강기골,상사민무지무욕,사부지자불감위야,위무위,즉무불치


현명함을 높이 사지 않으면

백성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귀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얻기 힘든 보물이니

사람들이 훔치고 싶은 생각을 갖지 않게 한다.

욕심이 날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들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몸을 튼튼히 해주어

모름지기 아는 것과

욕심이 없게 한다.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을 속이지 못하게 한다.

피치 못할 일이라도 백성들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제4장


제4장의 첫 구절이다.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충,이용지혹불영)


원문을 같이 함 보까? '충(沖)'은 '빌 충, 또는 깊을 충'이다. 그래서 '도충(道

沖)'이라 하면 '도는 비었다. 또는 도는 깊다. 혹은 도는 그윽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중 어떤 의미로 쓰인 충(沖)이냐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

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가서 '깊을 연(淵)'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충(沖)은 비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문장의 올바른 뜻은 '도는 텅 빈 것과 같아서 막상 쓸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잡힐지 모른다'는 것이다. 불영(不盈)은 '채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용지(而用之)' 즉 쓰고자 하면, '혹불영(或不盈)' 아마도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손에 잡히는 게 없을걸)'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도라는 것을 무슨 천도복

숭아처럼 따먹거나 주인없는 소처럼 타고 다니거나 우물물처럼 두레박으로 퍼올

려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 이거다. 도는 텅 비어서 소용이 없는 물건

이다라는 소리다. 쓸려고 하면 써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노자 할아방이

용용 죽겠지 하고 돌아앉아 웃는다.

다음 구절은 이런 소리다.


淵兮,似萬物之宗  (연혜,사만물지종)


혜(兮)는 의미없는 어조사니까 신경쓸 거 없고, 연(淵)은 '도는 깊다'라는 소리

다. 텅 비어서 쓸려고 하면 써먹을 데가 없는 도이지만 그러나 그 텅 빈 것이 깊기는 아주 깊어서

만물지종(萬物之宗)이다 하는 소리다. 만물지종(萬物之宗)이 뭔가? 쉽게 말하면 만

물의 씨앗이고 만물의 부모다. 즉,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고자 해도 소용이 없는

물건이지만 그 속이 깊고도 깊어서 세상 만물이 다 그것에서 나온다'이다. 이 대

목에서 훗날의 음양가들의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나왔다. 무극에서 태극

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 음양에서 오행이 비롯되고, 어쩌고 저쩌고...

무극이라는 것은 음양오행과 세상 만물의 시작이지만 무극 자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파악할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텅 빈 무엇이다.

무극은 할아방이 앞에서 말했던 '천지지시'다. 이 천지지시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뭐가 된다? 바로 만물지모가 된다.이게 무엇이다? 바로 태극이다. 태극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고 음양이 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이다.

할아방은 '도는 쓸모 없는 물건이다. 소용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을

낳기는 해도 만물한테 소용되는 구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에다가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해봐야 응답도 없고 가피공덕 도 바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야훼 같은 창조주, 조물주들은 다르다.

이런 물건들은 소용이 있다. 아플 때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로도 쓰이고

사업이 안될 때 는 고문역도 되고 컨설턴트로도 쓰이고, 심지어 어느 종목이 오를

것인지도 가르쳐 주는 주식투자 자문역도 한다. 가끔씩은 미운넘 망하게 만들고

급살맞게 해주는 청부폭력 해결사 역할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

고 전쟁도 하지만 그런 건 모른 척 하자. 아무튼 노자는 도는 그런데 소용이 없으

니 도를 어디에 써먹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아라는 것이다.


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  (좌기예,해기분,화기광,동기진)


좌기예(挫其銳)의 세 글자에서 가운데 '좌(挫)'는 '꺾을 좌'다. '其'는 '그

기'이고, '예(銳)'는 '날카로울 예'이다. 가운데 '其'가 가리키는 '그것'이 뭔가

하마 바로 '도(道)'다. 그래서 이 말은 '도의 날카로움을 꺾고'란 뜻이다. 달리

말하면 도라는 물건의 형상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물건에서 날카롭게 삐쳐 나온

것들, 즉 튀어나온 가지들을 꺾어버린다는 말이다. 삐죽삐죽 나온 것을 모조리 꺾

으면 둥글던 육방체이건 그 속의 틀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도라는 물건의 뾰

족하게 나온 부분을 모두 쳐내면 바탕 틀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 모습을 묘사해

놓은 말이 바로 화기광(和其光)이다. 여러 개의 빛이 어우러진 상태이니 영롱하나

형체가 없는 모습이다.

해기분(解其紛)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해(解)는 풀어 헤쳐서 가른다는 글자다.

분(紛)은 어지럽고 난잡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어서 헤치면 도가 어떻게 되느냐? 바로 '동기진(同其塵)' 즉, 티끌과 같아진다

는 것이다.

알기 쉽게 문장의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진다. '좌기예즉화기광(挫其銳

則化其光)이요, 해기분즉동기진(解其粉則同其塵)이니'라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다시 조선말로 풀면, '도라는 물건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잘라내서 그 바탕의

모습을 볼짝시면 빛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요, 도의 복잡하고 난잡한 것을 풀어헤쳐

서 그 속을 디다보면 낱낱의 티끌과 같다'이다. 고로 천하 만물이 도에서 나온 것

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아무리 그것을 잘라보고 가루로 빻아보고 실

타래 풀 듯이 헤쳐봐도 빛이 어울리는 화광이나 먼지보다 작은 티끌 같은 것이어

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괜히 도가 어떤 건지 확인해 보겠다

고 파보고, 뒤집어보고, 헤쳐보고, 세워 보고, 눕혀 보고, 튀겨 보고, 찔러 보고,

잘라 보고, 녹여 보고 기타 등등 헛지랄 하지 말라는 충고다. 노자 할아방 얘긴즉

슨 '그럴 시간 있으면 낮잠이나 디비져 자라'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빛이 어우러지는 것과 같고 티끌과 같아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할아방은 뭘 다듬고 풀어

주고 하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도를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혹시라도 절하

고 기도하고 자빠지는 중생들이 있을까봐 '도는 쓸려고 하면 텅 빈 것이고 차있지

않아서 써먹을 수 없다. 그 생긴 모양을 볼것 같으면 그냥 어우러진 빛이고 티끌

과 같아서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니라'하고 거듭 말하고 있는거다.


湛兮,似或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담혜,사혹존,오부지수지자,상제지선)


상제(象帝)가 코끼리 신이지 뭐겠노? 안글나? 중국에는 코

끼리나 기린의 서식지가 없다. 그러나 상고 시대의 유적에서부터 상아가 발견되는

것과 공자가 기린을 언급한 것을 보면 고대 지나인들이 코끼리나 기린이라는 동물

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불교가 인도에서 들어오면서

알려졌을텐데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고 먼 이국에서 가져온 이빨이나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던 동물이기 때메 약간의 신비감을 가졌는지 지나인들은 코끼리, 기린

, 낙타 등을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나인들이 제(帝)라고 하

는 것은 의인화된 신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로마 제국과 흡사하

다. 네로나 카이싸르 같은 황제도 신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있는 것처럼 삼황오제는

전부 지상에서 살았던 인물들이다. 물론 노자 할아방도 관운장과 같이 신의 반열에

당당하게 올라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나인들에게는 벼라별 것들이 다 신이

된다. 색깔이나 방위도 어엿한 신이다. 노랑 신은 황제(黃帝)라 하고 중앙의 신이

며 깜장 신은 흑제(黑帝)로 북쪽의 신이고 퍼렁 귀신은 청제(靑帝)이면서 동쪽의

신이라고 하는 식이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나,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의미로 부르

는 하나님과 지나인들이 말하는 제(帝) 혹은 신(神)은 전혀 다르다. 무당들이 섬기

는 관운장신이나 동자신 또는 할아방신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니 동물들도 신이

안될 수 없다. 생명 있는 것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영화(靈化)된 것들을 총칭해서

신이라 한다. 그런 세계의 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하나 뿐인 유일신이란 뜻의 하나

님을 갖다 붙이는 것은 난센스다. 또, 이 온갖 잡다한 지나의 신들은 끗발에 따라

서 위계 질서가 있다. 신들의 세계는 군대식 계급사회다. 그래서 최고 댓빵을 상

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고 저 아래 서낭당 고목나무신까지 셀 수도 없는 신들이 나

라비를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그런 신들이 종종 겸직을 한다는 사실이다. 예

를 들어 '황제(黃帝)'라고 하면 복희, 신농과 더불어 중국의 시조인 삼황 중의 한

사람이고 도교의 교조로 숭상받기도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방위 중 한

가운데를 상징하는 중앙 신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5원색 중 노란 색의 신을 뜻하기

도 하고 오행(五行) 중 토(土)로서 흙의 신을 말하기도 하고 동물로서는 용신(龍

神)이 되기도 한다. 이 전부는 같은 신이기도 하고 각각 다른 여러 개의 신이기도

하다. 지나인들이 생각하는 신들의 계급으로 볼 때 아마 황제는 옥황상제의 아래쯤

될 것이다. 오행 중의 으뜸인 황(黃)의 레벨이다. 옥황상제는 오행(五行)을 낳은

음양(陰陽) 즉 태극의 레벨이다. 태극 위에는 뭐가 있냐? 바로 무극(無極)이 있다.

태허(太虛) 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있다. 그렇다면 동물나라의 계급은 어떻

게 되느냐? 일단 지나인 하면 용이 생각나는데 용의 계급이 황제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황상제와 같은 레벨의 동물이 무엇이냐? 아마 할아방은 그것을 코끼리

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노자, 공자가 코끼리를 직접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도를 다녀온 중들을 통해서 말로 들었을 것이고 그것의 이빨이라고 하

는 상아는 보았을 것이다. 이빨 하나가 이 정도로 큰놈이면 덩치가 용보다 더 크겠

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코끼리를 용이나 봉황의 앞에 세워 제일 계급이

높은 신의 상징으로 삼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상제(象帝)란 끗

발이 제일 높은 신이다.

그런데 왜 할아방이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같은 단어를 사용치 않고 '상제(象

帝)'라고 썼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안된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하나 하나의 글자의 뜻만을 볼

끼 아이고 할아방의 필법과 글버릇까지 살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

런 대목 때문이다. 할아방이 <도덕경> 5천 글자를 쓰면서 다른 사람이 한번이라도

사용한 적이 있는 '고유 명사'는 절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 쯤은 눈치챌 수 있어야

고전을 번역한다고 덤빌 자격이 있다. 내가 할아방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을 한 것

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철학사상적 개념을 그 이전에 사용된 적이 있는 고유

명사를 단 한개도 글 속에 넣지 않고서 문장을 완성해 냈다는 점이다. <도덕경>에

사용된 모든 고유 명사는 할아방이 직접 만든 오리지널 창조어들 뿐이다. 모든 이

름은 그 지적소유권이 오로지 할아방한테 있는 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한자어들 중에 할아방이 그 원작자인 말들은 무척 많다. <도덕경>

이 그 말들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남이 만들어 붙인 이름을 할아방은 자기

글 속에서 단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구름이가 옛날에 할아방한테 그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는데 할아방은 씩 웃을 뿐 대답을 안해줬다. 이것은 할아방의 엄청난 자

존심 탓일수도 있지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도'라는 것은 할아방

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설명하는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설명에 필요한 모든

단어들까지도 할아방이 만들 수 밖에 없고 다른 어떤 글에 쓰여진 것들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고집의 산물이라고. 즉 그때까지 사용되던 상제니 천제니 하는 것들도

할아방이 말하는 상제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할아방은 지가 '상

제'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쓴 것이다. 뒤에 나오는 '현빈'과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

지다.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나오는 열반이나 도솔천같은 지명, 여러 신장들의 이름과

마찬가지다. 전부 석가모니가 지어낸 오리지널 창작 이름들이다. 그래서 <도덕경>

을 해석할 때 할아방이 지어논 신의 이름인 <상제>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바꾸어

번역할 수도 없고 번역해서도 안된다. '상제(象帝)'가 뭐냐? 그냥 '상제(象帝)'다.

이 말을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또는 다른 신의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은

할아방에 대한 모욕이다.

할아방의 말 뜻을 풀어보면 도라는 것이 코끼리 신보다도 윗길에 있을 거다. 신

들 중에 제일 끗발 높은 신보다도 먼저 생겼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

자는 도라는 것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하도 맑아서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짐작컨대 최고 높은 신보다도 먼저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도를 신(神)이나 제(帝)보다 앞서 존재하는 무엇으로 보는 것이

다. 무엇을 다듬고 얽힌 것을 풀고 조화를 부리고 사람의 기도를 듣고 소원을 풀어

주고 하는 영적인 존재들, 즉 신이란 것은 도의 다음에 나오는 개념들이고 도는 그

런 존재들보다 선행하는 무엇이다. 이 소리다. 이제 알겄제?

기독교의 여호와는 창조주다. 모든 것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태초의 아버

지다. 이러한 모든 것에 선재(先在)하는 창조주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러한

인격신(영적 권능 또는 파워의 행사자)의 존재 이전에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으면 신학은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 존재의 이름을 할아방은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신이나 제 등은 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도가 만물지모라고 할 때 신의 존재들 조차도 그 만물에 포함이 된

다. 이러한 '도'가 만물에게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있다고 하면 할아방의 도론(道論

은 출발부터 무지막지한 반론과 공박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껏 기독교가 그

러했듯이.(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버틸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

다면 다음에 하기로 하자)

일단 할아방의 결론은 그렇다. '도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도는 설명이 가

능한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해를 할 것인가? 바로 도가 낳은 만물의 법칙에서 그것을 유추해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도'에 기반한 생활 윤리이며 규범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도출한 정

치 사상이 바로 할아방의 '성인 정치'다. 이 성인 정치는 공자의 '왕도 정치'와 확

실히 다른 정치론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철학적 토대 위에 서있는 정

치 사상을 꼽는다면 나는 니이체의 '초인 정치'를 들고 싶다. 물론 양자는 같은 점

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지마는 위대한 두 스승의 응시점은 같다고 나는 본다.

인연이 닿는다면 노자와 니이체의 비교 논문을 한편 쓰고 싶다.

그것은 그렇고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도덕경>이란 책의 성

격에 대해서다. 인류 역사상 <도덕경>만큼 그 성격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혀있었던 책은 없다. 주로 음양 사상가들에 의해 성립된 황노학으로

부터 훗날의 도교에 이르기까지 할아방의 얘기는 '도'에 대한 것으로 오해되어져

왔다. '도'라는 하나의 종교 철학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의 지침서인 것

처럼 곡해되었고 왜곡되어져 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해석들이 <도덕경>의 원문을 그런 방향으로 비틀어서 해석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도'란 할아방의 이야기처럼 모나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

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에 할아방도 '도' 자체에 대해

서는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도덕경>은 무엇에 대해 써놓

은 책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치 사상서'이고 할아방의 주장은 바로 정치론이다.

그리고 곁들여 뛰어난 처세학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형이상

학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극히 현실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정치 논문이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면 사람들이 할아방의 이야기를 '도'나 '도인술' 또는 '신선

술' 같은 신비론으로 왜곡시켜 놓은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진정 <도덕경>의

올바른 원 뜻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름의 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노자 도덕경> 4장을 개괄해 보고 다음으로 넘어 가자.


道沖,而用之或不盈,淵兮,似萬物之宗,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湛兮,似或

도충,이용지혹불영,연혜,이만물지종,좌기예,해기분,화기광,동기진,담혜,사혹


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존,오불지수지자,상제지선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쓸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도의 가지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 하면

빛이 어우러져 춤추는 것과 같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 헤쳐 그 속을 보려하면

다만 낱낱의 티끌과 같이 보일 뿐이고

맑고 맑아서 어찌 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 비롯됨을 알 수 없구나.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도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제5장


제5장의 첫 줄이다.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이백성위추구)



고대에는 루소같은 자연주의자들이 없었다. 자연과

그것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생존의 조건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혹독한 시

대였다 말다. 그래서 자연의 가혹함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만한 지혜로운 자를 성

인으로 꼽았능기라. 요순이 달리 요순이 아이고 치수(治水)를 잘해서 요순 아이가?

홍수, 가뭄, 산불, 지진, 역병 등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고난과 역경의 근본적 원인이었지.

'대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니...' 따위의 자연 예찬은 고대인들

의 의식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인기라. 천지는 그야 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

다. 하늘은 인간들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자주 잔인한 무엇이라고 사람들은 생

각했겠지? 그리 생각되제? 그런데 할아방은 당시 사람들의 그런 자연관에 대해서

'자연이야 말로 자비로운 성인의 도를 행하고 있다'고 오히려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仁)'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仁)'과 전혀 다른 뜻의 글자다.

노자 할아방은 공자의

'인(仁)'에 대해 알레르기성 두드레기가 있다. 공자 자체가 노장 두 할아방한테는

속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공자가 할아방한테 예를 물어서 찾아왔을 때 손님

대접도 안해줬다는거다. 할아방들이 보기에 공자가 말하는 군자지도(君子之道)라

는 것이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밖에 안보였고 그것을 역설하고 다니는 공자는

출세하는데 목을 맨 고급 구직자(求職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노자가 제일 고

약한 의미로 쓰고 있는 두 글자가 하나는 위(爲)요 다른 하나가 인(仁)이다.

인(仁)은 즉 위(爲)다. 그런데 유가가 득세를 하면서 공자의 줏가가 올라가자 할

아방의 심중에는 좀 가소로웠겠나?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이 말은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

다. 하지만 이 말은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

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

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

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 놓은 알을 밟아서 깨트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

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줏어 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

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謂我自然)' 소똥을 맛

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謂我自

然)'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

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天地聖人)과 만물

백성(萬物百姓)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또 그

렇게 되어야 한다는 연사의 강력한 주장이기도 하다.

반면에 공자의 인(仁)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 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 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

지를 딴다. 이게 인(仁)이다. 백성이 잘 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

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노자는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것을 가르쳤

다가 나중에 많이 안다는 이유로 잡아죽이는 짓을 하지 말고 아예 백성들을 무지무

욕(無知無慾)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할아방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들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

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

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 정치 사상의 핵심이다.

지금 '준비된 대통령' 하는 꼬라지 함 봐바. 지가 온 국민의 행복을 책임질 것

처럼 설치더니 우째 되가노? 지가 준비를 잘해서 국민이 행복해지겄나? 지없어도

저절로 국민이 잘살면 그게 장땡이제. '준비된 대통령'이 필요한 것 자체가 불행

아이가?


'천지불인(天地不仁),하니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요'

☞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에 무심하고', '성인불인(聖人不仁)하니, 이백성위추구(以百姓

爲芻狗)니라' ☞ '성인도 이와 같이 불인하니 백성들을 간섭치 않는도다'라고 번역

하면 그런 대로 준수하다. 그리해야 다음 문장들과도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게

된다.  이 문장을 해석할 때 '다룬다'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빵점이다. 풀강아지처럼 다루건 보물처럼 다루건 아무튼 다룬다는 의미는 이 문

장과는 상극이다. '다루지 않는다. 또는 무심하다'는 것이 바로 '위추구(爲芻狗)'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는 결코 만물을 다루지 않는다'는 문장을 '천지는 만

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로 하면 이게 어찌 번역일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天地之間,其猶 乎  (천지지간,기유탁약호)

虛而不屈,動而愈出  (허이불굴,동이유출)


구르미가 병이 좀 들어서 며칠 연재를 못해부렀네. 죄송.

무슨 병이냐고? 심각한 병이제. 가을타는 병이라꼬 있거든.

잔디가 노랗게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감나무 잎이 소솔하게 떨어지는 이때쯤에

꼭 한번씩 앓는 고질병이다. 이런 때는 어디론가 훌쩍 여행이나 가서 이름모를

바닷가의 바위가 파도에 씻기는 모습이나 하루종일 보다가 오면 낫는 병이긴 하다.

아니면 추수가 끝나 휑하니 빈 시골의 논둑길을 한없이 걸어도 좋다.

그건 그렇고 다시 진도 나가자. 오데까지 했더라.

'기유탁약호'하다가 말았다. 이 문장은 다섯글자 중에서 두 글다 표시가 안

된다. 제일 중요한 '탁'하고 '약'이 입력이 안됭께로 그게 짜증이 나서 가을병이

도지붔제. 하이간에 '탁'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절구 탁'이다. 그 있다? 공이

로 콩콩 찍어서 떡 해묵는거. 그기 '탁'이다. '약'은 뭐냐? '피리 약'이다.

에프킬라는 파리약이고 '약'은 '피리 약'이다. 그랑께로 '탁약'은 '절구와 피

리다.

'유(猶)' 자는 '움직일 유', 또는 '원숭이 유' 잔데 '움직일 동(動)'과는 쓰임

새가 다르다. 원숭이 까불듯이 촐삭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猶)'를 절구질하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猶탁)'은 '절구질"로 번역하면 정확한 옮김이다. 다음에 오는 '약호(약乎)'

는 말할 필요도 없이 '피리 부는 것'이제. 즉 '유탁약호'는 '절구질과 피리 부는

일'이다.

할아방의 글버릇을 살펴보면 한가지 특이한 필법이 눈에 뜨이는데 그건 바로

'Aa Bb' 구조의 글을 'AB ab'로 쓰는 버릇이다. 그것을 알아야 뜻이 통하는 부분

이 더러 나온다. 앞서도 그런 구조의 글이 나온 적이 있었다.

허기심(虛其心),실기복(實其腹)약기지(弱其志),강기골(强其骨)'이란 말과 '좌기

예(挫其銳),해기분(解其紛),화기광(和其光),동기진(同其塵)'이 그런 예이다. 이 문

장을 읽기 쉽게 배열을 고치면 '허기심(虛其心) 약기지(弱其志)', '실기복(實其腹)

강기골(强其骨)'이 된다. 뒷 구절도 '좌기예(挫其銳) 화기광(和其光)', '해기분(解

其紛) 동기진(同其塵)'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

를 부르게 하고 뼈를 튼실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을 할아방은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는 어순으로 써놓은 것이다.

'그 뽀족한 부분을 쳐내고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영롱함이요, 그 얽힌 것

을 풀어혀쳐서 속을 보면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이다'라는 문장을 '어순을 바꿔서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얽힌 것을 풀어보면 빛이 어루어지고 먼지와 같다' 해놓는

식이다..

천지지간(天地之間) 기유탁약호(其猶탁약乎),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

愈出)도 마찬가지로 천지지간(天地之間) 허이불굴(虛而不屈), 기유탁약호(其猶탁약

乎) 동이유출(動而愈出)'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비어있지만 찌그러지지 않고, 절구와 피리는 찧거나 불 수

록 튀어 나온다(곡물 찌꺼기와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할아방이 왜 이런 소리

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강대한 공간

은 텅비어있지만 그것으로서 찌그러들지 않는 것이고 절구와 피리의 속은 비어 있

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움직일 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이라도 자연의 '빔'과 인공적인 '빔'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 절구나 피리처럼 움직일 수록 경망되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의 '빈 자리'가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

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구절에 따

라 나온다.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

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 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다. 그러나 천

지 사이의 공간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그 빔은 비어

있다는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바로 짜부러지지 않고 우주를 받치는 '허이불굴

(虛而不屈)'인 것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다언삭궁(多言數窮),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 하면 곡식가루나 음

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새 막히니 가슴 속에 아껴둠만 못하다'

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성인이 백

성들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 두라. 이런 가르침이다.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능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질 말이 많아진다

말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능기야. 요시 사람이 비명에 횡

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뭐고? 교통 사고제.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노?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

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

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들은 말을 안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들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제.

할아방 당시에는 나발 잘못 불면 바로 가는 수가 있었다. 가도 지혼자 가는기 아이

고 불쌍한 지 처자식에 삼대까지 델꼬 갔다 말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성들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

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

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들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

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

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

며 산다는 야그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

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

고 할아방은 보는 것이제.

자연(自然)!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탁약

과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도다. 모름지기 다언삭

궁이니 불여수궁이니라!'


만물은 '빔(虛)'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채움(盈)'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비려고 하지도 않고 차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 이것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이

다. 빈 놈은 빈대로, 찬 놈은 찬대로의 '있는 그대로'가 바로 무위(無爲)다.

하늘과 땅이 그 사이를 비어있게 하려고 애쓰는 걸 본 적 있나? 하늘과 땅은 둘

사이를 텅 비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대화는커녕 현상유지조차도 관심이 없

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비어있을 뿐이다. 여기서 절구나 피리와의 차이점이 있다.

절구나 피리는 스스로 그러해서 속이 빈 것이 아니다. 사람이 속을 파내고 긁어

서 비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지간의 빔은 쓰임이 없다. 그저 찌그러들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쓰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절구와 피리의 빔은 쓰임이 있다.

곡식을 빻고 소리를 낸다. 그 쓰임(用)을 위해서 움직임(猶,動)이 필요하다. 이

것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간의 빔과 용을 위해 만들어낸 빔(극대화시킨 빔)의 차이

점이다. '빔을 극대화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라 절구나 피리를 파서 속이

비게 만드는 짓이다.

5장 정리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聖人不仁,以百姓爲芻狗,天地之間,其猶 乎,虛而不屈,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성인불인,이백성위추구,천지지간,기유탁약호,허이불굴,



動而愈出,多言數窮,不如守中

동이유출,다언삭궁,불여수중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결코 찌그러지는 법이 없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제6장


첫 문장을 함 보자.


谷神不死,是謂玄牝,  (곡신불사,시위현빈,)


앞에서 말했지만 할아방은 노자 <도덕경> 5천 글자를 통털어 다른 사람들이 쓴적

이 있거나 널리 쓰이는 고유명사를 단 한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모든 고유명사는 백프로 할아방의 오리지널 창작어들이다. 할아방 지가 지어낸 단

어들이어서 이런 고유명사가 뭔지를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해석이 구

구하고 중구난방 지멋대로다. 이런 조어(造語)의 능력이 뛰어나기로는 지나인들보

다는 고대 인도인들이다. 불경을 읽어보면 말을 만들어내는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

게 된다. 문장 그 자체로서 인류의 보고라 할만 하다. 특히 이름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부처님한테 놀라는기 작명력이다. 온갖 대상 온갖 사물에 수천 수만가

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데 차말로 환상적이다. 신들의 이름부터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명칭까지 멋지게 이름들을 척척 만들어

붙이는기라. 해탈이니 열반이니, 반야니, 업등이 전부가 다 지어낸 말들이

거든. 깨달음이라는 한가지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이름이 수백가지는 되끼야.

불교는 이런 이름들에 대한 설명이 소상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 뜻을 짐작하

기 어렵지 않고, 또 그 의미를 놓고 이설이 분분할 이유가 별로 없다. 물론 그럼에

도 불구하고 부처님 말씀을 가지고 수많은 해설이 존재해 왔다. 그런데 노자 할아

방의 글은 <도덕경>의 원문만 전할 뿐 할아방이 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강의록이 전

하지 않고 왕필이 해놓은 주해만이 전해졌다. 그런데 왕필의 주해라는 것이 불경

처럼 직접 그 원작자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기록한기 아니고 왕필이 지 멋대로 풀

어놓은 것이어서 별 신빙성이 없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할아방의 창조어들이 이 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문장의 앞에 나오는 '곡신(谷神)'은 이런 고유명사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뒤의 현빈(玄牝)은 할아방의 창조어지만 '곡신'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

게 헷갈려갖꼬 '곡신'이 도대체 뭐냐? 해갖꼬 2천년 동안 벼라별 온갖 해석들이 난

무했다. 가장 골때리는 해석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지금 중국이나 대만의 내노라

하는 동약학자들 중에는 '곡신'을 단전(丹田)이라고 우기는 넘도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기공 수련의 요체라고 뻗대는기다. 웃기는 넘들이제. 앞으로도 도무지 해석

이 안되는 이상한 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죄다 신선술의 비결로 풀어제끼는 웃

기는 짜장면들이 한 둘이 아이다. 여기선 뒷문장을 먼저봐야한다. '시위현빈(是謂玄牝)이다.

'검을 현', '계곡 빈'이다. 그래서 '시위현빈'은 '이것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

다. 그렇다면 당근 앞 문장의 의미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계곡'에 대한 이

야기라야 된다. 이게 문장의 법칙이다. 때문에 이 '곡신불사(谷神不死)'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

를 해서 읽으면 '곡(谷), 신불사(神不死)'이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노자 할아방이 장자 할아방하고 바둑두는 무릉도원이고 무극(無極)이고 태허(太虛)

의 자리이고 구름이 죽은 다음에 갈 곳이다. '그 곳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라는

뜻이고 두 문장을 연결해서 읽으면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하느니라.'다.


玄牝之門,是謂天地根  (현빈지문,시위천지근)


'곡신불사,시위현빈'은 '신이 영생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곳을 가리켜 현빈

이라 하느니라' 하는 말이다. 고대 지나나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히 존재

하여 불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부처, 보살, 신장은 인간

세의 수명에 비하면 영원한 시간상의 존재이지만 그것들도 모두 인연법에 의해 나

타난 존재일 뿐이어서 언제나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며 영원불사하는 존재는

없다고 본다. 생자필멸은 불변의 법칙이며 영적인 존재인 신들도 여기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 시간적 개념이 비록 억겁으로 센다 해도 인간세 60년이나 부처의 억

만겁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찰나지간이긴 마찬가지이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암만 멀어도 무한한 우주 공간적 거리에서 보면 지구상의 개미가 1분 동안

기어가는 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신이 죽지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적으로 유추하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이고 도피안이다. 해탈이란 인연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연법이야 말

로 모든 존재를 현상계에 내보내는 세계의 법칙이다. 인연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과의 영

원하고 완전한 작별이다. 아디오스 발발탄이다. 부처는 이 세계와 저쪽의 경계를

넘어가 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로 부처는 우리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존

재이다. 다시 말하면 구름이 아무리 부처님 전에 엎으려 애처럽게 빌어도 부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그 소리가 들리고 그 간절한 하소에 부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부처와 구름은 인연에 의해 연결되는 상대자가 된다. 부처

역시도 구름과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부처의 해탈은 뻥에 지

나지 않는다. 완죤 구라다. 불교가 만약에 이렇게 엉성하고 유치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면 구름은 옛날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할아방이 말하는 도(道)의

존재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어서 너희들에게는 무용(無用)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래서 죽은 부처한테 절하고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해봤자 기대할끼 없다는 얘기

다. 우리한테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남긴 가르침이

고 그 말씀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등

불로 삼으라 했던 것이다. 부처가 저쪽 세계로 아주 가버려서 아무런 영험도 없고

기도빨도 안듣는다면 우리같은 중생들 입장에서는 이기 믿을 이유가 없다. 말씀

인즉슨 진리라 쳐도 중생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플 때 낫게 해주는거고 돈 잘

벌게 신이 도와주는거고, 얼라 못낳는 여자 아들 하나 뽑아내게 해주는거 아이가?

맞줴? 그런데 무신 영험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는게라. 이기 종교다. 그래서 불

교에서 영험없는 부처 대신에 가오 마담으로 내세우는기 뭐꼬? 바로 보살들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보살들이 피안으로 영영 가버린 부처를 대신해서 중

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풀어준다. 이게 보살 신앙이다. 보살들이란 어떤

존재냐? 부처님처럼 아주 '현빈'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고해에서 신음

하고 인연법에 묶여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가련함과 측은지심 때문에 마지막 한발

자국 앞에서 해탈을 스스로 포기한 분들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구원 해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연법의 세계 속에 자신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보살들이다. 이런

보살들은 실제로 기도에 응답을 하고 영험도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이 세계의 마지

막 한사람까지 제도하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모두 구원을 얻은 다음 지옥

불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본 다음에라야 부처님 뒤를 따라가겠소이다 하고 부처님

께 발원한 사람이다. 이런 보살들은 겁의 세월을 두고 자신의 약속을 키기고자 하

겠지만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부질없이 잊혀질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제행이 무상

커늘 보살님이랴.

하여간에 지금 부처가 가계신 그런 곳을 할아방은 일컬어 '현빈'이라 하는거다.

신이 죽지않고 영원 불사하는 곳. 그런 곳은 인연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이 세계

와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 곳이야 말로 이 세계가 있게 된 근본이다. 이 세계가

그 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다. 그것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피안이며, 도요, 현빈

이다. 바로 할아방의 '현빈지문,시위천지근(玄牝之門,是謂天地根)'이 그말이다.

'현빈'의 들어가는 입구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넘어가

버린 그 문이 바로 '현빈지문'이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에 찬 신

음소리에 뒤돌아보다가 차마 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바로 그 자리가 '현빈지

문'이다. 구름이 안으로 들어가 버릴려고 마음을 독하고 모질게 다잡기를 되풀이하

고 있는 바로 그 문이다. 그 문을 여는데는 정말로 모질고 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두고가는 형제들, 자식들, 모든 사랑했던 사람들, 생명의 유혹과 그 본능까지도

다스려잡지 못하면 넘지 못하는 문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 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가 황금보좌에 앉아있고 그 우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바울이 있으며 천사 미카엘이 그 날개로 이 세계를 덮고 서있는 그 장소가

바로 '현빈'이다.


綿綿若存,用之不勤  (면면약존,용지불근)


'면면(綿綿)'은 할아방이 처음 쓴 이래 지금도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말이다.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과 같이 말이다. '면(綿)'은 '솜 면', '잇닿을 면', '끊

어지지 않을 면'이다. 이 면이 두개가 중첩되면 '이어지고 이어진다' '끊임없이 연

결된다'는 의미다. '약(若)'은 '같을 약'이지만 '혹시' 또는 '만약'의 의미로도 쓰

이고 어조사로 쓰일 때는 앞뒤 연결 관계에 따라서 여러가지 뜻으로 옮길 수 있는

글자이다.

이 문장에서의 '약'은 앞뒤 구절의 문맥상 의미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어조사로

기능 하고 있다. 뒤 구절의 뜻을 먼저 보자. '용지불근(用之不勤)' 불근은 말 그

대로 '부지런하지 않음'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불근'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는 뜻이다. '혹불영'☜'채워져 있지 않

다'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다. 즉 '현빈'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用)에는 게으른 것'이라고 할아방은 다시 한번 말하고 있

다. 때문에 '약'은 '∼이지만' 또는 '∼일 뿐'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보기 좋게 옮기면 '영원토록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느니

라'가 된다. '용지불근'은 곧 '이용지혹불영'이고 '도무용'이다.

부처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한 개인의 해방이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

만 그것은 곧 이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차안과 피안의 강은 너무나 넓

고 깊어서 한번 건너가면 그걸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안의 입장에서 피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땅이다. 그것은 그 곳으로 건너가버린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차안

에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용지지(無用之地)다. 오직 한가지 그 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나무 한그루, 석탄 한조각, 과일 한개 그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없음이다. 그래서 할아방은 '이용지혹불영', '용지불근'이라 말하는 것이다.

일단

제6장의 전체를 같이 보고 하권으로 넘어 가자.


谷神不死,是謂玄牝,玄牝之門,是謂天地根,綿綿若存,用之不勤

곡신불사,시위현빈,현빈지문,시위천지근,면면약존,용지불근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한다.

그 계곡의 문이야 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


제7장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

천장지구,천지소이능장차구자,이기부자생,고능장생



천장지구(天長地久)! 말의 순서를 조금 바꾸면 천지장구(天地長久)다. <도덕경>

에서 유래한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간다'는 유명한 말이다. 흔히 '장구한 세월'이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거니와 '오랠 구(久)'가 들어간 단어로 또 늘 쓰는 것 중에

하나가 '유구(悠久)한 역사(歷史)'같은 것이 있다. 장구(長久)나 유구(悠久)나 시

간적인 길이를 타나내는 말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장(長)이나 유(悠)는 구(

久)를 강조하는 글자다. '장구'는 '길게 오래간다'는 뜻이고 '유구(悠久)'는 '아득

하게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이란 말은 '부모생육지은(父母生育之恩)'이란 말이

지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길러준다는 말이 아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할아방은 Aa Bb를 AB ab로 쓸 때가 많다. 천지장구를 굳이 천장

지구로 표현한 것은 위의 '부생모육지은'처럼 한문만의 독특한 멋 살리기다.

만약에 '하늘과 땅은 영원하도다'라는 말을 '천지장구'라 써버리면 이기 딱 싱거

븐 글이 되분다. 유덕화 나오는 영화에 제목으로 채택될 수가 없다. 근데 '천장지

구'라 쓰농께 읽을 때 감칠맛이 있다.


할아방이 앞에서 천지를 가지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천지지간(天地之

間),허이불굴(虛而不屈)'이라 했다. 이게 바로 천지를 공간적 개념으로 설명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7장에서는 시간적 개념의 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공간적으로 볼 때는 텅비었지만 찌그러지지 않는 것이요, 시간적

으로 볼 때는 오래도록 영원한 것이라고 할아방은 그야 말로 물이 흐르듯이 질서

있게 말하고 있다.

다음 구절을 가보자.

'천지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

'하늘과 땅이 길고도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이 올바른 풀이라고 알고 넘어가면 된다. 당근 다음 구절은 그 이유

에 대한 설명이다.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 '자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풀 수

있는 문장인데 문제는 '자생(自生)'의 뜻이다. 기존 해설에 다음의 다섯가지 정도

가 있다.


①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②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④ 자기 힘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⑤ 자기가 태어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고집하여 산다'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아에 집착한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가 생명체가 아닌 하늘과 땅이기 때문에 생(生)을

'산다' 또는 '태어난다'로 직역하기보다는 '존재한다'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①번은 '자기를 고집하여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가 되겠다.

물론 이 번역도 완전히 틀렸다 말할 수는 없다. 이 구절의 '부자생'에 대한 해석

이 알려진 것만도 수백가지가 된다. 그 중에는 위의 다섯 가지가 전부 포함된다.

<도덕경> 전체를 통털어 '이것이야 말로 올바르고 정확한 유일한 해석'이라고

단정짓기 곤란한 구절은 그리 많지 않다. <도덕경>은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전체적

으로 대단히 메세지가 명확한 책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여기 나오는 '부자생'이란 말 정도이다. '천지가 영원토록 이어지는

이유는 천지가 부자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부자생'의 의미로 넣었을 때 어

색하지 않은 해석이 몇가지 나올 수 있다. 나는 위의 5 가지에서 고른다면 ③을

택하고 싶다.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어가 천지이므로 훨씬 자연스러운 번

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문장 '고능장생(故能長生)'은 '그러므로 천지는 능히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장(長)'도 시간적인 '오래'를 나타내는

말이지 결코 공간적으로 '길다거나 너르다'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하늘과 땅은 스스로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으므로 능히 오랜 세월 존재할 수 있

는 것이다'. 앞서 나왔듯이 비려고도 애쓰지 않고 채우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無爲),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을 노자는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외기신이신존


'그러므로 성인은,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하고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이니라'

대단히 좋은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가르침이다.

할아방이 말하는 '몸을 뒤로하라는 것'은 나서지 마라, 잘난척하지 마라, 아는 체

하지 말라는 것이고 접속사

이(而)는 '이퀄'의 뜻이다. 그래서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선다'가 아니라 '몸

을 뒤로 하는 것으로서 앞세움을 삼는다'라는 뜻이다. '즉 몸을 뒤로하는 것으로

앞세우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 성인이다.'인데 만약에 자기가 남보다 앞서기 위한

방책으로서 몸을 뒤로 뺀다면 이런 '후기신'이야 말로 바로 할아방이 가장 싫어하

는 위선이다. 위후기신이 되는 것이다. 남의 뒤에 서기 위해서 몸을 뒤로 하는 것

이어야지 남의 뒤에 서는 것이 남보다 앞서기 위한 방법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다음에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이 뭔소린고하면 '외기신'은 '몸을 그 곳(其)의

바깥에 둔다'는 소리다. 여기서 할아방이 가르키는 그곳(또는 그것)이 도대체 뭐겠노?

할아방이 말하는 그 곳은 바로 '세상의 바깥','명리의 바깥', '시비의 바깥','이익의

바깥'이다.즉 세상살이에 초연하게 벗어나 있으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네 몸이안전할

것이니'라는 가르침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속세(俗世)를 멀리하고 세상 시비에 끼여들지 말라는 거다. 희

생 정신 발휘하다가 죽은 넘이 한 둘이가? 공자 말씀 지키다가 뒈진 넘이 그 얼마

고, 부처 진리 찾는다고 죽은 넘은 그 얼마며, 예수 말씀 믿다가 죽은 넘은 또 얼

마고? 충성 때문에 죽고, 명예 때문에 죽고, 재물 때문에 죽고, 의리 때문에 죽고,

정 때문에 죽고, 여자 때문에 죽어 나가는 게 세상살이다. 도대체 죽을 이유가 너

무나 많은 위험한 아귀 지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성인의 삶이니, 이리 해

야 하늘과 땅이 장구한 것과 같이 네가 탈없이 오래 살 수 있느니라는 훈계다. 노

자 할아방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를 제일 싫어한다. 희생 정신이야 필요하지.

당연히 권장되어야 할 덕목이다. 노자 할아방은 애국이니, 애족이니, 충성이니,

희생이니, 헌신이니 하는 것들을 우습게 본 사람이다. 그런 것들에는 발고락 때

만큼도 가치를 안 뒀다는 얘기다. 할아방의 이러한 탈속(脫俗) 성향은 이 장의 바로

뒤에 나오는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에서 다시 접하게 된다.



非以其無私邪,告能成其私

비이기무사야,고능성기사



첫 구절의 마지막 '야(邪)'는 문장을 의문문으로 만들어 주는 어조사다.

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는 '이것은 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사로움이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 명리의 추구,

시비의 가림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사로움을 버리고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한 사사로움이 뭐겠노? 그게 바로 이 우주 전체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신의 생명이요

보존이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자기 몸 하나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언제나 남의 뒤에 서고 명리와 시비의 바깥에 몸을 둠으로서 하찮은 사사로

움은 포기하고 오로지 소중한 자기 한 몸을 탈없이 잘 보존하라는 가르침이시다.

이렇게 읽어봉께로 제7장의 전체적인 뜻이 쫘악 통하제?

'하늘과 땅이 스스로 내보이려 애쓰지 않아서 영원히 이어지는 것처럼 성인은 남

의 앞에 나서지 않고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명리와 시비를 멀리하여 사소한 이

익들을 버리기 때문에 능히 개인(私:몸, 목숨)을 보존하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제

7장의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껏 노자의 연구서들이 여기만 오면 걍 헛지랄들을

했던거다. 이 문장에 나오는 두개의 사가 각각 무엇인지를 모르면 노자를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 노자 할아방이 말하는 '사(私)'는 바로 '자신의 안전

과 보존'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상이라고 보여질지 모르겠으

나 할아방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남의 일에, 세상사에 아는 척 잘난 척 나서고

끼이다가 화를 입지나 말고 그냥 자기 몸이나 잘 보존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게 바

로 '능성기사(能成其私)'하는 첩경이다. 노자는 천하의 일보다 자기 몸이 더 중요

하고 소중하다고 본 사람이다. 정의니 인이니 도덕이니 사회니 국가니 하는 따위가

지 하나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게 할아방이다. 물론

그렇게 세상일에 무심하게 초연한 삶을 살아도 누구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할아방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가? 바로 현빈이다. 그 가물하고 검은 골짜기를

보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고? 바로 영원불사하는 신들이다. 그게 신선이

다. 그런 영원불사의 이상향을 꿈꾼 사람이 할아방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명리와

시비는 하찮은 것으로 보고 초연하려 했다. 구르미가 꼭 그렇자나.

제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까불다가 잡혀 죽으면 죽는 거다. 별 수 없다. 삼국지에 보면

우길(宇吉)이란 도사가 오왕 손권의 형 손책한테 까불고 앵기다가 칼에 맞아 죽는 대목이

나온다.공명과 우길은 노장의 신선술을 공부한 동문이다. 그러니까 노자 할아방의 제자

들이다. 손책이 처음에는 우길을 화형시키려 장작더미 위에 앉히고 불을 붙였는데

우길이 한번 껄껄 웃으니까 소낙비가 내려서 불이 꺼져 버린기야. 졸따구들한테 죽

이라 하니까 전부 뒷걸음을 칭께로 할 수 없이 손책이 직접 칼을 뽑아 우길의 목을

쳐 죽었어, 나중에 죽은 우길의 귀신이 손책을 데려갔다 하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고 중요한 것은 제 아무리 도사라도 한칼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이제.

공명이 적벽에서 동남풍을 부른 것과 우길이 장작더미에서 소나기를 내리게 한

것을 묶어서 호풍환우(呼風喚雨)라 하는데 공명과 우길이 호풍환우하는 재조가 있

어도 세상사에 부대끼는 한 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할아방은 세상 밖(外)으로

나와 있으라 하는 것이다. 외기신(外其身)! 구름도 할아방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자

인지라 가급적 세상에 얼굴 내밀지 않고 조용히 산다 말다. 한 김에 얘기 하나 더해 주까?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기공무술 단체를 만든 창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국

보위 시절에 전통한테 주제넘은 훈계를 했다가 보안사 끌려가서 죽도록 맞고 나온

담에 행방을 감췄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 수련을 해서 금강체를 이뤘다

는 사람이었는데 보안사 빠따에는 못당했던 모양이제. 이것도 다 할아방의 '외기신

(外其身)'을 안 따른 탓이다.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이다.

도사 아니라 신선도 사람 손에 걸리면 죽기는 마찬가지다. 기공무술이 보안사 빠

따에 무슨 소용이며, 신선술이 산사람 칼질에 당할 것이냐 말이다. 우화등선하고

현빈으로 들어가면 그때야 산사람들 손이 미치지를 못하니 안전하겠지만 그 전에는

우짜든둥 몸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할아방의 결론이 뭐냐? '도를 딱는 내새

끼들아, 모쪼록 사람들을 조심해라. 호랭이보다 더 무서븐 놈들인께로 가급적 사람

사는 근처에는 가지도 말아라'다.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의 뜻이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그 몸을 보존

하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 문장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구

르미가 대답할 말이 있겠나? 당근 있다. 할아방은 사람들이 그 문장만으로는 의

미를 알기 어렵다 싶은 구절의 뒤에는 반드시 부연하는 문장이나 보충 설명을 두

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하여 사람들한테 밝혀놓은 것이 바로

다음 장의 첫구절인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이다.

왕삐리가 할아방의 <도덕경>을 주해와 함께 남기면서 장가름을 해놨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도덕경>을 나누는 불변의 기준이 된 81장이다. 그러나 왕삐리의 분장은

군데 군데 불합리한 곳이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기다. 물론 왕삐리가 '상

선약수'를 앞장과 분리해서 별도의 장으로 넘긴 것은 이 말의 바른 뜻을 몰랐기

때문이고 제7장과 제8장이 바로 이어져야 하는 내용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상선약수'는 제8장의 처음이 아니라 제7장 내용의 마지막 구절로 포함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상선약수'의 뜻을 모르면 '외기신이신존'을 알 수 없다. 일단 제7장의

전문을 같이 보는게 순서이겠다. 그리고 <도덕경>에 대한 올바른 장가름은 뒤에

가서 한번 손댈 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7장 정리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천장지구,천지소이능장차구자,이기부자생,고능장생,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外其身而身存,非以其無私邪,告能成其私

외기신이신존,비이기무사사,고능성기사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게, 또 오래도록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밖에 자신을 둠으로서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작은)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 (자신의 보존이라는 큰) 사사로움을 얻느니라.


제8장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상선약수,수선리만물이부쟁,처중인지소오,고기어도



때국넘들이 저거 왕한테 아이디어를 상납할 때 꼭

나오는 버릇이 있다. 그기 뭔가하마 상중하로 나눠서 결재를 올린다는거다.

'폐하 신이 보기에 이번 사단에 대한 계책으로는 세가지가 있사온데 상책은 토

끼는 것이옵고, 중책은 구라로 사기를 쳐보는 것이옵고, 하책은 앉아있다가 맞아

죽는 것이옵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상'이 나오면 반드시 그 다음에 '중'과

'하'가 나온다. '상선'이 나오면 벌써 '중선'과 '하선'이 따라 나오겠구나 하고

감이 와야 중국넘들 생각을 읽을 수 있능게라.

 

상선



'상(上)'은 '하(下)'에 대해 상이다. 따라서 '상선(上善)'이라는 말도 '하선(下

善)'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차선(次善)이 없는데 최선(最善)이 홀로 있을

수 없다. 만약에 할아방이 '하선(下善)'에 대한 언급이 없이 '상선(上善)'을 얘기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할아방이 한잔 먹고 취해서 쓴 부분일거다.

바로 뒤를 보면 '중선(中善)'과 '하선(下善)'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고 있는데,

이때의 '상선'은 글자 그대로 '상의 선은...'하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뒤에 가

서 '반면에 중과 하의 선은...'하고 이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약수(若水)'

는 글자 그대로 '물과 같다'라 읽으면 되겠다. 왜 물이 '선지상(善之上)'이냐?

그 이유가 두가지 나오는데 하나가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고 다

른 하나가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다. '물은 다투지 않음으로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이다.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처(處)'는 어떤 장소에 있다는 뜻이

다. 처하다 이런 말이다. 그 담에 '중인지소(衆人之所)'가 뭐꼬?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 아이가? 사람이 모여있는 곳. 그 담에 '오(惡)'는 싫어하다다. 주욱 이어서

읽으면 되다. '물은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싫어한다' 이런 문장은 다르게

읽을 수가 없능기야. 오직 한가지로 밖에는 읽을 수가 엄써.

첨부터 한번 보까? 물의 선이 선중의 상선인 이유는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 만

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싫어하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노? 딱 말이 되제.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 '외기신(外基身)'이 왜 세상의

밖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겄제? 물이 바로 그렇기 때

문이고 그런 물의 성질이 상선이라고 할아방은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이 필요하니까 주로 강가에 집을 짓고 모여 살지만 그렇다 해도 강물

에 붙여서 집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사는 동네와 물은 대부분 거리가 떨어져 있

다. 또 물이라는 것은 산 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번잡하고 시끄러운 사람

동네와는 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물의 선을 노자는 선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

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할아방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 것은 가장 상

의 선을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이나 사바중생들에게 출가를 권

유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도 좋다. 할아방도 우리한테 속세를 떠나 산 속의 물

처럼 사람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다 속세를 떠나 대가리 깎고 중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부처님도 출가가 불가능한 사바 중생들을 위해서 재가불자를 위한 설법

을 하셨고 계율을 주신 것이다. 팔정도가 바로 재가불자를 위한 생활규범이다.

우리 할아방도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 유유자적 구름 위에서 노는 신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꼬시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중선과 하선을

주고 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따라 나오는 거선(居善), 심선(心善), 여선(與善) 등

등 주욱 나라비 서있는 선들이다. 물의 상선을 취할 수 없어서 중인지소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중선과 하선일 망정 이러이러한 선은 갖꼬 살아라 이거다.

상선은 물 하나로 끝난다. 다음 회에 가서 할아방이 우리한테 선물 한 중선과 하선

들을 살펴보자.


중선,하선



'상선약수'란 말이 그냥 여게서 이유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이다. 할아방이 '외기

신이신존'이라고 쓰고 봉께 암만해도 나중에 사람들이 뜻을 몰라서 헷갈릴 것 같거

든. 그래서 '외기신이신존'의 이유를 들어주니라 넣어논 글이다. 할아방의 글쓸 때

마음가짐이 이리 세심하고 친절하다. 꼭 구르미 글 안 겉나? 그런데도 못 알아묵는

멍텅구리들은 어쩔 수가 엄써.

물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머물기를(處) 싫어해서 멀리 떨어져서 유유히 흐

르기 때메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 가까이 있는 물은 더렵혀지기 마련이

야. 구르미 함 봐바. 내가 얼매나 깨끗하고 순수하게 차말로 선년데 말이다. 이거

통신을 하다봉께로 온갖 떨거지들이 앵기붙능기라. 그러니 암만 선녀라도 우찌 독

야백백할 수가 있겠노? 할 수 없이 거추장스러븐 선녀 잠자리 옷은 벗어불고 장자

할아방 지팡이 하나 훔치갖꼬 일마들 쌔리패기 시작했다. 글다보이 선녀가 완죤

야차되붓다. 이기 다 상선을 택하라는 할아방 가르침을 잊은 탓이다. 외기신할라

꼬 그마이 애를 썼는데도 통신도 '중인지소'였던게라. 중인지소 중에서도 왕 골때

리는 '중인지소'라는 것을 통신 첨할 때는 몰랐다. 그래도 있제, '처중인지소' 하

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 할아방의 중선과 하선은 따를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게

구름이다. 함 보자.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이니 ☜ 선 중의 상은 물의 선과 같은 것이니, 수선(水

善)은 이만물이부쟁(利萬物而不爭)하고 ☜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능히 만물

을 이롭게 하고, 처중인지소(處衆人之所)를 오(惡)하느니라 ☜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느니라. 고(故)로 기어도(幾於道)이니라 ☜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

깝다 할 수 있느니라.(幾는 '거의 ∼하다, '가깝다의 뜻이고 於는 감탄의 뜻을 내

포하는 어조사이다)

[만약 그대들이 상선을 따르기(外其身)가 어렵다면 중선과 하선이라도 따라야

만이 능히 자기 한몸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라.(而身存)] ☜ 이 말이 할아방이

생략해 버린 구절이다. 상선이 나왔응께로 당근 다음 나오는 것은 중선 아니면 하

선일 수 밖에 없응께 굳이 설명을 안해도 알아먹겠거니 생각하신거다. 달나라에 갈

수 있게 된 훗날의 인류가 이 정도의 생략 때문에 할아방의 글을 못 읽는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하리라고는 짐작을 못했던거다. 다음의 중선 이하를 보자.



居善地,心善淵,與善仁,言善信,正善治,事善能,動善時,夫唯不爭,故無尤

거선지,심선연,여선인,언선신,정선치,사선능,동선시,부유부쟁,고무우


거선지(居善地) ☜ 머무를 때는 땅을 잘보고 누질러 앉아야 하고

심선연(心善淵) ☜ 마음은 언제나 그윽하게 가지도록 하며,

여선인(與善仁) ☜ 남을 대할 때는 인으로서 대하고,

언선신(言善信) ☜ 말을 할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고,

정선치(正善治) ☜ 바로잡을 때는 다스리는 법도로서 하고

사선능(事善能) ☜ 일을 할 때는 능력으로서 하며

동선시(動善時) ☜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보고서 움직여야 하리로되,

부유부쟁(夫唯不爭) ☜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남과 다투지 않는 것이니

고무우(故無尤) ☜ 그리하면 네가 우환이 없으리로다.


이 칠선(七善)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라 속세를 살아가는 중

생들의 처세요령이다.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목적이 대단히 속물적이다. 그리해야

내 한몸에 화가 없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소리다. 얼마나 솔직하노? 십계명을 지

켜야 천국에 가고 팔정도를 지켜야 극락왕생한다는 구라들에 비하면 노골적이지만

그만큼 가슴에 와닿는 구석이 있다. 할아방은 백성들이 나중에 천국을 가고 극락

에 왕생하고 열녀비를 세우고 하는 그딴 것보다도 우선 백성들이 지 한몸 안 다치

고 우짜든둥 보신이라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춘추전국 시대의 민초들의 삶

이란 위험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할아방은 거듭거듭 당부하기를 '제발 남과

싸우지 마라. 다투지 마라. 사소한 이익은 차라리 포기해라. 니 한몸 잘 보존해라.

죽으면 니만 섧다. 나서지 마라. 아는 척 하지 마라' 말끝마다 전쟁터 나가는 아들

붙잡고 한소리 또하고 한소리 또하는 오마니처럼 신신당부를 하는거다. 할아방의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그 보살피는 마음은 병아리 돌보는 어미 닭보다 더 지극하다.

사바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측은지심에 비견할만 하다. 이 뒤에 가면 그런 할아방

의 애민지정에 구름이 눈물을 쏟은 대목이 나온다.

상선(上善)은 도를 따르는 일선(一善)이고 이하 중하선(中下善)은 세상 속에 살

아가며 새겨야 할 칠선(七善)이다. 이 여덟개의 선은 도교의 십계명이고 노자의 팔

정도라 할 수 있다.



8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괄하여 보고 다음으로 가자.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居善地,心善淵,與善仁,

상선약수,수선리만물이부쟁,처중인지소오,고기어도,거선지,심선연,여선인,

言善信,正善治,事善能,動善時,夫唯不爭,故無尤

언선신,정선치,사선능,동선시,부유부쟁,고무우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만약 물과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

머무를 때의 선을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서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때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서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을 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9장


벌씨로 9장이다. 이 장은 엄청 쉽다. 아무라도 옥편 한권 들고 앉으면 술술 읽

어나갈 수 있는 장이다.


持而盈之,不如其已

지이영지,불여기이

취而절之,不可長保

취이절지,불가장보

金玉滿堂,莫之能守

금옥만당,막지능수

富貴而驕,自遺其咎

부귀이교,자유기구

功遂身退,天之道

공수신퇴,천지도 췌취


이노무 새롬 편집기는 다 좋은데 쪼께만 안쓰는 글자다 싶으면 고마 한자가 없어

부리. '취'하고 '절'이란 글자가 또 안 찍히네. 하이간에 그건 내가 어쩔 수 없고

계속 가자.

첫 번째 구절 '지이영지,불여기이(持而盈之,不如其已)'를 보자'지(持)'가 들어간 단어를

몇개 생각해봐바. 지속(持續), 유지(維持), 지구(持久) 등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

이다. '지(持)'는 포괄적으로 항상성을 의미하는 글자다. 자체의 뜻은 '가진다'

지닌다'는 뜻이고 그런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이력서를 지참한다'할 때의 '지참(

持參)' 정도가 있어. 이 지자 뒤에 어떤 다른 글자가 오면 그 글자의 의미를 유지

시키는 말이 되는거다. 뒤에 '찰 영'이란 글자가 오면 '지'자는 이 '영'을 수식하

는 글자로 변한다. 즉 '채우는 것을 계속한다'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계속 들이

붓는다'는 말이다. 만약에 컵에다가 물을 계속 들이부으면 우찌 되겠노? 당근 넘쳐

부제? 그래서 '불여기이(不如其已)', '(적당한 때에)그만 두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야. 이어서 말하면 '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히 채우고 멈춤만 못하

다'가 된다.


'절'은 '기둥 또는 막대기'다. 그람 이기 뭔 말이겠노? '취이절지'란 '기둥을

세고 있어도'라는 뜻이다. 집이 넓으면 기둥이많겠지. 집 크다고 암만 그

기둥을 세고 있어도 불가장보((不可長保)니라. 즉 '오래 보존할 수 없느니라'하는 소리다.

'금옥만당,막지능수(金玉滿堂,莫之能守)'는 '재물과 보화를 집안 가득 채워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로 번역하면 된다. '부귀이교,자유기구(富貴而驕,自遺其咎)'는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는 뜻이다.


9 장 번역

持而盈之,不如其已, 而 之,不可長保,金玉滿堂,莫之能守,富貴而驕,自遺其咎,

지이영지,불여기이,취이절지,불가장보,금옥만당,막지능수,부귀이교,자유기구,

功遂身退,天之道

공수신퇴,천지도


(무엇이던지)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그만 둠만 못하다.

(집이 크다고 하여)아무리 기둥을 세어도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은보화가 집안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방법이 없다.

부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

스스로 허물이 될 뿐이니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10 장



여기가 바로 유명한 <도덕경>의 제10장이다. 지금까지 그 어

느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짐작조차 못했던 장이다. 다른 장들은 틀리건 맞

건 시쳇말로 겐또라도 칠 수 있었지마는 여기만 오면 그냥 꽉 막혀분다. 그래서

이 10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해설서를 봐도 전부다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

들 뿐이다. 비슷하기는 커녕 아예 근처에도 못 오고 달나라에서 빙시육갑들을 떨

고 있다는 말이다. 할아방 등선하신지 2천년 만에 구름이 처음으로 이 말

들의 올바른 뜻을 풀어준다. 구름 이전에 <천부경>의 해석이 없었고 구름 이후에

<도덕경>에 대한 논란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10장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 보자.

첫 구절이다.


載營魄抱一,能無離乎

재영백포일,능무리호


무신 소린가 잘 모르겄제? 암만 한자에 정통한 사람도 이 문장은 못 읽는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나 <도덕경> 해설자들을 보면 여기서부터는 노자가 철

학 사상적 사변에서 벗어나서 도가수행(道家修行)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암시들을

내놓고 있다고 야무지게 착각들을 하고 자빠진다. '백(魄)'이란 글자에 현혹되고

'전기(專氣)' 같은 말에 헷갈려서 '이 장의 내용이 신선술이나 양생법 내지는 기수

련에 대한 설명이다'라는 택도 없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천방지축 까부는 소년 왕삐리는 물론이고 지나

의 학자들이나 물 건너 게다국 전문가상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앞의 몇 줄

은 장님 밤길 가듯이 어찌어찌 풀어나가다가 몇 줄도 못 가서 '애민치국(愛民治國

)'을 만나면 그게 발이 걸려서 헤까닥 자빠지분다. '왜, 이런 데서 갑자기 애민치

국이 나오는 거지? 오사(誤寫)가 아닐까? 후대에 잘못 끼여든 구절일거야.' 오만가

지 궁리를 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 거다. 그러니 들어있는 것을 뺄 수도 없고 억지

로 풀어놓고 다음 줄로 도망가기 바쁘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은 앞의 장에서 개인적인 처세의 방편을 설명한 것에 뒤따르

는 치국(治國)의 요령을 설명하는 장이다. 앞장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장이라면

여기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장이다.

글자 하나 하나의 뜻을 먼저 보자. 재(載)는 '실을 재, 이룰 재, 가득할 재' 자

고 영(營)은 '경영할 영, 지을 영, 진영 영' 자고, 백(魄)은 '넋 백' 자이고, 포

(抱)는 '안을 포, 품을 포, 가질 포'다. 그리고 일(一)은 '한 일' 자다.

그람 이기 뭔 소리겠노? 퀴즈를 푼다 치고 다들 함 생각해봐. 신문 퍼즐 쪼가리

맞추는 거보다는 훨 재밌는 거다.

재(載)는 일단 내비두고 우선 '영(營)'이란 글자를 먼저 보자. 영(營)은 노자 당

시의 춘추전국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는 군진(軍陣)의 단위였다. 한 단위의 군대가

모여 세운 진지 또는 숙영지다. 오늘날도 그 뜻 그대로 병영(兵營)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할아방은 이 글자를 '한 무리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골랐다. 그것도

그냥 사람의 무리가 아니라 어떤 카테고리 내에 엮어있는 사람들이다. 씨족이건 동

족이건 한 나라 백성이건 동질성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집합이다. 군대를 지 맘대

로 이탈하는 것을 탈영이라 하고 전시에는 즉결처분감이다. 즉 '영'이란 그 속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이 엄격하게 묶여 있는 집단이다. '민족'이

니, '국민'이니 하는 말들이 없던 시대다. 기껏해야 '백성'이란 말로 인간 사회 집

단을 불렀을 뿐이다. 때문에 여기서 할아방이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되어진 사람들을 일컬어 한 말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란 징집되어 병

영에 모인 병사들처럼 국가라는 하나의 테두리 내에 갇힌 사람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의 입출이 자유롭지 못한 강제적인 소?개념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구

절에서의 '영(營)'은 군대가 모인 진영처럼 운명 공동체로서 조직된 인간의 집단

이나 조직을 말한다. 바로 국가이고 국민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자까지 붙여서 읽

어 보자. '영백(營魄)'은 '국민의 넋' 또는 '국민의 마음'이다. 이것을 우리는 '민

심(民心)'이라고 한다. '영백(營魄)'은 민심(民心)이다. 이제 맨 앞의 글자, 재(載

)를 붙여 보자. 실을 재, 가득찰 재를 붙이면 '재영백(載營魄)'이 된다. 즉, 영내

(營內)에 가득찬 백(魄)이 된다. 조금 다듬으면, '온 나라에 가득 찬 혼'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 국민의 혼이요, 마음이다. '거국적인 또는 총체적인 민심'이란

말이 된다. 앞 세 글자의 뜻만 알면 다음의 포일(抱一)은 어려울 것도 없다. '하나

로 안는다' 또는 '하나로 품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앞 구절의 의미는 다 풀었다.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의 뜻은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에 담는다'이다. 뒷구절 '능무리호(能無離乎)!'는 '능히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이다. 그렇다면 '재영백포일,능무리호(載營魄抱一,

能無離乎)!'라는 것은 '온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에 담아서 이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이게 뭔가? 바로 치국(治國)의 제일 첩경이요,

요체요, 나라 다스림의 알파요 오메가다.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정곡을 찔러오는

표현이고? 나는 어떤 정치학이나 정치론에서도 이보다 더 섬찟하게 하나로서 전부

를 관통하는 촌철살인의 경구를 본 적이 없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이 문장에서

할아방에 무서움을 느꼈다. 공자보다 윗길이다. 차원이 한층 높다.



◆ 재영백포일,능무리호(載營魄抱一,能無離乎)! ◆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정치를 한다는 넘들은 죄다 할아방의 이 한 마디를 벼랑빡에 붙여놓고 아침 저

녁으로 디다보면서 그 말뜻을 새겨야 되능기다. 아니면 지 이마빡에 붙여놓고 거

울을 디다볼 때마다 보고 또 보던지. 저것이 되면 정치는 끝난기야. 황제,왕후로

부터 오늘날의 대통령까지 할려고 그토록 노력했어도 쉽게 안되는 게 저거다.

재영백포일,능무리호!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민심합일(民心合一), 국론

통일(國論統一)'이다. 이걸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요, 못하면 영새

미나 대충이 할배가 되 분다. 정치하는 넘들이 할아방의 <도덕경>에서 이 10장의

내용만 명심해도 인간이 확 달라지끼야. 정치하는 넘들이 바뀌야 나라가 변하낀데

'위무위(爲無爲)'할 줄을 모르고 '공수신퇴(功遂身退)'할 줄도 모르는 넘들이 뭘

로 갖꼬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을 하며, 항차에 '능무리(能無離)'를 하겠노 말다.


그리고 이 글자의 뜻과 할아방이 왜 '국민의 마음'이라는 표현을 위해 이 글자를

사용했는지 알아 보자.

 

God



'백(魄)'은 옥편에서 찾아보면 '넋 백'이라고 나온다. 다른 말로는 '얼'이다. 이

'백'은 홀로 쓰이기보다 대개 '혼(魂)'과 결합되어 '혼백(魂魄)'이라는 합성어로 쓰

인다. 혼은 우리말로 쓰면 '넉'이다. 고대로부터 동양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의 생명으로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본질을 '정(精)'과 '신(神)"

이라 했다. 이 둘이 결합된 합성어가 바로 '정신(精神)'이다. '정(精)은 육신의 생

명력이요, '신(神)'은 영(靈)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양자를 산 생명으로서

결합시키는 힘이 바로 '기(氣)'다. 때문에 동양적 관점에서 '살아있는 인간'이란 정

기신(精氣神)'의 결합체이다.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氣)'의 운행이 멈추

어 육신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의 생명력인 '신(神)'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정(情)'과 '신(神)'은 산 생명일 때의 정신(精神)이며, 죽은 다음의 분리된

둘은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다. 정(精)이 '신(神)과 분리되면 '백(魄)'이 되고 신

(神)이 정(精)과 헤어지면 '혼(魂)'이 된다. 이 혼이 홀로 영계에 존재하는 것을 동

양에서는 신(神)이라 한다. 양넘들의 God하고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동양의 신

은 육신과 분리된 혼을 일컫는다. 그래서 신은 곧 귀신이지 별다른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God의 개념과 동양의 신이 뒤섞여가지고

개념조차 혼탁해져 버렸다. 양넘들의 God은 처음부터 God이고 인간들하고는 출생

성분부터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쌍넘이 양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물론 고대 로마 제국의 신관(神觀)은 동양과 크게 다르지 읺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야훼라는 것이 지중해를 건너오면서 신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로 유

리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에서 보면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웃기는 개념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된다. 안 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귀신이 되서 제사밥이나 얻어먹으로 댕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 버린다. 그런 귀신 중에서 애북 영험이 있고 쪼께 귀족적인 양반 귀신을

따로 부를 때 재수없는 귀(鬼) 자를 떼불고 그냥 신이라 카능기다. 영계에 우글거리

는 구신들은 모다 한때는 살아있던 넘들이다. 하지만 일마들은 다 수명이 있다. 영

생불사하능기 아이고 다른 세상에 환생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혼들이

다. 아예 갈 데를 못 찾고 지 주제파악을 못해서 육신도 없는 껍데기로 오랫동안 개

기는 넘들이 바로 무당들이 받드는 귀신들이다. 이게 바로 인격신이다. 그 위에 양

넘들의 God과 비슷한 개념의 것도 있기는 있다. 특별히 하느님 또는 천신, 또는 상

제라카는 넘들인데 일마들은 그 존재조차 의심스럽다. 화기광이고 동기진 같은 넘

들이어서 정체가 가무스럼한 넘들이다. 그리고 일마들은 걍 허이불굴하고 있는 넘

들이라 사람들한테 별시리 복을 주는 일도 없고 헤꼬지하는 일도 없다. 생이불유하

는 존재들이라 무용이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다. 개개인의 길흉화복에는 아무

런 관심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바뜨, '하늘의 뜻' 또는 '천명'이라는 개념으

로 확대해서 볼 때에 일마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듯한 흔적이 자주 보인다. 심증

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넘들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자주 그런 심증을 갖게 된다.

'하늘의 뜻', '신의 의지' 같은 것이 혹 작용한 탓에 일이 그리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르미콜롬보가 다음에 본격적으로 한번 추

적 수사를 해 보기로 하고 일단 주제로 돌아가자.

정리를 해 보면 '백(魄)'은 우리 말로 '넋' 또는 '얼'이라 하고, '혼(魂)'을 '넉'

이라 한다. '얼'은 육신의 생명력인 정이어서 육신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므

로 얼은 '빠진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얼빠진 놈'이라 하는 것이지 '얼 나간 놈'

이란 욕은 없다. 반면에 '넉'은 영체(靈體)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어서 넉은 '나

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넉 나간 표정'이 아니고 '넉 빠진 표정'이라

쓰면 틀린 말이 된다. 동시에 '넋(얼)이 나갔다'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혼(넉)은 신의 생명력으로 죽으면 하늘로 돌아가고. 백(넋,얼)은 정의 생명력으로

서 죽으면 땅으로 꺼지는 것이다. 기(氣)는 죽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다시 한번 '재영백(載營魄)'이란 말로 돌아가 보까? 글자 그대로 옮기면 우찌 되

노? '한 무리의 사람들 것으로 채워진 백'이란 뜻이제. 즉 '백(魄) 의 집단'을 말한

다. 이것을 어떻게 한다? 포일(抱一), '하나에 담는다'는 말인께로 다시 말하면 인

간 집단의 백(얼)을 자루 하나에 담아서 이것을 어찌한다? 능무리호(能無離乎), '흩

어지지 않게 한다'다.

'수 천 수 만명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서 흩어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의 영혼을 수

집하는 악마가 등장하는 호러무비가 생각나제?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래에 나오는

'애민치국(愛民治國)'의 요체다 말다. 지도자를 향해 민심이 복속하고 천하가 하나

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또 '영(營)'이란 말이 나왔으니 '장수가 장병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 군대를 일사

불란하게 움직이는 것'과도 통하는 소리다. 확대 해석하면 김일성 아바이하고 그 아

들래미 정일이가 북한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것도 인간 집단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에 들어갈 수 있겠다. 할아방의 '재영백포일,능무리'가 완죤

엽기적으로 실현된 예다. 요시 자주 사단을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하는

짓은 '재영백포일,능무리'의 호러편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정치의 요체는

바로 '재영백포일,능무리(載營魄抱一,能無離)'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할아방이 이 대목에서 혼(魂)과 백(魄) 중에서 백(魄)만 가지고 얘기

를 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재영혼포일이 아니고 재영백포일이어야 하

는가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알아 보자.


혼백 설명



만약에 할아방이 이 대목에서 '백(魄)'이 아닌 다른 글자를 썼다면 할아방이 아

니다. 할아방은 글자 하나도 생각없이 집어넣는 사람이 아니다. 이게 철학이다.

정(情)과 신(神), 그리고 혼(魂)과 백(魄)은 서로 바꿔 쓸 수 없는 글자다.

이 경우에 할아방이 말하는 영백(營魄)이란 말 속에는 국가, 국민, 민족과 같은

개념이 깔려 있다. 그리고 민족혼이나 애국심, 동포애와 같은 집단 의식은 혼에 들

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에 들어있다. 이런 혈연과 밀접한 영적인 소속 개념은 땅에

결부되어 있고, 그 땅에서 나서 그 땅으로 돌아가는 백에 담겨 있는 것이지 허공으

로 사라지는 혼(魂)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내세관과 영혼관이다. 육신의 생명력인

정(精)은 그 양분을 땅에서 나는 음식에서 얻고, 영의 생명력인 신(神)은 그 활력

을 대기의 호흡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정(精)의 영화체(靈化體)인 백(魄)은 그 땅

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 땅에서 나는 곡식과 물을 떠나지 아니한다. 신토불이(

身土不二)가 그래서 나온 말인 것이다. '국가와 민족' 또는 '씨족과 혈연'이라는

것은 땅으로 해서 맺어지는 것들甄? 때문에 '애국심'이나 '충성심', '동포애' 같

은 것은 모두 얼(백)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

람들의 백(魄)만 하나로 모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혼(魂)은 치국(治國)의 방해물이다. 혼(魂)은 신(神)의 영화체(靈化體)로?전인류

적, 전생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나, 어느 부족 사람, 어

느 집안 사람과 같은 토착성(土着性)이 희박하다. 그래서 사람의 혼(魂)에는 애국

심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한국혼(韓國魂)이란 말은 잘못 합성된

조어이다. '한국의 얼' 또는 '한국백(韓國魄)'이 되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쓰기를

'한국혼(韓國魂)'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신(神)은 국적(國籍)이 없다. '이스라엘

의 신'이라는 것도 웃기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은 먹거리의 촌수를 따진다. 그래서 먹거리가 달라지면 정이 바뀌고 정이 바

뀌면 사람의 체형과 생김새가 바뀌고 모습이 달라지면 즉 다른 종자가 되 버린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렇게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미스코리아에서 뽑는

년들 함봐바. 그게 한국 여자야? 우리 먹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싸다고 수입 식량을

먹어조지면 우리 얼이 바끼부리. '세계화, 국제화' 탓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백(

魄)'이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기 때문인지 위로는 정치하는 넘들부터 아래로는 주부

들까지 '얼 빠진 짓'을 노냥 하고 자빠지능게라. 요즘 대한민국 사람들은 상당수가

'얼빠진 년놈들'이라고 봐도 틀리지가 않아. 사람에게서 백(魄)의 정체성이 희미해

지면 기고만장해 지는 게 바로 혼(魂)이야. 그래서 우리 나라 강토 전체가 교회 십

자가로 시뻘겋게 불이 붙는 것도. 국적불문하고 우주화를 지향하는 것이 혼(魂)

이고 그것이 곧 신(神)이기 때문이야. 우주적 존재인 신에 있어서는 애국심이란 개

념은 가당찮은 것이다. 대한 민국을 지키려면 김치를 지켜야 하고, 고추장을 지켜

야 하고, 된장을 지켜야 하고, 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야. 뙤넘 콩,

마늘에, 캘리포니아 쌀, 엘에이 갈비를 뜯다가는 죽은 다음에 우리의 얼(백)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헤매 부리. 그래서 어떤 넘 얼은 태평양을 건너 얼에이

까지 가고, 어떤 년 얼은 현해탄 건너 게다국에도 간다. 더욱 골치 아픈 년놈들 얼

은 이리 가야 할지 저리 가야 할지를 몰라서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헤매고 있어.

'이리 가알까아아아, 저어리 가알까. 차라리 도오라아 가알까~~ 헤매도오 사암가

악지에 날이이 저무우운다~~' 이렇게 고민이라도 하는 얼은 차라리 낫제. 요즈음

어떤 년놈들 얼은 아예 '한국 찍고, 중국찍고, 일본 돌아, 나성 찍는' 식으로 망령

들도 세계화 추세에 걸맞게 지랄육갑을 떨고 있다. 먹거리가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

지고 그 얼이 바뀌게 된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먹거리를 지키는 데서부

터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얼이 제 자리 제 땅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만리 타향에서 죽은 몸일 망정 그 시신이나마 조국의

흙에 묻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왜 할아방이 '뭇 사람의 백을 하나로 모아 흩어지

지 않게 하라'고 하는지 인제 알겄제? 정(情)과 그것의 영화체(靈化體)인 백(얼)만

이 피를 모으고 촌수를 따지고 먹거리를 따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

고 말할 때 한국적인 모든 것은 바로 얼에 담겨 있다. 신은 혈통과 살아온 땅과 먹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국인의 백은 있어도 한국인의 혼은 없다. 한국인의 얼

은 있어도 한국인인 신은 없다. 이스라엘넘들을 돌봐주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야훼

는 이스라엘의 정이지 세계인의 신이 아니다. 천지분간도 못하고 정신을 못차리는

한국넘들 머리 위에 임하는 성령은 이스라엘의 신이 아이다. 그리고 제사밥을 얻어

묵겠다고 아들넘 집에 기웃거리는 조상들의 혼이란 바로 얼이다. 피를 찾아오고 땅

을 찾아오고 먹거리를 찾아오는 백이라는 말이다. 그런 제사상에 수입 쌀로 핸 밥

하고 수입 고기 올리가 되겄나? 그런 제사밥을 묵고 우리 조상들이 얼매나 헷갈리

는 주 아나? '이기 우리 아들넘 맞나? 내가 집을 잘못 찾았나?' 함시로 절하는 아

들하고 며누리를 보고 또 본다 말다.

한국인의 백은 포일(抱一)이 아니라 백산(百散)하고 있다. 오호 통재라! 삼성(三

聖) 이래 일만년 이어온 하늘 백성의 적통(嫡統)이 오늘에 이르러 혼비백산(魂飛魄

散)을 하는구나.
 

제사를 지내는 이유


불교의 '윤회설'과 '조상에 대한 제사'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응께로 이 참에 잠깐 설명을 하께. 죽은 아부지 엄마가 '윤회설'에 따르면 버얼

써 어데선가 환생해서 태어났을 지도 모르는데 제사를 지내면 뭐 하노? 하는 씰데

없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제사날 오는 것은 '신'이

아니라 '정'이고, '혼'이 아니라 '백'이다. 육신의 생명력인 '백'은 환생 여부에

관계없이 그 육신이 흙 속에 남아있는 한 사라지지 아니한다. 제사를 삼대까지 모

시는 이유가 바로 망자의 시신이 완전히 썩어서 없어지는 기간을 따진 산수다. 삼

대 후손 때 쯤이면 그 육신이 완전히 소멸되는데 충분한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상 묘'를 잘 못 써서 집안에 우환이 든다는지 하는 일은 다 조상의 얼이 안

편해서 그렇다. 자기가 살아온 땅이 아닌 타향에서 죽어 묻힌 영혼은 편치 못해서

이국만리를 떠돈다. 때문에 죽어 그 몸은 자기 고향에 묻혀야 되는거다. 나라를 위

해 숨진 지사들의 시신은 그 유골 한줌이라 할지라도 고국으로 모셔와야 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다.

불교의 장례법이 '화장'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시신과 함께 오래동안 남아 있

을 망자의 '백'을 가장 빨리 지우는 방법이 바로 화장이다. 불로 태워 버림으로서

그 육신을 소멸시켜 버리면 백도 사라진다. 부모님 장례를 화장한 후손한테는 조상

의 우환이 없다. 물론 은덕도 기대할 게 없다. 제사를 모셔도 안 오기 쉽다.

화장을 한 부모님과 매장한 부모님은 꿈에 나타나는 일에 차이가 있다. 화장한

부모님은 자식들 꿈에 잘 안 나타나고 나타나도 그 기간이 상대적으로 대단히 짧게

된다. 다른 누구인가로 환생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불교식의 화장법이 다 이유

가 있고 매장할 때는 묘자리를 잘 골라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다. 이노무 나라

는 교육이란기 정말 가르치야 될 것은 하나도 안 가르치고 망구에 씨잘데기 없는

지식만 아들 대갈통에 쑤셔넣응께로 대학을 나와도 제사 지내는 이유도 모르능기

야.

완죤 양아치에 날라리 같은 것들이 성직자네 하면서 사기나 치고 별 희한한 종자

들이 맹긴 야리꾸리한 종교에 재산에 몸까지 갇다바치고 지랄발광하는 년넘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가 다 무식해서 그런 것이야. 모릉께네 그 꼬라지를 보는기야.

대학교수에 고관집 마누라년들이 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왔으면서도 그런데 헤까닥

해갖꼬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가 뭐고? 대학교를 나왔다꼬 유식한기 아이야. 유학

을 댕기왔다꼬 인간이 제대로 되는 것도 아이고. 중요한 것은 뭘 배우고 뭘 알아야

하느냐야. 조상에 대한 제사를 미개한 풍습이라 하고 단군 할아방 동상에 칼질하는

넘들은 다 그 업보가 있는 것이야.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치고 무식이 불러 온 야

만적인 비극이야.
 

전기치유


'전기치유,능영아호(專氣致柔,能孀兒乎)'란 다음 구절을 대부분의 해설서가 기

를 가지고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의 몸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뜻으로 풀어

서 마치 기공 수련의 비결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專氣'라는 말에 현혹이 되고 '영

아(孀兒)'라는 말에 헷갈린 나머지 할아방이 지금까지 해 온 소리를 다 까묵었다는

소리다. 이 구절을 보고 기수련(氣修鍊)을 연상하면 안 된다. 이 구절부터는 계속

앞 문장에 이어지는 말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말의 되풀이다.

내가 10장의 글을 읽을 때 눈 앞에 좌르르 펼쳐진 광경이있었다. 할아방은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아이고 초나라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앉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오른다꼬 뻥을 쳐서 사람들을 웃긴 어떤 영감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

을 연상할 지 모리겠는데 실제 할아방은 대단히 핸섬한 미남이다. 도사풍 말고 아

주 정열적인 혁명가를 연상하면 오히려 비슷하다. 게바라하고 오히려 엇비슷하끼

야. 구르미는 잘 생긴 남자 좋아하거든. 그래서 이 둘은 내가 꽤나 좋아한다. 그

렇다 해서 이덕화나 유덕화 같은 스타이루는 별로다. 최수종이같은 기생오래비 스

타일보다 차인표가 훨 낫제. 그건 그렇고 이런 잘생긴 우리 할아방을 초나라 왕이

불렀다 말다. 바둑 두자고 부른기 아이고, 치국평천하의 도를 물어보자는 것이었

어. 초나라 왕이 묻고 할아방이 그 아래 읍하고 서서 답하는 광경이 마치 어제 본

영화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 오르능기야. 이건 아매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라꼬

믿어도 된다. 역사적인 기록에는 없는 장면이지만도 구르미가 있었다카마 있었던

게야.

왕이 묻기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길이 무엇이뇨?' 하니 할

아방이 왕한테 오히려 묻기를 '왕께옵서는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능히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나이까?' 항께, 왕이 답이 좀 궁하거든. '짜슥

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내가 그걸 할 수 있으면 니 잡고 물어보겠냐 임마?'

싶었지만 꾹 참고 말하기를. '그럴 수 있다 치고, 그 다음은 무엇이뇨?'하고 물응

께, 우리 할아방이 줄줄이 말해 놓은 것이 바로 '전기치유,능영아호' 이하 제10장

의 구절들이다.


'전기치유,능영아호(專氣致柔,能孀兒乎)?'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로 모은 뭇 사람 얼의 기운을 마음대로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변화시킬 수 있겠사옵니까?'하고 할아방이 왕한테 묻는다. 앞에서

할아방이 했던 말, '위백성무지무욕(爲百姓無知無慾)'을 실제로 해낼 수 있겠느냐

는 질문이다.

'전(專)'은 '오로지 전, 제마음대로 할 전'이다. '전기(專氣)'는 '기운을 마음

대로 한다'이다. 또는 그냥 '오로지'란 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전기치

유(專氣致柔)'라는 말은 '오로지 백성의 기운을 부드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백성의 심성을 사납고 흉포하게 만들지 말라는 주문이다.

할아방이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의 끝무렵이고 전국시대로 접어들던 때다. 오로지

국왕이나 제후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 나라 사람들을 사납게 만들어서 이웃나라와

의 전쟁에 써먹을까 골몰하던 시대다. 남자는 태어나면 전사(戰士)로 양육해서 우

짜든둥 사나운 싸움개로 키워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왕

한테 '치국의 도'라고 상주하기를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만들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응께 왕이 기가 멕히붔어. 이 문장들이 전부 의문문

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할아방이 왕에게 질문한 말들이기 때문이야. 왜? 할아방은

'백성들의 기운을 하나로 떠나지 않게 해라'가 아니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왜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만들어라'가 아니고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까? 바로 '그렇게는 못하시겠지요. 긍께로 나한테 나라 다스

리는 방법을 물어봐야 망구에 씰데없는 짓일 뿐이옵니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즉 할아방의 '치국의 도'라는 것은 아무 왕이나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

이다. 할아방도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별시리 속세간에 크게 쓰이고자 애쓰지

도 않았고 그럴 욕심도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왕이 물응께로 심드렁하니 되

묻고 있는 거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사람 말 시키지 마쇼.' 하는 것이

저 말을 할 때의 할아방 심정이었다. 이제 감이 오나? 그람 그 담에 오는 구절들

을 주욱 함 읽어봐바. 구르미가 안 풀어줘도 그 뜻이 눈에 잡힐끼야. 도올이가 이

하 이 장에서 사까닥질을 치고 개다리 춤을 추는 것은 좀 있다 봐도 됭께로 한번

씩 생각 좀 해봐바. 이기 다 공분게라. 


척제현람 능무자호


백성들의 기운을 어린아이와 같이 어질고 순박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할아방

의 말을 듣고 왕이 무신 생각을 했겠노? '이 자슥이 뭘 잘못 묵었나? 와이 헛소리

를 하고 자빠진디야?' 초나라 왕이 듣고 싶었던 것은 '부국강병책'이었지 할아방

이 말하는 것과 같은 '파라다이스의 건설'이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왕

은 인내심이 강했던지 콱 쪼인트를 까주고 싶은 생각을 누르고 다시 묻는다. '그

려, 백성들을 얼라처럼 맹길어서 우짜자 말이고?' 항께네 할아방이 왕한테 또 묻

는데 이기 차말로 돌아가실 소리다. 구르미가 눈물을 쏟았다는 게 바로 여기다.

함 들어봐 바.


滌除玄覽,能無疵乎?

척제현람,능무자호?


캬~~~~~~~ 차말로 지기제? 나는 저 '척제현람,능무자호?'에서 뿅 갔다. 얼매나

가슴이 찡한 소리고? '상선약수'는 아무 것도 아인게라. 내가 있제, 정말로 존경

할만한 사람이 울나라 대통령이 되마 구르미의 신필로 용이 날아가듯이 저 여덟

글자를 휘갈기갖꼬 집무실에 걸어 놓게 하끼다.


척제현람!

'척(滌)'은 '딱을 척, 씻을 척'이다. '세척제'라 할 때 쓰는 글자다. '제(除)'는

'섬돌 제, 층계 제'다. 섬돌이란 옛날 집에서 대청 마루 올라갈 때 딛고 오르도록

마루턱에 놓아두는 넙쩍한 돌이다. 그랑께네 '척제(滌除)'는 '섬돌을 딱아준다'는

말이다. 미천한 백성들이 집에 오를 때 흙투성이 발을 딛는 그 섬돌을 왕이 허리를

굽혀 손수 닦아준다는 말이다. 그라마 '현람(玄覽)'은 뭐겠노? 어려운 말이 아이다.

'어두운 곳을 본다'는 소리다. 그래서 '척제현람'은 바로 '백성들의 섬돌을 딱아

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준다'는 말이다. 그 담의 구절 '능무자호(能無疵乎)'를

마저 보자. '자(疵)'는 '흠집, 상처'라는 글자다. 그랑께 이 말은 '상처를 없앨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전체를 같이 함 읽어 보까? '왕이시여, 손수 백성들의 섬돌

을 딱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들의 아픈 곳을 없앨 수 있겠나이까? 하고

묻는 말이다.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던 박복한 민족의 딸로 태어난 구름은 할아

방의 저 말에 울고야 말았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할아방은 성인이라 했다.

저게 바로 할아방의 '성인 정치'다. <도덕경> 5천 글자의 핵심이고 노자 사상의

전부다. 저런 말을 가지고 도를 닦아 신선이 되네, 기 수련을 어떻게 하네 해 쌈

서 헛지랄들을 해왔응께네 할아방이 얼매나 기가 막혔겠노? 오죽 답답했으면 이 재

주없고 아는 거 없는 구르미를 찾아와가 하소연을 하면서 좀 똑바로 갤치주라꼬 당

부를 하셨겠노?

일반적인 노자의 해설서에는 저 소리가 뭐라 되어 있는 주 아나? '마음을 깨끗히

닦아 흠집을 없앤다'로 되 있다.


애민치국


벌씨로 이 글이 60회 째네. 어영부영 책 한권 나오겄다.

'애민치국,능무지호(愛民治國,能無知呼)?'네.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근데 애민치국이 여서 와 나오노 말다.

와 나오기는? 이 장이 치국평천하의 성인치도를 설명하는 장인께로 나오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지(知)'에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겠사옵

니까?'하는 소리다. 앞에서 할아방이 '불상현(不尙賢)하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마라'는 주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스리라는 소리겠노? 오직 진실된 마음으로 다스리라고 할아방은 말한다.

지금 울나라가 이리 개판인 이유가 바로 똑똑하고 잘난 대통령이 진실된 마음이

아니라 '지(知)'만 믿고 대글빡을 굴려서 그렇다. 진심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그때 그때 땜빵이나 할라고 임기응변의 술책과 권모술수로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여우 아가리 하나 벗어나면 늑대 아가리 앞이고 그거 게우 벗어나면 호

랭이 아가리다. 자전거 피할려고 잽싸게 몸을 날링께로 똥차에 받쳐 부능게라.

대통령 주위에 있는 넘들도 하나같이 마음을 똑바로 쓰는 넘이 엄꼬 전부 다 잔

대가리 굴리는 넘들 뿐이야. 그런 대가리는 우찌 그리도 영악하게 잘 돌아가는지

보는 내가 마 탄복을 할 정도야. 우찌된 나라가 대통령 대글빡이 나쁘면 나빠서 조

지고 좋으면 좋아서 조지노 말다. 지(知)로 다스링께네 그런기다.

다음 구절 함 보까?


'천문개합(天門開闔),능무자호(能無雌乎)'다.

KIDS, 실사구시



내가 어제 밤에 산인님하고 장시간 채팅 데이또를 하고 나서 머시냐, KIDS란 BBS

에를 가봤디마는 날로 잡고 시비가 무성하대. 어떤 님이 말하기를 구르미는 뻑하마

고소고발을 하는 사람이고 실제 인물은 할아버지라카더라 하는 그야말로 카더라 방

송을 해 논기야. 글고, 박정희 신봉자고 김대중한테는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고,

우짜고 막 해 놨는데 이것도 도올이 못지 않은 개근기라. 구르미가 만약에 고소 고

발 좋아했으면 식겁먹은 사람 여럿 되끼야. 하지만 다 알다시피 구름은 지금까지

고소 고발을 커녕 센타에 찔르는 메일 한장 안 보낸 사람이다. 센타에서 먼저 알고

처벌한다 카는 사람도 구르미가 말린 사람이다. 구르미가 통신을 한자리에서만 10

년째다. 할아버지라 카는거야 괘안타. 하지만 구르미 통신 경력에 내가 고자질해서

아이디 정지 먹은 사람조차도 없다. 있나? 있으면 나와 봐. 걸프가 내한테 얼매나

죄를 많이 졌으면 부르기만 해도 겁난다 카겠노? 근데 말다, 내 말투가 진짜르 할

배 같나? 그렇다카마 그건 쪼께 문제가 되제. 선녀 보고 할아방이 뭐고? 선녀라 카

건 할배라카건 그런건 신경도 안쓴다마는 어제 KIDS에 올라온 글을 주욱 읽으면서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된 것은 따로 있어. 그게 뭐냐믄 바로 사람들이 맹종하는 권

위라는 것이야. '어떤 사람의 말이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을 믿을

만한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능기야. 구르미가 노자에 대한 글을 씅께로

구름이란 사람이 그런 글을 맞게 쓸만한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자빠지능게야. 유학

을 댕기왔는지, 박사 학위는 있는지, 다른 저명한 저서가 있는지. 교순지? 이딴 망

구에 씨잘떼기없는 권위를 찾을라꼬 눈을 두리번거리는 맹꽁이들이 있는게라.

이건 비단 KIDS만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 전체의 심각한 병이야. 나는 지금까지

통신을 하면서 내가 학교를 오데 나왔네, 뭐를 했네 그딴거 떠들어 본 적이 엄써.

아이다. 있긴 있네. 내가 레인저 기드가가 월남전에 갔다 온 이야기며, 왕년에

흑장미로 이름을 날렸던 이야기며, 전생에 삼청궁 선녀였다는 이야기 같은거 짚어

봉께 꽤 하기는 했다. 하지만도 그기 뭐 별시른 경력이가? 권위씩이나 될만한기 아

이다. 일전에 테레비를 봉께 '실물 경제'에 관한 책을 써가 돈도 벌고 이름도 날

린 어떤 머시마가 학력하고 경력을 날조했다가 들키갖꼬 고마 매장을 당하는 꼬라

지가 나오데. 웃기는기 뭐냐믄 미국의 유명 대학에 대학원을 나온 경제학 박사 아

무개일 때는 아무도 그 사람의 책을 비판하지 못하다가 막상 정체가 드러나고 나니

까 그때서야 '그 책은 사실 상식적인 수준으로 아무나 쓸 수 있는 정도고 어쩌고'

지랄육갑을 떠는 넘들이 나온다는 게야. 학력을 속인 글마보다 나중에 뒷북치고 나

오는 넘들이 더 형편없는 넘들이야. 이기 대한민국이야. 실력보다 학력에 뻑가고

능력보다 간판에 고개 숙이는 넘들이 무신 철학 싸이트에 들락거리노 말다.

컴퓨터를 할 줄 알고 인타네또 철학 싸이트에 기들어오는 정도면 그래도 대글빡

에 먹물은 들었다는 넘들이다. 그런 넘들이 '저 말이 맞나 안맞나'가 아이고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느 학교 나왔나? 뭐하는 사람인가? 그거 신경쓰고 자빠졌어.

긍께 나라가 이 모양이다.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이 아인기다. 봐라. 이 머시마들

아. 너거는 구르미를 보고 배워야 되능기 있다. '노자'를 배우는건 급하지 않다.

도올이 지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사람 전부가 인정하는 동양학의 대가고 지가 제

아무리 세계에서 젤로 좋다는 하바드 대학을 나온 박사라 캐도 그 말이 틀렸으면

주저없이 망설이지 않고 틀렸다고 말하능기 구름이다. 지가 나이가 암만 환갑이 가

깝고 그 권위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학문에 나이와 권위는 조오또 아인기다. 학문

은 '맞느냐 틀리느냐'이고 '누가 과연 옳으냐'이다. 어느날 구름이가 짠하고 졸업

장하고 학교 성적표 낯짝에 디밀면 그때서야 껌뻑할래? 그건 학문적인 납득도 아

이고 인간적인 매료도 아니야. 그저 간판에 절하는 짓이고, 계급장에 경례 붙이는

거고 껍데기에 꺼뻑 죽는 쪼다 짓이야. 제발 이 나라 머시마들은 용기를 갖기 바란

다. 조작된 권위에 맹종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엎드려 맹종하는 권위가 사

실은 꾸며진 권위이니 이는 불선이니라' 할아방의 말씀 아이가? 바로 너거같은 머

시마들을 염려하여 하신 말씀이다. 구르미도 실로 걱정되는 바 충정에서 쓰는 글

인께로 이글 보고 뚜껑이 열리가 난리육갑 치는 일은 없도록 해라.

말이 난 김에 내가 옛날 예기 하나 해주까.

러일 전쟁 때 러시아군의 여순 요새를 공격한 게다군의 대장이 노기 마레쓰께란

넘이다. 훗날 왜넘들한테서 군신으로 추앙받은 넘이다. 일마가 만주로 가는데 왜

넘 총사령부에서 요새공략전을 염두에 두고 당시 왜넘 군바리들 중에서 포병의 전

문가라 할만한 넘들은 죄다 뽑아서 노기 밑에 붙여줬어. 당시 노기의 일본 제3군

사령부는 일본 포병의 간판스타들이 전부 다 모였어. 이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 하

는 넘들이 온갖 전문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전문적인 포병전을 펼쳤지. 결과가 우

찌됐겠노? 6개월에 10만명이 넘는 왜넘들 시체가 여순 요새를 뒤덮고도 함락을 못

시켰어. 이걸 나중에 해낸 넘이 누군 주 아나? 고다마 겐쓰께라는 넘이야. 이 넘은

노기의 친구로 만주에 있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던 넘인데 일마는 포

병의 포짜도 모르는 넘이야. 일마가 다급해서 여순에 나타나갖꼬 노기의 지휘권을

뺏다시피 해서 지휘를 하게 돼. 작전회의를 하는데 전문가 포병 장교들이 뻑하마

'그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기술적으로 그건 불가능하고, 그건 시간

이 부족해서 안되고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말이 안되는 작전이올시다.'

카고 사사건건 지랄육갑을 떤게야. 긍께로 고다마가 이랬다카더라. '이 쓰발넘들

아. 좆까는 소리 고마하고 시키는 대로나 해!' 그래가 우찌됐겠노? 6개월 동안 10

만명이 뒈지고도 끝이 안났던 전투가 단 반나절만에 끝나 분기야. 전문가라는 인

간들은 자주 좆까는 소리들을 한다. 그걸 맹종하면 안되능거다. 포병의 전문가라는

권위에 맹종했던 노기는 무능의 표본이다. 전 세계를 통털어 글마만큼 무능한 장

군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중에 메이지가 뒈지고 나서 뒤따라 자살한 바람에 왜넘

들이 군신이니 꼴갑이니 떠받들고 자빠지고 있는거 지만.

전문가다, 교수다, 박사다가 중요한기 아이고 '맞느냐'가 중요한기야. 이게 바로

실사구시야.
 

천문개합


음... 진도 나가야 되는데 엉뚱한 얘기로 한 회 까묵었다.

오데까지 했더라. 죽으면 늙어야제. 인자 할망구가 되고 낭께 눈도 침침하니 어

둡고 허리도 쑤시고. 치매가 오는지 전 회에 오데까지 하다 말았는지 기억도 잘

안나네. 쿨룩 쿨룩. 맞다. '천문개합(天門開闔)' 하다가 말았는갑네. '하늘의 문

이 열리고 닫힌다'는 소리네. 오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면 우찌 된디야?

가심이 쿵 내리앉네. 고마. 인자 죽을 때가 되 강께네, 하늘 문이 열린다 하마

겁이 나부네. 그거 열리마 인자 끝 아이가?

이 할매는 '하늘문이 열린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있제, 어떤 생각이 드는 주

아나? 구름이 짱!하고 갈라지면서 천사들이 부는 나발 소리가 빰빠라밤 남시러

하늘이 쫘르르 열리고 구름 탄 상제님이 날로 보고 어서 오라꼬 손짓을 하는 그런

광경이 떠오르는게라. 이기 다 죽을 때가 다 되서 그런갑다, 그쟈?

상제님 뒤에서 우리 노자 할아방이 탁빼기 사발을 들고 껄껄껄 웃음서 '우리 갱

수기 공부 많이 했나?'카고 물어보능게라. 이기 내가 생각하는 ;천문개합'이라.


왕이 치국지도를 물었어, 할아방이 답하여 묻기를...

'주공께옵서는 온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

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런 다음에는 우찌 해야 하느뇨?'하니

할아방이 다시 물어 가로되,

'오로지 백성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 수 있겠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리한 다음에는 무엇이뇨?'하니

'백성들 집의 섬돌을 주공께서 허리를 굽혀 손수 딲으시고 어두운 곳을 살펴, 아

픈 곳이 없도록 할 수 있겠나이까?'

하니 왕이 다시 답하여,

'그렇게 하면 성인의 치도라 하겠느뇨?'

그러자 할아방이 말하기를,

'그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성인의 도를 행하는 것이

옵니다'

인자 감이 잡히나? '천문개합'이란 바로 '성인지도'다. 강증산이 늘 말했던 '천

지공사(天地公事)'라는 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다. 내가 <도덕경>을 읽으면서

할아방한테 참 반했던 것이 그 문학적 표현이다. 얼마나 기가 막히노? '척제현람'

이나 '천문개합'같은 소리는 문학적으로 볼 때도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이고?

그람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 '능무자호(能無雌乎)'는 뭐겠노? 이 말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할아방한테 다시 한번 까무러친다. 인간 세상의 본질과 정치

라는 것의 이면의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소리다.

이런 것이야말로 대 사상가의 통찰력이고 그런 정신세계를 엿볼 때에 우리가 놀

라고 감탄해야 할 대목이 이런 곳이야. 


능무자호 ?


과연 할아방은 그와 같은 성인에 의한 이상적 통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나는 그랬으리라고 본다. 때국넘들의 정치적 이상은 요순이다. 요와 순이 그네들

이 그리는 이상적 정치 지도자의 모델이다. 할아방이 말하는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윗길이라

할만한 인물들도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한편으로는 조잡한 동물이

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생명체이다. 석가모니를 보라. 인간이 그럴 수 있

겠느냐는 한계를 보여주신 분이다. 아니 한계를 훨 뛰어 넘었다. 할아방도 그러하

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사실 찾자면 셀 수도 없다. 그런 분들을 볼 때에 우

리는 인간의 한계를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 사회가 이 모양이냐?

요순의 태평성대가 왜 무너졌느냐? 왜 성인이 성인치도를 행하지 못하게 되느냐?

성자에 가까운 왕이 있어서 할아방이 묻는 말에 '다 그리할 수 있겠노라. 또 그

리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다 하여도 그게 다가 아이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인류 탄생 이래 언

제나 있었고 앞으로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해결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문제다.

그기 뭐겠노? 딱 짚이는 거 없나? 머리 속에서 팍 하고 오는 뭐가 없나?

그기 뭐냐? 바로 여자다. 협의로 말하면 남자의 배필인 마누라 문제다.

제 아무리 성인도 마누라 잘못 만나면 선정이고 치국이고 평천하고 간에 한마디

로 좆되분다. 요순까지 치다볼 일도 엄써. 소크라테스 함 봐바. 정관의 치라 했던

당나라의 전성기가 양귀비에 무너지고 천년 백제가 의자왕의 탕음에 쓰러지고 그

총명했던 공민왕이 노국공주에 혼을 뺏기붕께 5백년 고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은나라가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가 포사의 웃음에 망쪼가 들었어. 요순의

태평성대가 어이타가 무너졌냐? 천하의 덕 있는 자(성인)를 모셔서 선위하던 풍습

이 지 자식새끼한테 대물림하게 되면서 옛 이야기가 되 버렸어. 세습이란기 남자

들이 맹긴게 아니야. 그 어미가 지 아들한테 물려줄라고 지랄발광을 항께로 남자

가 그게 이길 수가 없능기야. 성인 정치 좋아하네. 태평성대? 그런건 엿이나 먹으

라 그래. 나는 그런건 잘 모리고 우짜든둥 내 배에서 낳은 내 아들넘이 댓빵이 되

는 꼴을 봐야 내가 눈을 감는다 말다. 내 아들넘을 놔두고 머시라? 성인을 모셔와?

그노무 성인이란 것들 내가 씨를 말려불텡께 함 델꼬 와봐. 이기 여자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어미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왜 일어났고, 연산군이 우짜다

가 미친갱이가 됐는지, 영조가 지 아들넘을 뒤주에 처넣어 죽이야 했던 이유가 무

엇이었는지 생각해 봐. 정치를 남자가 하고 역사를 남자가 맹긴 주 아나? 천만에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야. 여자가 용서해주고 느그럽게 봐줄 때 지가 성인이고 정

치가지 누구 맘대로 성인 행세를 한다 말이고? 여자 허락 안 받고 성인할 넘 여게

함 나와 바. 웃기는 짜장면들. 그기 너거 남잔게라.

여자? 탁 쥐어박으면 한주먹 꺼리도 안 될거 겉제? 그러나, 바뜨 여자 우습게 보

다가는 큰 코 다친다. 코보다 더 큰 것도 다칠 수 있다. 사흘 두리 마누라년 두들

겨 패봐. 그런다고 지 맘대로 될거 같애? 여게서 마누라 지 맘대로 하는 넘 있으면

손들어 봐바. 얼굴 함 보자. 천하는 지맘대로 해도 마누라는 절대로 지 맘대로 못

하능기야. 때리패고 밟아도 절대로 여자는 남자를 무서워하지 않아. 그리고 마음

속으로 대단하게 생각지도 않아. 패면 맞겄지마는 죽도록 맞고 울고불고 악을 쓰면

서도 '이 쓰발넘이 조오또 아인기, 힘만 세고 남자라꼬...' 이리 생각하능기 여자

다. 마누라 이기는 남자는 엄써. 여자한테는 이길랑가 몰라도 마누라는 못 이기.

마누라는 이길랑가 몰라도 지 새끼들 오마이는 절대로 못 이기. 여자는 남자를

지 뱃속에서 낳응께로 암만 잘난척하고 꼴갑을 떨어도 그기 다 지 오줌누는 구멍

으로 난 넘들이야. 그런 넘들이 잘나봐야 얼매나 잘 났겄어?

온 세상이 그 앞에서 겁을 내고 산천초목이 덜덜 떠는 영웅 호걸도 침대 안에서

발가벗고 여자 한테 기오면 그건 걍 털없는 짐승인게라. 그기 또 발가벗고 하는 짓

함 봐바. 얼매나 웃기노 말다. 그걸 노냥 보기 땜시 남편은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나이든 얼라 밖에 안되 부리. 그걸 잘 알기 때메 할아방이 '능무자호(能無雌乎)'

하고 처량한 소리를 하는게라. 그런 성인의 도를 행하는데 과연 배필없이 할 수 있

겠습니까?라고 묻는기야. 일단 왕한테 마누라가 있고 그 마누라 년이 낑기 들면 성

인이고 나발이고 만사 꽝되분다는 것을 할아방은 아능기야. 그래서 '배필없이 할

수 있갔시요?'하고 걱정스레 묻능기다. 그런거 보마 부처님은 참 머리가 좋다.

제일 먼저 마누라부터 떼불고 산으로 토켰응께네 말이다. 하모 여자를 옆에 끼고

득도나 수행이 가당키나 한 소리가? 그래서 부처님이 여자 거시기는 뱀의 아가리보

다 무서븐끼네 제발 가까이 가지 마라. 그 안에다 물건 처박는 순간 니는 수행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는걸 명심해라. 당부에 당부를 하신기다. 독신 출가가 다 이유가

있다. 남자가 성인이고 마누라가 구르미 같기만 하면 할아방의 성인정치가 안될 이

유가 없다. 그러나 잘난 남자가 현명한 여자 얻는거 봤나? 그기 세상일이다.

'능무자호(能無雌乎)?' '주공이시여,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라 할진데 그것을 위해 배필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사옵니까?' 하고 물응께네

왕이 뭐라 했겠노? 더 말하기도 싫었겠지. '원 별 또라이 같은 자슥 다 보겄네.

내가 여자도 없이 살 바에는 차라리 왕을 안 하고 말겄다. 자슥아.'하는 생각이 든

게야. 저런 택도 나발을 불다가 할아방이 우찌됐겠노? 삭탈관직, 봉고파직 당하고

쫓기난기야. 내가 왕이라도 쫓아내 부제. 저런 헛소리 나발을 부는 영감탱이를 머

하러 옆에 놔 둘끼고? 안 글나? 하지만 할아방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마누라

가 왕의 마누라로만 끝나면 문제삼지 않았으끼야. 여우같은기 옆에 붙어갖꼬 수작

을 해도 우찌 해 나가겄지. 하지만 문제는 그기 왕의 아들의 어미라는 데 있다.

세습에 대한 집착과 욕구는 어미의 그것이 아비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

고 성인정치와 세습제는 공존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할아방의 고민이 그것에 있었

다.


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

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能無雌乎?


그래서 할아방의 결론이 뭐였겠노? '조오또 이기 인간들 세상에서는 안되는기다.

될 수가 없는 일이여.' 고개를 쩔레 쩔레 흔들고 고마 산에 기드가가 신선이 되

붔다. 마음 잘 묵었제?

 

깨달음을 얻으려면 독신



곤충들이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 지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는데 근

자에 페로몬이라는 것이 발견되면서 그 비밀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한마리가 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같은 순간 수만마리의 동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페로몬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경 전달 물질과 마찬가지

이고 개개의 생명체로 보이는 곤충의 집단은 실제로 하나의 육신을 가진 거대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일부의 생물학자들은 갖고 있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떼는 사실 하나의 생명

체이고 낱낱의 개미는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 단위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생명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

이게 해 주는 것이 페로몬이란 신경조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곤충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

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수십억 인간은 실제로 하나의 유기체이며 이들

간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볼만한 여러 정

황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 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수천,수

만 킬로 떨어진 다른 대륙의 인간들 간에 마치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개념과 비슷한 단계의 문명이 건설되고 있었음

은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오늘날에도 놀랄만큼 유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동일한 연구가 세계의 여러곳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예가

많다. 물론 각자는 서로 어떠한 의견 교환이나 또는 자기 외의 사람이 같은 연구

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말이다. 한 인간의 진화는 전체 인류의 진화

를 선도하고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처 한 사람이 나오면 억

만 중생이 그 가피를 입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느냐하면 노자를 읽다 보면 부처의 말씀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감을 받

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와 중국은 지구와 달나라만큼 멀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힌두쿠시가 가로막은 두 대륙이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인종도 달랐다.

즉각적인 학문적 교류라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대다. 불교라는 것이 중

국에 알려지고 그것이 이해되는데 수 세기가 필요했다. 노자와 부처는 거의 동시

대 사람이다. 차이가 나봐야 불과 100년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세계관과 지향

점이 쌍동이처럼 닮아 있다. 그 가르침이란 것이 오십보 백보다. 팔만대장경을

5천 글자로 압축하면 <도덕경>이고 그것을 다시 290자 정도로 팍 줄여부면 <반야

심경>이 된다. 그것을 다시 81글자로 눌러버리면 그게 <천부경>이다. 이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깨달음'이고 두 글자로 맹길면 '성불'이고 한 글자로 바까부면

'도'다.

그런데 이 두 성인이 약속이나 한듯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가 옆에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처의 출가 권유나 할

아방의 '외기신'이 다른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 아이다. 바로 '여자가 무서버서 토

끼야 되겠다'는 거지 딴게 아이다. 물론 무서븐게 여자 자체는 아닐 수 있다. 그러

나 실 가는데 바늘 따라 온다고 여자가 옆에 있으면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따라 온

다. 멕여 살리는 문제, 줄줄이 생기는 자식들, 가족간의 갈등, 특히 도망가거나 피

할길 없는 잔소리와 바가지. 그게 치이다 보면 성인이고 나발이고 수행이고 자시고

간에 그 전에 진이 빠져서 빙시 되분다. 그러나 그게 여자 잘못이냐? 그렇다 하면

듣는 여자 섭하제. 여자 입장에서 보면 도를 딱네, 수행을 합네, 해탈을 합네, 현

빈에를 갑네 하는 소리는 마카 조오가튼 소리다. 배부른 넘들 지랄육갑 떠는 짓이

지 그기 무신 소용이고? 안 글나? 중요한 것은 우짜든둥 한넘이라도 더 퍼질러 낳

는거고, 낳은 새끼들 배 안 곪고 잘 키우는거고, 오늘 땟거리 안 떨어지게 하는 거

지 뭔 노무 말라 비틀어진 도고? 만약에 여자들 까지 말다. 머시마들이 고 지랄 떠

는데 휩쓸리가 천지분간도 못하고 씰데없는 짓이나 하고 앉았어 봐, 세상 버얼써

끝났어. 그나마 세상이 이 정도까지 온기 다 여자들 덕분인게라. 너거가 무신 지랄

염병을 떨어도 우리는 낳고 기르고 해 왔다는 야그야. 하느님이 인간을 맹길어 놓

고 남자를 보고 마음을 논기 아이야. 여자들이 있응께네 우찌 됐건 이것들이 이어

는 가겄지, 하고 돌아누버서 낮잠을 자능기야. 남자들만 있었어 봐바. 하느님이 불

안해서 잠을 못 자. 그래 생격먹은 것인게라. 그걸 앙께로 부처님이 그토록 여자들

의 출가를 허락치 않으려 했던 거다. 부처의 이모, 고모들이 따라댕김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쳐도 비구니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하려 했다. 물론 나중에는 못 이겨서 허락

하기는 했지만 여자의 본성과 그리고 모성의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이간에 두 할아방한테 여자는 거추장스러븐 방해물로 보인게지. 그래서 금욕을

합네, 독신을 합네, 출가를 합네 난리육갑을 떠능기다. 웃기제? 우리가 그리 겁나

나? 우리가 옆에 있으면 그래 아무 것도 못하겠더나? 할아방이나 부처는 '그래 너

거 옆에서는 일이 안 되부리'카고 토끼 부네. 하지만 괘안타. 세상에 남자가 할아

방하고 부처 뿐이가? 힘좋고 능력 있는 넘들 쌔고 쌘기라. 그래서 여자는 걱정할

끼 엄써.


부처나 예수나 노자 다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의 공통점이 뭐고? 여자가 없었다는 거다. 하늘의 문을 열기에는 쪼메 속물 같은

구석이 있지만도 마호메트는 참 난 넘이다. 돈 많은 과부 꼬시갖꼬 자식 새끼 줄줄

이 낳고 그게다가 처처처처첩 까지 꿰차고서 그런 일을 해냈응께 말다. 이런 넘이

잘난 넘이제. 세종대왕도 빠질 수 있나? 자식을 수십명 맹길고도 성군 소리를 들응

께 말다.

해서, 부처와 할아방은 성인의 길을 가는데 두 가지를 권하고 있다. 하나는 속세

간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하나는 독신이다. 배필을 데리고는 갈 수 없는 길이요,

자식 새끼들을 끌고는 못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다. 암만 위대한 인물도 색

에는 눈이 멀고 자식한테는 당달봉사가 되 분다. 도교의 도사들도 불교의 비구와

마찬가지로 독신자들이다. '능무자호?'에 '예.'라고 대답치 못하면 도사도 비구도

될 수 없다. 너거도 도 함 딱아볼래? '능무자호?' 


취직안한 할아방


이 장의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할아방의 가슴 저리는 애민지심에 울었고, 한편으

로는 할아방이 불쌍해서 울었다. 하기사 불쌍한 할아방이 오데 노자 뿐이가? 공자

할아방도 그러했고, 맹자 할아방도 그랬고, 달마 할아방도 그러했고, 예수 아자씨

도 마찬가지였어.

공자가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며 직장을 얻으러 다닐 때에 이 할아방이 재

주는 뛰어난 데 요령이 없어갖꼬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진게라. 위나라 영공이 공자

의 학식과 재주에 대해 소문을 듣고 불렀어. 공자는 혹시나 한자리 얻어 걸릴까 기

대를 갖꼬 면접을 보러 갔겄지. 면접관인 위영공이 구두로 문제를 출제했는디 그기

진법(陣法)이었능기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진법이 어떠하뇨?'하고 물응께 우

리 불쌍한 공쯔 할아방 뚜꺼비처럼 눈만 끔뻑끔뻑 하다가 쫓기나 붔어. 나중에 추

천했던 사람이 무색해 갖꼬 할아방을 잡고 그랬어. '아니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두루 통달하신 분이 그까짓 진법을 대답을 못하십니까?' 할아방 대답이 이

랬다는고야. '자고로 군자는 병(兵)을 거론치 않노라.' 할아방들이 이리 열푼수가

없어갖꼬 개나 고동이나 다 해묵는 재상 자리 하나 몬얻어서 평생을 비러 먹었다는

거 아니겠어? 맹자 할아방도 도낑데낑이야. 양나라 혜왕이 할아방을 불러다가 '과

인이 지금부터 조나라를 칠라카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함 말해봐 바.' 이랬거든.

그랑께 맹자 할아방이 답하기를 '옛날에 주의 태왕께옵서는 이웃나라가 처들어오

자 스스로 빈땅으로 물러갔나이다'캔기야. 이기 당췌 취직할 생각이 없는 넘들이

제? 당근 노자도 못 얻고 쫓기났제. 공맹 두 할아방의 청승맞은 꼬라지를 한탄하여

훗날에 사마천이 적기를 『이윤은 솥을 지는 요리사로서 탕왕을 격려하여 왕도를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百里奚)는 수레 밑에서 소를 먹이다가 목공(穆公)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하였다. 먼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다가 나중에 그들을 대도로 인도

하였다.』

물론 사마천이 공자하고 맹자 할아방보다 이윤이나 백리해가 윗길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대도를 걸은 할아방들을 칭송하는 글들이 사기의

곳곳에 보인다. 달마 할아방도 그랬어.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다음 양(梁)나라

무제(武帝)를 만난 자리에서 불법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소림사로 돌아가 십년

간 묵거에 들어갔어. 할아방들의 고상무비한 썰이 세상에 멕히지를 않았던 것이야.

'능무자호?'가 '계집은 다다익선'을 부르짖는 현세의 왕들한테 멕힐 리가 없제.

하지만 할아방들이 취직에 번번히 실패하고 백수로 살았다 하여 자기 신세를 한

탄했겠어? 대저 천하의 일이라는 것이 아침에 잠깐 풀잎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

과 같은 것이니, 천지의 장구함을 보는 성인군자가 어찌 발 밑의 이슬을 보겠노.

우리 노자 할아방인들 저런 소리가 멕힐거라고 생각하고 핸 소리는 아일끼야.

하지만 왕이 점점 심드렁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그래 마누라도 없이 살아라

이 말이제. 그 담은 뭐꼬?'하고 죄없는 지 코를 쑤시면서 물으니까. 할아방이 눈

치도 없이 말하기를 '生之畜之(생지축지)'라 캤어. 이 말이 무신 소리겠어? 왕이

이 소리를 듣고도 할아방을 살려보냈응께네 양나라 무제보다는 쪼께 열린 사람이

었던가봐. 글자 대가리 수 맞출라고 들어간 앞 뒤의 지(之) 자를 빼부면 생축(生

畜)이다. 많이 보던 단어 안 겉나? 뒤집으면 바로 '축생'이다. 중생 바로 밑이 축

생이고 그 아래가 아귀생이다. 업이 많아서 사람으로 못 태어난 서글픈 생명이 바

로 짐승들이고 그것을 축생이라 한다. 생지축(生之畜)은 '짐승으로 살아라'는 소리

다. 소나 개돼지처럼 살 수 있겠나이까? 하는 소리다. 이런 소리야말로 할아방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인간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고, 허기심(虛其心)하고

약기지(弱其志)하면서 오로지 실기복(實其服)하고 강기골(强其骨)하기만 하면 그

기 뭐겠노? 바로 '짐승'이다. 할아방 애기즉슨 꾸미고 자시고 할 것도 엄따. 글자

그대로 '짐승이 되라'는 소리다. 할아방은 염세를 넘어서서 인간혐오증이 좀 보인

다. 이런 대목을 보면 영악하게 지혜가 발달하고 욕심덩어리인 인간이란 것에 대

해 혐오를 느끼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할아방의 심정을 이

해한다. 나도 때때로는 인간이 싫을 때가 있다. 세상을 떠나 훨훨 자유롭게 구름

처럼 날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대화명만 구름이고 무늬만 구름이다. 아마도

할아방은 인지가 덜 발달해서 인간이라는 것이 두발로 걸어댕기는 짐승일 때가 차

라리 나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할아방의 시대로부터는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그런 시대였다. 우리가 조선 시대 생각하는 정도의 옛날이 바로 인간이 짐승

이나 별로 다르지 않던 시대다. 그랬던 것이 지혜가 생기고 영악해지면서 세상이

투쟁과 전쟁과 살륙이 판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왔다고 생각했을게다. 그래서 할

아방이 우리한테 말하기를 차라리 우둔했던 짐승의 시절로 돌아가자.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욕심도 없이 그저 배나 채우고 뼈나 튼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의 인간 살이가 그렇게도 참혹했던 것일까? 무엇이 우리 할아방으

로 하여금 짐승이 되라고 말하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할아방 죽은지 2천5백년이

지난 오늘날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인간은 할아방의 그 말에 '웃기지 마쇼'라고

말할 자격을 얻은 것일까? 인간은 과연 위대하게 변했을까? 인간은 짐승보다 낫다

고 말할 정도의 점수를 쌓아왔을까? 그 대답은 앞으로 자연이 인간에게 해 줄 것

이다. 자연이 그 대답을 하는 날 인간은 두려움에 떨어야 하리라.

 

전기치유

생각없이 풀이나 뜯게 만들었으면 성인이라 하는 것들도 같이 짐승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해결이 안된다고 본 것이야. 고로 어떻다?

바로 성인이란 소나 돼지 같은 넘이야. 똥구더기 우리 안에서 꿀꿀거리는 돼지

의 모습이 바로 성인인 것이야. 그런 할아방의 눈에 군자니 인이니 하는 나발을 불

고댕기는 인간들이 얼매나 가소로웠겄어. 그런 시시껄렁한 말장난 갖꼬 해결될 문

제가 아이라고 보능기야. 원초적인 상태,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나 짐승들의 그것

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이 할아

방의 확신이요, <도덕경>의 결론이야. 도덕이니 인이니 법이니 하는 것을 인간들에

게 가르치기 보다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라야 한다는 야그야. 그게 바로 영

아(孀兒)이고 축생(畜生)이야. 능영아호(能孀兒乎)? 능생축호(能生畜乎)? 라고 할

아방은 묻는다. 능히 어린아이가 되고 짐승이 될 수 있겠느냐?



 축지생지



노자를 알려면 모든 선입견과 편견과 지식을 버

리고 할아방과 벌거벗은 마음으로 마주앉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성인들이 해왔던

고상하고 우아한 구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상태에서 할아방이

하는 말을 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아방을 알 수 없다. 얄팍한 대글빡을

굴리가 지 멋대로 글자를 바꾸고 문장을 비틀고 뜻을 왜곡해서 구라를 풀어봐야 그

건 노자가 아이고 망구에 지 생각일 뿐이야. 마지막에 지(之) 자 하나는 네글자 운

을 맞추기 위한 목적과 강조의 뜻으로 보면 되는기다. 그런 어조사들에 씰데없이

매달릴 필요가 엄써. 생(生)과 축(畜) 두 개만 보면 되능기야.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말들을 다 떠올려봐. 그리고 이 장 내에서 앞뒤의 글들을 봐. 다른 해석이 나

올 수가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야.


장이부재

할아방은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못된 짐승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

도 하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큼 숭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은 없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할아방이 말하는 무위(無爲) 그 자체이다. 속일 줄도 모르

고 꾸밀 줄도 모르고 잔인하고 포악한 짓은 더더욱 할 줄 모른다. 인간도 어쩌면

인지가 덜 발달했던 옛날에는 다른 짐승들처럼 배고프면 먹고 때가 되면 짝짓기하

고 날이 저물면 동굴에 기드가서 잠을 잤던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 시절

의 인간은 그리 악한 존재가 아니었고 모든 인간이 다 성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할아방이 말하는 성인들을 만나기 어렵지는 않다.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조금 멀리 가는 기분은 들지마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나 자바 또

는 뉴질랜드의 오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성자들만 사는 원주민 마을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할아방이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했던 인간의 악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이 원래 그랬다. 애초부터 악하고 사악한 짐승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

게 변해왔느냐? 할아방은 그 이유를 인지(人知)의 발달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

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버린 인류는 자연계라는 실험실의 실수로 태어난 프

랑켄슈타인이다. 이게 할아방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그노무 지(知)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배나 채우면 되지 공부가 뭔 소

용이냐?라는 것이다. 알면 알 수록 많이 아는 자와 덜 아는 자의 차이가 생기고 이

것이 권력이 만들고 권력이 전쟁과 노예를 만든다. 그래서 불상현하라 말하는 거

다. 암만 많이 아는 넘도 지보다 더 많은 넘한테는 지고, 아무리 잘나도 지보다 더

잘난 넘이 있응께로 비참한 꼬라지를 겪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다 짐승들처럼

똑같이 모르는 상태로 가자는 거다. 에덴 공원의 아담과 이브가 달리 행복했던 것

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몰라서 행복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무엇인가 대글빡 속

에 땡하고 들어가면서 낙원은 사라졌다. 두발 짐승이 인간이란 것으로 둔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다음의 아담과 이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낙원에의

동경이 무엇이겠노? 바로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의 동경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

에 대한 회귀의 본능이다. 어린 아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쌔근쌔근 행복하게 잠든다. 그런 행복을 인류는 너무나 오랜 옛날에 잃

어 버렸다. 인간이 짐승들보다 나을거 같나? 그러나 짐승들이 인간보다 더 행복할

지 모른다. 철없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난다.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할아방은 어린아이와 짐

승들에게서 성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 나오는 장이부재(長而不

宰)를 말했을 것이다.

할아방이 앞에서 했던 말인 '생이불유,위이불시(生而不有,爲而不恃)'를 한번 더

말한 다음에 꺼낸 소리가 바로 '장이부재(長而不宰)'다. 생이불유,위시불시는 설명

한대로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 꾸미지 말라는 말

은 도덕경의 앞부분에 참으로 여러번 나온다.

여기서 내가 건너 뛴 한 구절을 함께 묶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천문개합,

능무자호' 다음에 '생지축지'가 나오기 전에 한 구절이 더 있다. 바로 '명백사달,

능무위호(明白四達,能無爲乎)?'란 말이다. 풀어 보면 '뜻을 명백하게 사방에 전하

는데 꾸밈이 없겠는가?'라는 말이 된다. 지도자가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온 천하

에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리되 그것에 꾸밈이나 거짓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는가?

라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을 상대로 '거짓 선전이나 기만하는 허위 나발

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려야 할 것은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것

이다. 그 담에 나온 소리가 바로 '생지축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소리가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이고 그리고 '장이부재,시위현덕

(長而不宰,是謂玄德)'이다. 이 전체를 아듬어서 보면 생지축지란 말을 '짐승들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명백하게 자기의 의사를 꾸밈없이 사방에 알리면서도 다스리지 않는 지도자가 되

는 현명함은 짐승들이 가장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방은 성인의 치도에

대한 모델을 요순이 아니라 짐승들에게서 본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짐승들은 자

기들 집단의 우두머리를 둔다. 사자를 한번 보까? 숫사자는 암사자들과 새끼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그런데 이 숫사자가 자기 영토와 식솔들을

다스리는 꼬라지를 함 봐바. 아무 것도 하는 짓이 없이 걍 빈둥거리. 나무 밑에서

낮잠이나 자고 한번씩 암사자들이 와서 꼬랑지를 흔들면 그거 한번씩 해주고 그기

다야. 사냥도 안하고 일도 안해. 어쩌다가 마지 못해 영토 내를 한번씩 둘러보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나 숫사자가 한번 크게 울면 사바나 전체의 동물들이 숨을 죽

여. 그래서 백수의 왕이라 그래. 그게 바로 명백사달이야. 뒤에서 할아방이 하는

말이 있어. 태상은 하지유지라고. 가장 좋은 우두머리는 아랫사람들이 있다는 것

만 알고 있는 자라고. 숫사자가 그래. 아무 일도 안하고 암사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지만 숫사자가 하릴없이 나무 밑에서 뒹굴면서 낮잠이나 자고 게을러터져서 사

냥도 안하지만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바나 전체가 사자의 집단에 복종을 하는

것이고 어떤 다른 짐승들도 사자를 우습게 보지 못해. 그리고 암사자들은 그가 있

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새끼들을 키우는게야. 이게 성인치도의 모델이야.

코끼리도 마찬가지야. 늙은 숫코끼리 한마리가 수백 수천 마리의 대가족을 거느

리고 살지만 암만 카메라를 숨겨놓고 여러 달을 관찰해도 그 우두머리 코끼리가

특별히 통치 행위를 하는기 엄써. 그저 우두머리라고 있을 뿐이고 모든 코끼리 집

단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야. 그러나 초원에 가뭄이 들면 우두머리 코끼리의

명령일하에 수천마리의 코끼리 떼가 수백 킬로의 행군을 하는 것이야. 새끼 코끼리

한마리조차도 우두머리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법이 엄써. 이것이 바로 장이부재

요, 명백사달이야. 그게 비하면 울나라 대통령들 통치라고 하는 꼬라지 함 봐바.

테레비, 라디오, 신문, 잡지 온갖 것들을 총동원해서 국민들 정신이 혼란하도록

광고나발을 불어도 국민들이 그 말을 믿지를 않아. '능무위'를 못하기 때문이고

'명백사달'이 안되기 때문이야. 그랑께네 장이부재는 꿈도 못꾸고 각 부처의 국장

들이나 신경쓸 일을 대통령이 직접 챙긴답시고 나서서 설치고 오도방정을 떨어도

나라가 안 되능게라. 이게 전부 뭐 때문이겠노? 그 말에 '위'가 많기 때문이야.

인간이 과연 사다 코끼리보다 나은 동물이가?

다음 회에는 '장이부재'하다가 나라 망하게 할 뻔한 어떤 왜넘 이야기를 해주께.

 

왜넘 이야기



'長而不宰(장이부재)'는 '다스리지 않는 우두머리(長)'라는 말이다. 이 말을 보

더라도 10장은 '지도자의 성인지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짐

승들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다스림이란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할

아방은 보고 있다. 천지가 만물을 위추구하듯이 백성들을 간섭치 말고, 더 잘 살

게 해주겠다고 나서서 깝죽거리지 말고 그냥 가만 있으라는 얘기다. 그러나 할아

방의 말은 모두 이면이 있다. 반드시 그 말의 전제가 따라 붙는다. 다스린다는 행

위가 없다는 것이 방치나 유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재영백포일'하고 '척제현

람'하며, '애민치국'하여 '천문개합'하고 '무위'로 '명백사달'함으로서 백성들이

'무지무욕'하고 '실기복 강기골'해서 부쟁무우(不爭無憂)한 상태라야 하는 것은 당

연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

할아방의 '장이부재'를 성인도 아인기 실천할라고 들면 우찌 되느냐? 앞에서 말

했던 어떤 왜넘 꼬라지가 되분다. 할아방의 장이부재를 제도로써 제법 써먹은 넘들

이 사실 잔나비들이다. 하지만 쪽바리들의 천황이라는 것은 장이부재하는 성인이

아니라 그냥 핫바지고 허수아비다. 그러다가 반짝 메이지가 제대로 일을 했고, 그

담 히로히또는 역시 등신이 되 붔다. 에도 바쿠후의 역대 쇼오꾼이라는 것도 그런

전통에 휩쓸리면서 정신박약아 내지 미친갱이들 내지 유치찬란한 넘들의 씨리즈로

이어졌다. 일마들은 대가리를 허수아비로 앉차놓고 장이부재를 실천하면서 밑에 놈

들이 다 해먹는 묘한 전통이 있다. 그래서 웃대가리는 바보라도 좋고 등신이라도

좋고 인형처럼 아랫 놈들이 입혀주는 의관이나 제대로 입고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

면 되능거다. 쪽바리들이 제일 이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는 '절받는 인형'이다.

그리고 그 인형 앞에서 절은 열심히 한다. 이런 습성은 메이지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당시 게다군의 편성은 등신 같은 총대장에 똑똑한 참모들로 맹길었다.

러일전쟁 때 만주의 일본군 총대장은 오야마 이와오란 넘이고 그 밑에 참모장이

고다마 겐따로다. 오야마는 참모회의 할 때 한마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나라에서 주는 봉급을 받아묵을 수 있었다. 작전은 고다마가 다

짰다. 다행히 이넘이 근대 일본 육군에서 난 넘이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버거운

싸움에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등신같은 총대장에 빙시같은 참모가 붙으

면 우찌 되냐? 여순에서의 노기 꼬라지가 나 분다. 노기 마레스께도 오야마하고

마찬가지로 회의 때 앉아있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할줄 몰랐던 넘이다. 그런데

참모장인 이지치라는 넘이 말하자면 멍부다. 이넘이 얼마나 황당한 돌대가린지 작

전이라는기 '도스께끼'밖에 몰랐어. 한번 돌격에 만명에서 만오천명 정도 잔나비

새끼들이 죽어 나갔어. 여순은 잔나비들의 지옥으로 변했어. 고지마다 산마다 잔

나비들 시체가 산처럼 쌓여서 뒤덮였는데도 노기 일마는 백마타고 돌아댕김서 한

시나 짓고 자빠졌어. 여순 전투가 한달만 더 끌었더라면 근대 일본은 서기도 전에

무너졌을 거야. 나라 전체를 망국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간 것이 노기란 넘하고 이

지치란 넘이다. 하지만 이런 '장이부재' 스타일의 조직이 대단히 효율적이고 이상

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보여준 것이 왜넘들인 것은 틀림없다. 해군에서 보

면 도오고오 헤이하찌로가 육군의 오오야마 이와오고 아키야마 사네유키란 넘이

고다마 겐타로다. 이 콤비는 환상적이어서 여순과 대마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극

동함대와 발틱함대를 깨부수고 일본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야마나 도오고오는 '장

이부재'하면서도 '명백사달'할 줄 알았던 넘이고, 노기는 그냥 등신일 뿐이야.

그 도오고오가 쓰시마 해전이 끝난 다음에 세계 각국의 기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질문을 받는데 '해군 역사상 누가 가장 위대한 제독이라고 생각하십니까?'항께로

'영국의 넬슨이야 감히 내가 견주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제가 신발에 끈을

맬 자격도 없소이다'캤어. 이건 낭설이 아니고 실제 그대로의 이야기야. 우리나

라 사람들이 박통 이전에는 이순신 장군 잘 몰랐어. 하지만 잔나비들은 이순신 장

군을 바다의 군신으로 생각해 왔다 말이지. 장군들 뿐만 아니라 쫄병들까지 러일

전쟁 당시에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심지어 쓰시마 해전을 앞두고 진해만에서 일본

의 연합함대가 출격을 할 때 쫄병으로 배에 타고 있었던 한 왜넘이 수기를 남겼

는데 '마음 속으로 이순신 장군님께 함대의 가호를 빌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야.

참 이순신 장군이 까무라칠 일이다마는 '장이부재'하고 '명백사달'할 수 있었던

성인의 모델로 손색이 없는 분이 이순신 장군이다. 세계의 전사에 그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한 분이다. 이건 어떤 잔나비 군사학자의 말이다. 쓸만한 배 한 척이 없

어도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왜넘들이 벌벌 떨었고,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백성들이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다시 보고 싶다.

'장이부재,명백사달'이란 말을 보면서 생각난 이야기를 조금 주절거렸다.

다음 회에서 10장의 원문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 다음으로 가자.

 
10장 전체 번역


제 10장은 '시위현덕(是謂玄德)'이란 마지막 말로 끝난다. '그리하면 그것이야

말로 한량없이 높고 지극한 덕일 것이옵니다'이다. '현(玄)'은 앞뒤의 내용에 따

라 그 해석이 수없이 달라질 수 있는 글자이니 뜻과 같이 글자도 가물한 넘이다.

현빈이라 할 때는 '신비롭고 기묘한 계곡'이라 말할 수 있고, 현덕이라 쓰면

'가이없이 지극한'으로 읽을 수도 있고 '현람'이라 할 때는 '어둡고 컴컴한 곳을

본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런 말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덕'은

열반이나 성불과 같은 소리다. 그냥 그대로 '현덕이라 합니다'라고 읽고 '현덕'

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는 기 좋겠다. 왜냐 하면 '열반'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뜻을 풀어서 쓸려고 하면 엄청 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덕'도 풀

어서 쓰면 작문이 되지 그게 단어가 안 되분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걍 '현덕이

라 한다'고 읽고 '지극히 높은 덕을 일컬는 이름'이구나 생각하면 된다.

10장을 마감하면서 내가 할아방의 말씀을 한번 요약해 봤다. 그대로가

구름의 인생철학이고 좌우명이다.


무욕무적(無慾無敵) ☜ 욕심이 없으면 적이 없고

무지무우(無知無憂) ☜ 아는게 없으면 걱정이 없고

부쟁불패(不爭不敗) ☜ 싸우지 않으면 질 일도 없다.

그런데 와이 구름은 이리 적이 많고 싸울 일이 많노?


載營魄抱一,能無離乎,專氣致柔,能孀兒乎,滌除玄覽,能無疵乎,愛民治國,能無知乎,

재영백포일,능무리호,전기치유,능영아호,척제현람,능무자호,애민치국,능무지호,

天門開闔,能無雌乎,明白四達,能無爲乎,生之畜之,生而不有,爲而不恃,長而不宰,

천문개합,능무자호,명백사달,능무위호,생지축지,생이불유,위이불시,장이부재,

是謂玄德

시위현덕



온나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의 기운을 오로지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들의 섬돌(또는 마당)을 손수 딱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 아픈 곳을 없이해 줄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지(知)에 의존치 않고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도를 행하는 데 있어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분명하고도 밝게 뜻을 온 천하에 전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없는 듯이 살며,

꾸밈에 의존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면서도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玄德'이라 하는도다. 


수레발통 이야기


이제 제11장이다. 이 장도 대단히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이다. 첫줄부터 함 보자.


三十輻共一 ,當其無有車之用

삼십복공일곡,당기무유거지용


역시 할아방은 문학적 재능이 대단한 사람이다. 글에 감칠맛이 있다. 단 몇 글자

로 상당히 깊고 넓은 사변을 펼쳐 보인다. 한자라는 문자가 아니면 역시 불가능한

문화적 유산이다. 다음 기회에 참 그윽하고 향기로운 문체와 아름답고 심오한 사유

로서 할아방이 가 있던 그 경계를 벗님들과 함께 소요해볼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

한다.

'복(輻)'은 바퀴의 살을 말한다. 그리고 '곡(이기 또 새롬에서 한자가 안 찍힌

다)'은 바퀴의 축에 끼우는 살통이다. 그래서 '삼십복공일곡(三十輻共一 )'의 뜻은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하나의 살통에 모인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기무유거지용

(當其無有車智之用)'은 '(무엇이) 없는 것에서 차의 쓰임새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 무엇인가가 되겠다. 힌트는 서른

개의 바퀴살과 그것이 하나로 모이는 통이다. 바퀴는 여기에 바깥쪽 테(요즘 자동

차로 치면 타이어)를 합해 세 가지로 구성되는 물건이다. 여기에서 '그것'이 없어

야 바퀴가 제 구실을 해서 차가 굴러갈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물론 바퀴

살통은 그 속이 비어있어야 축을 끼울 수가 있다. 그러나 축이

끼워진 살통의 속은 이미 빈 것이 축이 속을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은 무가 차의

쓰임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를 채운 것에서 차의 쓰임이 생기는 원리의 예가

된다.

차의 쓰임을 불러오는 바퀴의 무(無)에 대한 답을 찾는데는 한자 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차(車)'라는 것의 역사를 생각해볼 줄 아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야 바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지마는

고대에 있어서 바퀴의 발명은 20세기의 인공 위성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잉카인들은 수 천년의 역사

를 가지고도 바퀴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車)라는 것이 만들어지던 고대의 역

사에서 '무엇'으로 해서 차가 구실을 못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처음에 인류가 구를대의 효용성을 알게 된 것은 무거운 돌을 나를 때 그 밑에 나

무를 받쳤던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무 기둥들이 굴러줌으로써 돌은 쉽게 움

직여 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퀴로 발전했던 것인데, 인류가 제대로 된 바퀴를 만드

는데는 실로 일만 년의 세월이 걸렸다. 바퀴를 만드는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을

까? 무엇이 고대의 인류를 그토록 고심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바퀴의 강도

와 무게, 그리고 회전성(回轉性)이라는 세 가지 문제였다. 차라는 것은 무거운 것

을 싣고 나르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퀴는 차의 하중에 견딜 수 있어야

하고, 무게가 가벼워야 하고 가능한 한 완전한 원형이 되어야 하는 세 가지가 충족

되어야만 한다. 고대인들이 처음에 만들었던 바퀴는 통짜 바퀴였다. 나무판자를 덧

대어 가장자리를 원형으로 잘라서 이것을 축에다 끼워 넣은 형태였다. 즉, 바퀴 테

와 바퀴 살 부분의 구분이 없는 두꺼운 디스크였던 것이다. 전체가 이렇게 통 나무

판이다 보니 무게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중에 견디는 힘은 충분치가 못했다.

바퀴가 찌그러졌던 것이고 테두리가 손상되었을 경우에 바퀴 전체를 못쓰게 되었

다. 좀더 고대에는 나무를 가공하는 기술의 부족으로 이 디스크를 돌로 만든 시대

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바퀴 하나를 제작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

력이 필요했을까는 쉬이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힘들게 만든 바퀴가

제대로 굴러주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낙담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바로 바퀴의 살을 모아서 지지해 주는 바퀴 살통과 바퀴

테 사이를 빈 공간으로 두어 그 사이를 똑 같은 길이의 바퀴 살 여러 개로 받친다

는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살통과 바퀴 테 사이를 비게 한다

는, 즉 무(無, 빔)의 효용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쉽게 굴러가는 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차의 쓰임이 무(無)에 있다'고 한 노자의 말은 바로 이 테와 살통의 사이

를 살이 받치고 있는 빈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기술적 측면과 차의 발달사

에 대한 고찰이 있을 때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이

정확한 지적이다. 그래서 인류를 괴롭혔던 바퀴의 세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것이다. 가벼워졌고, 튼튼해졌으며, 원형의 구현이 쉬워져 잘 구르는 바퀴가 탄생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차의 쓰임새를 가져왔다. 또 다른 문제들인 바퀴 축에 살

통을 끼워 고정시키는 방법과 회전 마찰력을 줄이는 기술, 그리고 축의 설치(차대

와 축의 연결) 등도 난제였지만 그런 것들은 바퀴의 완성 다음의 문제들이었다.


할아방은 해괴한 관심을 갖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명확하고

정확한 비유도 못 알아먹으니까 해괴하게 보이고, 쉽고 분명한 말도 이해를 못하니

까 어려운 것이다. 인류가 차(車)라는 이기(利器)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바퀴살통과 바퀴 테 사이의 공간을 발견한 다음부터다. 이것을 노자는 당기무(當其

無)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모든 차량의 바퀴는 테와 축 사이를 메워 버린 디스크

형태로 만들지 않는다. 디스크에 구멍을 뚫어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훨씬 하중에

잘 견디기 때문이다. 경주용 자전거 중에는 디스크형 바퀴를 많이 쓴다. 그 이유는

공기의 저항을 덜 받고 알미늄이라는 가벼우면서도 강한 재료를 쓸 수 있기 때문이

고 잘 딱아놓은 아스팔트 경주로 위에서만 달리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런 디스크형 바퀴는 빈 공간을 살로 받친 바퀴보다 훨씬 약해서 비포장 도

로를 무거운 짐을 싣고 달리면 짜부러지거나 깨진다. 접지면의 충격이나 하중이 축

의 한 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디스크 전체에 분산되기 때문이다. 노자는 2천년 전

의 사상가이지만 이 정도로 기술공학적인 부분에도 정치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빈 그릇, 빈 방

수레라는 것은 인간이 바퀴의 살통과 바깥 테두리 사이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었

을 때 비로소 유용성을 갖게 되었다. 바퀴가 디스크처럼 꽉 차 있는 형태일 때는

결코 이용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 수레였던 것이다. 때문에 바퀴의 살이 지나가는

그 빈 공간이야 말로 수레의 유용성을 있게 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직관과 관찰력

에서 나온 말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 추론능력이다. 사물

에 대해서 유추하고 논거를 들어 자신을 직관을 설명해 가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덧붙여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추론의 과정에 끌어오는 비유이다. 상황과 논지에

적합하고 어울리는 비유를 가져오는 능력이 없으면 나무없이 집짓자고 덤비는 목수

다. 무와 허의 효용을 설명하는데 할아방이 드는 비유들을 함 봐바. 참 기가 멕혀.

'수레의 용은 바퀴의 빔에 있다.' 이렇게 절묘한 비유를 들어도 못알아 먹으면

소용이 없는게라. 그 담의 비유도 함 보까?


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

연치이위기,당기무유기지용


도자기 만들 때 '흙을 빚어 이기는 작업'이 '연치'다

'흙을 이기고 빚는 작업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릇을 빚기 위해 흙을 이기는데, 그릇의 쓰임은 그 속이 빈데 있다.'라는 뜻이

다. 차의 쓰임이 바퀴의 빈 공간에서 나오듯이 그릇의 쓰임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나온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도 비슷한 맥락의 것이다.


鑿戶爽以爲室,當其無有室之用

착호유이위실,당기무유실지용



'철학'이란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처럼 정확하고 과학처럼

치밀해야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문장 하

나 글자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특히 고전의 번역에 있어서는

글자 하나를 살피는 데도 대충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호(戶)'라는 글자는 '여

닫이문의 반쪽'이 아니라 '외쪽문'이다. 어엿한 문의 한 종류이지 문의 반쪽이 아

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방문들은 전부다 문(門)이 아닌 호(戶)이다. 방을 만드는

데 문(門)을 달아서야 될 일인가? 물론 고관대작이나 대학자의 저택이라면 방마다

문(門)을 낼 수도 있겠지만 구름 같은 서민의 집들은 대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

고 '착(鑿)'이란 글자 하나만의 의미는 '뚫거나 관통하여 열다'가 된다. 영어로 하면

'opening' 또는 'drilling'이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라는 뜻이다.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방의 쓰임은 바로 방의 빈 공간에서 나온다'라

는 이 구절의 뜻은 어려울 것이 없다. 문제는 왜 할아방이 자꾸 되풀이 무(無)와

허(虛)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 회에 그것을 알아 보자.


무지이위용


바퀴 살을 모아 바퀴를 만들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고, 문을 뚫어 창을 냄으

로서 방이 생긴다. 그런데 수레와 그릇과 방의 쓰임을 만드는 것은 바퀴와 흙과

창의 빔에서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은 수레의 짐싣는 칸이고, 그릇

의 담을 수 있는 공간이고, 방의 내부이다. 이것이 할아방이 말하는 '용(用)'이다.

할아방의 글을 잘못 읽으면 전체 맥락이 이상해 진다. 바퀴의 빔(살통과 바퀴 테

사이의 공간)은 무(無)이고, 수레의 빔은 용(用)이다. 진흙의 빔(주물러서 비게 만

들 수 있는 성질)은 무(無)이고, 그릇의 빔은 용(用)이다. 창의 빔(뚫어 놓은 상태)은

무(無)이고 방의 빔은 용(用)이다. 그래서 용(用)은 무(無)에서 나온다는 말들

이다. 그러나 바뜨 할아방이 결코 무(無) 이퀄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퀴가 수레인 것이 아니고, 찰흙이 그릇인 것이 아니고, 창이 곧 방인 것도 아

니다. 바퀴는 수레와 떨어져 있을 때는 무용지물이고 빚기 전의 찰흙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며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방이란 것에 뚫려있지 않을 때의 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수레는 바퀴가 없으면 구를 수 없고, 그릇은 모양을

잡지 않으면 그릇이 아니고, 방은 뚫려져 있지 않으면 막힌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상자 밑에 발통을 달아야 수레가 되고 찰흙을 눌러서 움푹하게 만들어야 그릇이

나오고 사방을 막아 놓은 박스에 문이란 구멍이 생겼을 때 비로소 방이 된다.

그래서 할아방이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보이는 것이야

말로 눈에 보이는 쓰임을 만들어내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라는 소리다.

때문에 어떻게 해라? 바로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수레가 되지 말고 바퀴

가 되고, 그릇이 되지 말고 주무르는 대로 모양이 잡히는 찰흙이 되고, 삐까번쩍

한 방이 되지 말고 그저 뚫려있는 구멍이 되라는 소리다. 이게 다 앞에서 줄창 해

온 소리들, '없는 듯이 살아라(生而不有)', '몸을 사람들의 뒤에 두라(後其身)',

'그저 비어있을 뿐 쓰이지 않는다(虛而不屈,用之不勤)',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不自生) 등등등... 계속 해 온 소리가 다 그 소리야.

용(用)이 아니라 용(用)을 낳는 무(無)가 되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성인의 삶이

요, 천지의 본연이고, 도의 실천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름도 역시 수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릇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방

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엄따. 횅 비어있는 바퀴로 살고, 찰흙이면 만족하고, 뻥 뚫

려있는 문이면 좋다는 그런 생각으로 산다. 이 글도 그런 생각으로 쓰는거다. 나는

내 글이 세상에 무슨 도움을 주고, 노자 해석에 새로움을 더하고 이런 생각같은건

갖고 있지도 않아. 내 글이 세상에 눈꼽재기만한 용(用)을 가져온다 해도 그건 나

하고는 별로 관계없는 얘기야. 이래 말항께네 구르미 이퀄은 성인이다카는 결론이

나와부네. 역시 결론은 버킹검이네. 나도 누구 닮아가는 갑다. 다음 구절 함 보까?


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리,무지이위용


'그러함으로, 있음(有)으로부터 이로움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없음(無)으로써 쓰

임새(用)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의 위(爲)는 드물게도 글자의 뜻인

'만들다, 지어내다'가 원 뜻 그대로 쓰이고 있다. 할아방의 말을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나 해설서를 보면 할아방이 용(用)을 낳는 무(無)의 예

로서 들어논 것들과 용(用)의 실체인 유(有)를 구분치 못하고 있어. 그래서 이 11

장의 해석을 보면 바퀴와 수레, 찰흙과 그릇, 문과 방이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우왕

좌왕이야.
 

11장 번역


11장의 전문을 한번 보고 넘어 가자.



三十輻共一 ,當其無有車之用, 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鑿戶爽以爲室,

삼십복공일곡,당기무유거지용,연치이위기,당기무유기지용,착호유이위실,

當其無有室之用,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당기무유실지용,고유지이유리,무지이위용



서른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살통으로 모아 바퀴를 만든다.

바퀴의 살들이 만든 빈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바퀴가 능히 수레를 지고 돌 수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찰흙이 움푹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찰흙이 만든 빔으로부터

그릇의 쓰임이 나온다.

벽을 뚫어 문(창)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문이 뚫려져 있기 때문에

방으로서의 쓰임이 가능하다.

그러함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이로움을 얻게되는 이유는

없는 것으로부터 쓰임새(用)가 나오기 때문이다.
 

12장


전체의 원문을 먼저 올려놓고 이야기하자.


五色令人盲目

오색영인맹목

五音令人耳聾

오음영인이농

五味令人口爽

오미영인구상

馳騁 獵令人心發狂

치빙전렵영인심발광

難得之貨令人行妨

난득지화영인행방


오행론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이 된 것은 주말진초(周末秦初)이지만 저런 말이 학술이나 어

떤 이론적 체계가 아닌 단편적인 수식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옛날부터야.

어쩌면 노자 할아방이 옛날이라 부르던 까마득한 시절부터 사람 손구락이 다섯개

라서 그런지 때국넘들은 사물을 다섯으로 나누고 자빠졌는 지도 몰라. 문헌상으로

확인 가능한 범주 내에서 추측을 해도 할아방 시대에는 이미 일상적으로 쓰이던 말

로 볼 수가 있어.

'五行'이란 말이 문헌상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공다 노자 할아방들한테도

까마득한 옛날 책이 되는 <상서(尙書)>의 <감서(甘誓)>편이야. 하(夏)나라가 유호

씨를 정벌할 때 '유호씨는 오행(五行)을 업신여기고 삼정(三政)을 태만히 했으므

로 정벌했다'는 <감서>의 기록이 그것이제. 이 때의 오행은 물론 훗날 음양가들이

말하는 오행의 의미와는 달라서 고대 인도의 사대(四大)처럼 자연을 이루는 기본적

인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 것으로 보면 되지. <감서>의 다음으로 오행이 나오는 책

은<서경>의 한편인 <홍범(洪範)>이 있어. <홍범>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

라를 멸한 다음에 은나라의 귀족이었던 기자(箕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천도(天道

)를 물은 데 대해서 기자가 답한 것을 기록했다는 책이야. 이때 기자가 무왕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로서 전해준 것이 하늘이 우왕에게 내려주었다는 대법(大法)

인 '홍범구주(洪範九疇)'였는데, <홍범>은 아홉 가지 조목으로 되어 있어서 구주라

고 해. 그 구주의 첫 번째가 바로 오행(五行)이야. <홍범>의 내용으로 보면 오행의

개념이 하나라 시대인 우왕(禹王)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지만 <홍범>은 후

대의 전국시대에 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참고삼아 말하면 <홍범>

에서 다섯으로 나눈 것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오기(五紀), 오복(五福), 서징(瑞徵)의 다섯 가지이고 팔

정(八政), 삼덕(三德), 황극(皇極), 육극(六剋) 등은 다섯이 아닌 수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홍범> 당시만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섯으로 나누어 오행에 집어 넣는

다는 관념은 희박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런 오행 배정이 유행했던 것은 훗날인 진한

시대 이후인 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이미 <상서정의(尙書正義)>에 노자 할아방이

말하고 있는 오미(五味)의 정의가 나오고 있어.


『물의 정의는 본래 단 것이지만 오랫동안 땅 속에 젖어들어 있으면 변하여 소금

이 된다. 소금의 맛은 짜다. 불의 성질은 위로 타오르는 것인데 물건을 태우면 탄

내가 난다. 탄내는 쓴 기운이다.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그 맛은 대개 시다. 쇠가

불에 녹을 때는 비릿한 냄새가 난다. 그 맛이 매운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매운 맛

의 기운이 금이다. 단 맛은 모든 곡식에서 나온다. 곡식은 땅이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맛이 토의 맛이 된다.』


이와 같은 문헌을 통해서 볼 때 오행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공자와 노

자 이전인 서주(西周) 시대부터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야. 그리고 오행설이 하

나의 체계화된 학설로서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제(濟)나라 사람인 추연(騶衍)의 오

덕종시설(五德終始說)부터로 보는 것이고.

할아방 시대에 공자 맹자보다 오히려 끗발을 날린건 추연이었고, 공자 할아방

의 구라나 노자 할아방의 썰보다 더 인기 캡이었던 것이 추연의 학설이었어. 천하

의 덕망있는 재사들을 모아서 대우하던 춘추전국시대의 풍조는 제나라도 예외가 아

니어서 제선왕(齊宣王) 대에 특히 극성해서 제선왕은 추연을 상대부(上大夫)로 삼

아 저택과 노복을 하사하고 학문을 가르치게 할 정도였어.같은 시기에 추연과 함께

나라에서 저택을 하사 받으며 학문을 한 이는 순우곤(淳于곤), 전병(田騈), 접여(

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등 76명에 달했고 환연은 앞서 말했다시피 초나라

사람으로 노자의 제자라 말해지는 사람이야. 황노학이 제나라에서 태동하게 만든

사람이 이 환연이야. 제나라가 천하 각국의 현인, 재사들을 모아서 학문과 토론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든 기관을 직하라 했고 이곳의 학자들을 '직하학사'라 불렀는

데, 맹자와 순자 그리고 장자까지도 직하에서 공부하였고 순자는 직하의 좨주(祭

酒 : 직하학사의 우두머리)를 세 번이나 역임했어. 성시 때의 직하는 수천 명의 학

사들이 운집한 근대의 학술 아카데미와 같은 곳이었고 조선 세종 시대의 집현전이

이 바로 이 직하를 본뜬 것이었어. 직하학사의 한사람이었던 추연은 그 학설의 진

가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당대의 대우는 공자를 훨씬 능가했던 것이 사실이야.

사마천이 <사기>에서 추연과 공자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보면,


『추연이 양나라에 도착하였을 때에 혜왕(惠王)은 교외에서 영접하여 귀빈을 대

하는 예를 베풀었다. 조나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평원군(平原君)이 곁에서 걸었

고, 자리의 먼지를 털어 주었다. 연나라에 갔을 때에는 소왕(昭王)이 길을 쓸면서

앞서서 걸었고, 제자가 되어서 수업을 받기를 청하였다. 또 소왕은 갈석궁(碣石宮)

을 지어 주었으며, 몸소 그리로 가서 추연에게 사사하였다. 그 때 추연은 <주운(主

運)>을 지어 주었다. 그가 제후에게 유력하면서 받은 존경이 이와 같았으니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배를 곯고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란을 당한 것

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오덕종시설을 설한 추연이 공노 할아방들과 거의 동시대 인물임을 감안하면 오미,

오색, 오음 등은 노자 할아방 당시에 흔히 쓰던 말들임을 알 수가 있어.

 

오행설



오행설은 노자와 동시대 사람인 추자의 오덕종시설에서 하나의 학설로서 체계를

갖추게 되지만 아직 음양과 오행이 결합되지는 못하였고, 음양사상과 오행학설이

서로 결합되는 것은 전국시대 말에서 진초(秦初)에 이르는 시기의<춘추좌씨전>과

<여씨춘추>부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행(五行)에 따른 사물의 분류가 노자 당

시에 성행했음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은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특히 <도덕

경>의 이 구절과 완전히 똑같은 내용이 보이는 문헌이 있는 것이다. <춘추좌씨전>

의 <소공(召公) 25년>에 정나라의 자태숙(子太叔)이 진(晉)나라의 조간자(趙簡子)

가 예(禮)에 대해 질문한 것에 답을 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선대부(先大夫) 자산(子産)에게서 들으니 "예는 하늘의 일정한 도이고 땅

의 의로움이어서 백성들이 실로 본받는 바이다. 하늘의 밝음을 본받고 땅의 성품을

따라서 육기를 낳고 오행을 사용하는데, 기(氣)는 오미(五味 : 신맛·짠맛·매운맛

·쓴맛·단맛)가 되고, 색으로 발하여서는 오색(五色 : 청색·황색·적색·백색·

흑색)이 되며 소리로 나타나서는 오성(五聲 : 궁·상·각·치·우)이 된다. 그것이

지나치면 혼란하게 되니 백성들이 그 성품을 잃는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 자산은 공자의 선배이므로 공자 이전에도 오행 분류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근거가 될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춘추좌씨전>의 이 부분이 이 장

에 나오는 노자의 말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미(五味)와

오색(五色)과 오성(五聲)이 지나치면 혼란하게 되니 백성들이 그 성품을 잃는다고

들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자태숙의 선대부인 자산이 한 말은 바로 노자의 말인

것이다. 아니면 노자가 자산이 한 말을 <도덕경>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 <춘추좌

씨전>의 기록이 맞다면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유추할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

>에 나오는 말들이 순수한 할아방의 오리지널 창작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이나 학설

의 일부가 수용되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한가지는 초나라 사람인 할아방의 어록이

당대에 이미 중원 널리 알려져 있었을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색(五色)'은 '흑백적청황(黑白赤靑黃)'의 다섯 가지 원색(原色)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오색의 의미는 비단 '색'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란 의미다. 협의로 여색(女色)에 한정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물론 연극

이나 춤구경 같은 것들도 포함될 수 있겠다. '오미(五味)'는 '인간의 혀를 즐겁게

하는 음식들'을 말한다. 이 오색(五色)과 오미(五味)의 두 가지를 합하여 말하면

주색(酒色)이 된다. 주색잡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음악이다. 그래

서 오음(五音)이 함께 나오고 있다. 즉 오색과 오성과 오미는 '인간의 눈과 귀와

혀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란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바로 향락(享樂)이다. 이것

을 '온갖 색','온갖 소리','온갖 맛'으로 번역하면 노자의 본의와는 사뭇 동떨어진

말이 되 버린다. 할아방의 말 뜻은 '모든 사물을 보지도 말고, 아무런 소리도 듣지

말고, 어떤 맛도 느끼지 말고 살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과 귀와 혀를 사

로잡는 향락의 탐닉'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이다. 이런 향락에의 추구가 경계와 절

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은가 보다. 또한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도덕률이기도 하다. <도덕경>이 도교라는 종교의 경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은 금욕적 도덕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들이 없다면 <도덕경>은 처세

론이요, 정치사상서이다.

다음 구절인 치빙전렵영인심발광(馳騁 獵令人心發狂)'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

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말이고, '난득지화영인행방(難得之貨令人行妨)'은 '얻기

힘든 보물은 사람을 어지럽게 만든다'는 말이다. 향락에 곁들여 취미에의 몰두와

물욕에 대한 경계도 나온다. 오늘날 '치빙천렵(사냥)'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컴퓨

터 게임'이나 '인터넷'도 들어갈 수 있겠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카지노'나 '경

마' 또는 '주식 투자의 열기' 같은 것도 다 '치빙전렵'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이다. 구름이 통신벗님들한테 '경마'나 '주식 투자'같은 것은 아예 쳐다도 보

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름이 왕년에 이름을 날린 도박사요, 전

설적인 승부사였음을 씨리즈 글로서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다. 물론 주식투자도 몰

라서 안 하는게 아니고 왠만한 펀드 매니저들이나 통신에서 뜨는 투자전문가들 쯤

이야 우습제. 그런 구르미가 하지 말라 카는거니까 안하면 되능기다.

또 '치빙전렵'에 뺄 수 없는 것이 있제. 집집마다 벌어지는 고스톱 판이나 훌라

판도 마찬가지고 낚시 매니아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다. 모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바로 '히로뽕'이다. 이런 것들에 빠지지 말라는 이야기이니 여기까지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도덕적 교훈이다. 이런 이야기는 불경에도 수없이 나오고 바

이블에도 노냥 나오는 이야기고 명심보감만 봐도 더 좋은 말들이 많다. 그다지 탄

복할만한 신선한 맛은 없는 소리다. 그러나 할아방의 말은 항상 끝이 중요하다.
 

시이성인위복불위목



12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是以聖人爲腹不爲目

시이성인위복불위복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앞 문장을 고대로 조선말로 옮기면 '그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

는다'가 된다. 이 문장에서의 '위(爲)'는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의미인 '위하다'

로 읽으면 된다. 성인은 배를 채우기 위한 일은 하지만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에 몰

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目)'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앞에서 말했던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인 모든 향락'을 대표하는 말로서 쓴

것이다. '눈(目)'이 '감각적 쾌락'을 상징하는 말이라면 '배(服)'는 생명을 유지하

기 위한 '소박한 의식주'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성인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정도의 배만 채우지 그 이상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쾌락이나 향락을 쫓지 않는다는 말이다. 음식을 먹더라도 배를 채우

기 위해 먹는 것이지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 바로 성인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면 성인의 노동은 필요한 최소한도의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정도의 노동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는 이유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필요량보다 많은 노동의 결과를 얻어서 어디에

쓰는 것이냐? 눈을 즐겁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혀를 즐겁게 하고, 취미 생활

을 하고, 재물을 모으는데 쓴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은 해야 할 필요량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고 그것으로 쓸데없는 짓에 인생을 낭비한다고 할아방은 생각하는

것이다. 할아방처럼, 성인처럼, 신선처럼 살아가는데는 사실 밭때기 한마지기면 충

분하고 하루 두 시간 노동이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양 20마리만 쳐도 한 사람 입

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앞서 할아방이 말했던 '면면약존,용지

불근(綿綿若存,用之不勤)'이 떠오른다. '현묘한 도는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져 영

원히 지속되지만 그 쓰임은 결코 부지런하지 않다'고 했던 말. 그렇다. 노자 할아

방의 주장은 그거다. 바로 '적게 먹고 가늘게 싸고 오래 살자'는 것이다. 천지의

도라는 것도 면면약존하는 것이고 용지불근이니 성인도 이와 같이 산다는 말이다.

또 여기서 상기해야 할 말이 바로 '생지축지(生之畜之)'다. 짐승들처럼 산다는

것. 그게 뭐냐? 짐승들은 자기 먹을 것 외에 취하는 것이 없다. 맹수들도 배가 부

르면 눈앞에 사슴 새끼가 얼쩡거려도 쳐다 보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초식

동물들도 그걸 안다. 그래서 사자 가족한테 한마리가 헌납되고 나면 나머지 넘들은

안심하고 풀을 뜯어먹는다. 물론 사자가 다시 배가 고파질 때 까지지만. 취미로 사

냥하는 동물은 없다. 그리고 먹지 않을 풀을 재미로 뜯어놓는 짐승들도 없다. 이런

짐승들이야 말로 오로지 '배를 위할 뿐이지, 결코 눈을 위하지 않는 성인처럼 산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절이 있을 거다. 앞에서 나왔던 말 '허기심,약기지,실기복,

강기골'이다. '마음을 비우고 뜻을 약하게 갖고 오직 배부르고 뼈만 튼튼하면 된

다'고 했던 말도 다 같은 맥락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이상의 것을 취하여 가지려고 발악을 하는 때문'이라고 할아방은 보는 것이다. 그

리고 그 이유가 '바로 눈과 귀와 혀를 즐겁게 하는 쾌락의 추구'에 있다고 보는 것

이다.

<도덕경>에서 할아방은 초지일관 거듭해서 오직 한가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한가지가 무엇인지 이 글을 읽어온 사람이면 다 아셨을 것이다.

나는 할아방이 지금 이 시대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무척 궁금하다. 압구정동의 번쩍거리는 로데오 거리와 포르노가 범람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정신이 혼란한 컴퓨터 게임과 번쩍거리는 유흥가의 불빛과 강 하나를 끼

고 천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를 보면 아마도 할아방은 절망에 빠져 자살하지나

않을까 싶다. 21세기는 우리의 할아방이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21세기의

우리가 할아방의 권하는 바를 쫓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현실이다.

21세기는 노자가 절망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자를 쳐

다보아야 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노자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원래 유토피아는 갈 수 없는 나라

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이니까.

마지막 구절인 '고거피취차(故去彼取此)'는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버리고 저

것을 취한다'라고 번역되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버리는 '저것(彼)'은 무엇이고 취

하는 '이것(此)'은 무엇일까? '저것'은 향락과 쾌락과 탐욕을 쫓는 삶이고, '이

것'은 도(道)를 쫓는 삶이다. 즉, 성인의 길이요, 신선의 길이다. 오직 살기 위해

필요한 것(腹) 이상을 탐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생활이다.

 

             <도덕경 번역 요약-11장 까지>


도는 그 이름을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것의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이름을 붙인 후에야 그것의 실상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 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니 이것은 악한 짓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선함을 가장한 것이니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며대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실천함으로서 가르치고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다.

살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쌓아 두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쌓지 않음으로서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현명함을 높이 사지 않으면 백성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귀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얻기 힘든 보물이니 사람들이 훔치고 싶은 생각을 갖지 않게 한다.

욕심이 날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들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몸을 튼튼히 해주어

모름지기 아는 것과 욕심이 없게 한다.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을 속이지 못하게 한다.

피치 못할 일이라도 백성들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쓸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도의 가지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 하면

빛이 어우러져 춤추는 것과 같아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 헤쳐 그 속을 보려하면

다만 낱낱의 티끌과 같이 보일 뿐이고 맑고 맑아서 어찌 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 비롯됨을 알 수 없구나.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도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결코 찌그러지는 법이 없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한다.

그 계곡의 문이야 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게, 또 오래도록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밖에 자신을 둠으로서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작은 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 자신의 보존이라는 큰 사사로움을 얻느니라.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만약 물과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

머무를 때의 선을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서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때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서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을 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무엇이던지 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 그만 둠만 못하다.

집이 크다고 하여 아무리 기둥을 세어도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금은보화가 집안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방법이 없다.

부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 스스로 허물이 될 뿐이니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온나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의 기운을 오로지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들의 섬돌(또는 마당)을 손수 딱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들의 아픈 곳을 없이해 줄 수 있겠는

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지(知)에 의존치 않고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도를 행하는 데 있어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분명하고도 밝게 뜻을 온 천하에 전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없는 듯이 살며,꾸밈에 의존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면서도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玄德'이라 하는도다. 


서른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살통으로 모아 바퀴를 만든다.

바퀴의 살들이 만든 빈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바퀴가 능히 수레를 지고 돌 수 있다.

찰흙을 빚어그릇을 만드는데 찰흙이 움푹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찰흙이 만든 빔으로부터 그릇의 쓰임이 나온다.

벽을 뚫어 문(창)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문이 뚫려져 있기 때문에 방으로서의 쓰임이 가능하다.

그러함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이로움을 얻게되는 이유는 없는 것으로부터 쓰임새(用)가 나오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