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淵蓋蘇文 (?~665)


강화삼다(江華三多)라는 말이 있다. 예부터 강화도에는 세가지가 유명하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역사가 깊고 인물이 많고 글(文章)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역사라면 고조선시대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강화도가 빠질 수 없다. 각 시대에 걸친 유적, 유물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고장이기에 우리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이곳은 뛰어난 인물이 많았기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강화도에는 마니산이 있어 영험하고 고려산이 있어 기개가 높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바로 이곳 강화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연개소문은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에서 출생하였는데  "나는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설 화를 담고 있다.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야 말로 고구려의 걸출한 민족 영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영걸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당태종(唐太宗:재위627-649) 이세민(李世民)도 연개소문 만큼은 두려워 했다" 고 적고있으며, 지금은 실전되어 볼 수 없으나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걸출한 두 명의 위인인 재상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기에 뛰어나다고 하였다. <사진:강화고려산>

"연개소문은 첫째로 고구려의 9백년 이래로 전통적인 호족통치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고, 둘째로 장수왕 이래로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의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우고, 셋째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명을 죽이고 자가의 독무대를 만들어 서국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대륙에 침략을 시작하였으니, 그 선악, 현부(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에 고구려 뿐 아니라 곧 당시 동아세아의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참고문헌 : 조선상고사>"

하지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임금을 시해한 잔익무도하고 포악한 신하로 꾸며 놓았다.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신라를 정통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구려나 백제의 영광스런 역사를 빼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까지 명성을 떨쳤고. 김춘추와 숙적이었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관한 사적은 숨기거나 거짓으로 썼던 것이다. 김부식은 더나아가 연개소문을 폭군으로 서술함은 물론이고, 성씨인 연(淵)마저도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이 이연(李淵)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못의 뜻을 가진 천(泉=淵)으로 바꾸었다. 이웃 나라 임금의 이름때문에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이 되었다. 김부식의 서술에서부터 시작한연개소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널리 알려진 설화속이나 백과사전속에서도 계승되어 나타나고 있다.

(동아원색백과사전)속의 연개소문 항목을 찾아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장군,정치가로 일명 개금(蓋金) 또는 천개소문(泉蓋蘇文)이다. 628년(영류왕11) 왕명으로 장성(長城)을 쌓을때 남녀를 막론하고 동원되어 고통이 심하였다. 성품이 호방하고 안하무인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임금과 밀의한 것을 알고 영류왕 이하 반대파 중신들 100여명을 죽여 버리고 보장왕(영류왕의 조카)을 추대한 후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대인들까지도 이 사대주의의 극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또한 (삼국사기) 열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인물들은 거의 뺏을 뿐 아니라 내용도 간략하게 줄여썼다. 이 때문에 천남생의 묘지명에도 연씨 집안은 대대로 활과 쇠를 잘 다루었던 가문이라는 사실은 있어도 연개소문의 출생지나 성장과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천남생의 증조부는 자유이고, 조부는 태조이다. 나란히 막리지를 역임하였는데,부친 연개소문은 대대대로를 역임하였다. 조부와 부친이 야금에 뛰어나고 활을 잘다루었다. 아울러 병마를 장악하고 나라의 권세를 모두 잡았다. <천남생묘지명>

정사(正史)에는 가려진 연개소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향토지인 강도지에는 하점면 부근리 고려산에서 그가 출생했다고 전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현재 강화도 향토 유적 26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점면 지석묘 앞의 고인돌 공원에는 '고구려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지'가 고려산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연개소문의 집터와 고려산 치마대를 찾아가기 전에 우선 이곳을 들러 문장을 읽어 봄이 더욱 생생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리라.


< 연개소문 유적비>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 개국의 성역이자 선사시대의 유적지인 이곳 강화는 천하통일의 큰 뜻을 품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의 연고지이다. 향토사 강도지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위엄어린 얼굴에 당당한 풍채는 뭇 사람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 터와 자취가 남아있다. 조선 상고사에 의하면 당을 정벌하고 한 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다.그때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집권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군(軍)과 민(民)이 하나가 되어 요수(遼水)와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싸워 당(唐)의 함선 4백여척과 30만 대군을 쳐 부수었다. 특히 안시성 싸움에서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당나라 내륙으로 깊숙히 밀고 들어가 화북(華北)지방을 정벌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앞의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숭조회 초의로 비석을 세우다. 서기 1993년 초여름, 이호경 짓고 유달영, 이항녕, 감수, 정규은 쓰다. 연개소문은 이곳 강화도에서 천하패업(天下覇業)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집터는 현재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의 중턱에 있다. 집터는 고려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삼거리 저수지에서 왼쪽 산길로 약 5백여미터를 지나면 바로 나온다. 세월의 풍상(風霜)을 이겨온 주춧돌이 곳곳에 널려 있지만 학계에서 아직 정확한 고증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터가 위치한 곳의 전망이나 고려산에 이어지는 능선으로 보아 충분한 지형조건을 갖춘 곳이다. 연개소문은 이곳에서 말을 타고 고려산 오정을 올라 치마대의 능선을 달리면서 광활한 만주대륙과 중원의 제패를 꿈꾸었을 것이다.

서해바다의 세찬 바다바람을 이겨내고 고려산 정상에 다다르면 바로 다섯개의 우물이 나온다. 이 오정은 삼별초의 굽힘없는 저항에 혼이 난 초원의 몽골인들이 고려와 원나라가 강화를 맺은 다음에 쇳물을 부어 물줄기를 막았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몽골인들은 아마 고려산에서 태어나 당태종을 손안에 가지고 놀았던 연개소문의 기개가 두려워 이 산의 정기를 끊어 위대한 장수가 태어나는 것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치마대는 능선이라 아직 건재하다. 연개소문은 집터에서 고려산 정상으로 단숨에 올라 치마대를 달리면서 무술을 익히고 군사전략과 웅지를 키웠으리라. 서해바다의 광활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대륙을 경영하는 포부를 키웠으리라


연개소문 (淵蓋蘇文)


연개소문(淵蓋蘇文/?~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 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보장왕 4)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그림: 천리장성>


(보장왕25). 고구려 말기의 재상. 장군, 개금(蓋金 또는 金)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리가수미)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모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울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 한 것은 연개소문에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태어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은데 <강도지 : 江都誌>에 따르면 고려산(高麗山)에 그의 구기(舊基 : 집터>가 있고 그고려산에는 5정(五井)이 있었다 하였으며 그 5정에서 깨끗한 물이 용솟음 처럼 흘렸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언제나 말에 물먹이고, 그 물가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라고 하여 연개소문과 이 다섯 우물과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후 몽고의 사신이 오정을 찾아보고 그곳의 지맥을 누르기 위하여 이 다섯의 우물에 쇠말둑을 만들어 깊이 밖아 지맥을 끊었다 라고 하였는데, 그 후부터는 넘처 흐르던 물이 말라버렸다고 하며 아직도 그 연못의 자취는 남아전하고 있다.

자칭 물의 정령(精靈)을 타고났다고 한 그는 풍채가 준수(俊秀)하고 위푸잉당당하였다고 하며 열다섯살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서부대인(西部大人)이 되었다. 그 후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이를 시기하고 두려워 한 여러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보장왕) 1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처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조리 두륙(屠戮)하고 왕궁에 처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나서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그는 자칭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 였음으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의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이 었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 두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누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 국론 통일을 기하였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축하였다. 고구려는오랜 옛날부터 실권자의 직(職)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입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보인느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고한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淑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내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d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귀 한때나마중국 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5)에는 수나라와의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 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탁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체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증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일는 그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동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 유역을 두럴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영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 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었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 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한 면은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 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 상태가 중국 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 하였던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 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이다.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농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권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위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는 대륙의 거센 바람처럼 다시금 휘몰아쳐온 당나라 세력을 여지없이무찔러 고구려의 기상을 드날리게 되었다. 명장 연개소문이 등장하여 크게 승리하는 기록을 세우는 요수전역(療水戰役)과 안시성전역(安市城戰役) 이야말로 당나라와의 대회전에서 고구려의 웅장한 기백을 과시한 전역(戰役)이라 하겠다.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의 영웅적인 전역 몇 가지 소개하면, 당태종이 전선(戰船) 400척으로 고구려를 치게 하더니 마침 요하(療河)가 호우로 범람하여군사를 도릴고 시기를 엿보다가 장마비가 멋자 대대적으로 재침하여 오거늘고구려 수군은 대기하고 있다가 그를 무찔러 대패시켰다.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이 수십만의 대군을 몰고 안시성을 포위하고 연개소문의 막하장수 양만춘(揚萬春)과 수개월 동안 공방전을 전개 하였는데 당나라 군사들의 전사자도 많이 낫거니와 그보다 군량(軍糧)이 모자라 도저히 더버틸 수 없어 당태종은 회군을 명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회군하려하자 조골성주(鳥骨城主)와 안시성주, 양만춘, 막리지, 연개소문이 일제리 추격하면서대공세를 펴니, 당나라 군사들은 크게 흔딜리어 서로 밟고 밟히고 하면서 도망치다가 당태종은 말발굽이 흙수렁에 빠지는 등 혼줄이 나서 겨우 도망치다가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으며 그외 사병들도 태반이 죽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사의 퇴로를 막고 양만춘은 거세게 몰아치어 당태종이할바를 모르고 허둥데다가 겨우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하여 갔다.

고려의 문호 이색(李穡)이 당태종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和樂百羽(위시낭중일물이 나지현화락백우) 뉘 알았으랴 고구려 정벌하기는 주머니 속의 한 물건 다루기보다 쉽다고 큰소리 치더니 당태종의 눈알에화살이 꽃칠 줄이야"라고 하였고 조선조 중기의 대학자 김창흡(金昌翕)도 “千秋大膽揚萬春 箭射&#22743;髥落眸子(천추대담양만춘 전사규염락모자) 천추에 대담한양만춘이여. 용(당태종)의 눈동자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렸으니”라 조소 하였다.

연개소문이 쫓기는 적을 쫓아 북경 교외에 까지 깊숙히 밀고 들어갔으니 지금도 북경(北京) 안정문(安定門) 밖 60리허에 고려진(高麗鎭)과 하북성에 고려성(高麗城)이 있다는 점으로 미루워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丹劑中采浩고증).

연개소문의 자는 김해(金海)이었는데 그의 병법을 김해 병법이라 하였고그의 병서를 김해병서(金海兵書)라 하여 고려시대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게는 한권씩 나라에서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요양(療陽), 해성(海城), 금주(金州), 복주(福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유적과 전설이 많이 있다라고 하였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蓋蘇山)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의 연고지 강화에서는 숭조회가 주동이 되어 그의 장한 업적을기리기 위하여 1993년에 그분의 출생지인 고려산(高麗山)밑 하음에 유허비를세웠다.

비 문

단군의 성역이며 선사유적지(先史遺跡地)인 강화는 침략자 당(唐)을 물리치고 천하통일의 웅지를 꾀 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연고지 이기도 하다.

향토사 강도지(江都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서부의 세족(世族)으로 강화군 하점면에서 대인 연태족(淵太族)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산(高麗山) 치마대(馳馬臺)의 오정(五井)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터와 유적이 고려산에 현존하고 있다. 자칭 물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한 그는 풍채가 준수(俊秀)하고 위풍이 당당하였다고 하며, 열다섯살에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아 서부대인이 되었다. 사학의 거장(巨匠) 단제 신채호의조선상고사(朝鮮相古史)에 의하면 남수북진(南守北進)을 주장하는 연개소문을제거하기 위한 조신들의 밀의가 탐지되자 그는 구국의 일념으로 혁명을 결행하여 그들을 도륙(屠戮)하고, 영류왕을 살해하였으며,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오르게 하였다. 때에 당태종(唐太宗)이 연개소문의 시역(弑逆)을 웅징한다는 구실로 침략하여 오자 세기의 풍운아(風雲兒) 연개소문은 당시 사백여척 함선(艦船)을 수장시킨 요수대첩(療水大捷)을 거두었으며 또한 당태종이 친히 삼십여만의 대군을 휘몰아 오자 안시성주 양만춘(陽萬春)과 더불어 그를 맞아 싸워 이겼다.

특히 안시성 대혈전(大血戰)에서는 당군을 추풍낙옆 같이 쓸어내는 대전과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에서 당태종의 눈에 화살을 맞고 동통(疼痛)으로 고생하다가 비명횡사(非命橫死)하였다. 훗날 문호 이색(李穡)은 시(詩) 정관음(貞觀音)에서 당태종의 무모한 도전과 그의 실명(失明)을 조롱하여 (那知玄花落百羽)라 하였다. 그 후 고구려군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당나라의 내륙(內陸)으로 밀고 들어가 화북지방(華北地方) (북경근교)를 경략(經略)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드날리던 중 거성(巨星) 연개소문이 크나큰 소망을 품은채 단기3999년(666)에 파란만장한 생애(生涯)를 다하였다. 연개소문 그는 고구려의호족공화정치(豪族共和政治)를 타파하고 국권을 통일하였으며, 동족과는 전쟁을 지양하고 이민족(異民族·당)과는 과김히 맞싸워 그를 압도(壓倒)하고 국위를 선양한 지략(智略)을 겸비한 용장이었으며 배달겨래가 배출한 불세출(不世出)의 걸출(傑出)이었다.
「참고문헌」 <朝鮮上古史>, <江都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江都誌>


▶ 연(淵)씨의 유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나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외경하여,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고 있음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민족의 설화와 신화에 널리 보이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그의 이름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하고 있다.

▶ 집권과정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고 한다. 동부(또는 서부라고도 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자,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영류왕 25)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초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으므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에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 대외관계
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 대외정책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히 결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이다.

그리고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종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 경직된 정책술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서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된 면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이 수반되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하며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하였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하였던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장수를 기용하여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일 것이다. 아군의 병력 손실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한칼에 쓸어버린 세계 전쟁역사상에서도 뛰어난 승전이였다. 고구려는 이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수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묻고 그 위에 승전을 기념하는 경관대탑(京觀大塔)을 세웠다. 중국인들게는 수치였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하늘에 떠있는 두개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수군사량관으로 양제의 침입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이 부분부터는 역사와 전설의 혼합)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 626년 또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다시없는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돌궐, 설연타, 아사나 등은 다시 중원을 공격했다.
 
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역사와 전설의 혼합 끝)
<천리장성>
오히려 영류왕은 624년 당에 조공을 바쳤고 도교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사신들이 와서 경관대탑을 부수고 수나라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아무 대가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전국을 돌며 군사시설을 정탐했고 왕은 이를 방치했다.젊은 조의선인들은 분노했다. 왕은 이들이 두려웠다. 그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631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여 조의선인을 징발했다. 그리고 아까운 국력을 낭비했다.

역사상 만리장성이건, 천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 국방에 도움이 된 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정체와 안일의 상징일 뿐이었다. 왕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서부대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반대했다. 왕을 옹호하던 기득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연개소문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서부대인의 자리를 허락했다.

642년 연개소문과 조의선인들은 당의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정탐하는 것의 중지, 631년 파손시킨 경관대탑의 복원과 을지문덕의 복권, 국력낭비인 천리장성의 축조 중단을 요구했다. 왕은 연개소문을 중앙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전방인 천리장성 축조 감독관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고구려는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하거나,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왕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왕들이 이런 이유로 죽거나 쫓겨났다. 고구려는 유교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 전 열병식을 열고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08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왕(보장왕)으로 옹립했다.

                                  출처: 강화365/강화소개/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