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어떻게 볼 것인가?

                                           최두환 2003-10-17 20:34:17

                                                         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네티즌 자유게시판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것같아 상당히 동감이 가는글이라 여기 소개한다. 한문으로된 지명등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지식인 것같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인식의 폭을 넓혀햐 할 것 같다. 그래야 숨어 버린 우리역사의 진실을 찾을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운영자>      
   
   <지은이 소개: 최두환>
 해군사관학교와 해군대학, 경남대 대학원(사학과)를 졸업하였고, 구조함장과 항만방어 전 대장, 해양연구소 역사부장을 거쳐 현재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부대 지휘 성공사례 우수상과 이충무공선회 대상과 대통령 표창,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음.
주요저서로는 <충무공 이순신>, <이충무공의 리더십과 사상>, <강강수월래 연구> 등 충무공 연구서 다수가 있다.

        <목      차>
 
《고구려사》연구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발해사》연구는 어디까지인가?
 《한국열국사연구》가 말한 샐러드 그릇은 ?  
 《한국사신론》에 반박한다
 《일본서기》의 본질을 말한다

《백제사》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백제가 요서경략을 했다느니, 황해 서쪽에 있었다면서도 서신라는 바로 서쪽에 있는 중국대륙의 동부지역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고구려/백제/신라를 비롯하여 조선의 역사 속에 있는 백제 등의 강역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그 이상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직도 그 강역을 몰라서 이런 글을 쓴다는 자체가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일본 사람들이 백제사를 먼저 연구했으니

우리는 백제사를 연구하는데 일본보다 많이 늦었다. 그냥 몇 년이 늦은 것이 아니라, 50년이나 뒤쳐졌다.
일제시대에는 우리에게 연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설사 연구하더라해도 일본인의 사관 - 식민사관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역사학의 밑바탕이 부족하여 일제식민주의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답습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겨우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제 목소리를 내려는 연구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百濟史니, 新羅史니, 高句麗史니 하는 것은 역시『삼국사』『삼국유사』『일본서기』가 가장 기본 사료로써 연구에 활용되었으며, 그것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속속들이 연구하지 못했다. 역시 일본 사람들이 먼저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늦은 변명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津田左右吉 이후 일본인의 연구성과는「三國史記」초기 기록의 불신에 따른 歪曲된 百濟史의 先入觀으로 백제사에 대한 올바를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백제 초기 사실의 부인은 대체로 近肖古王(346∼375) 이후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일본인 연구의 일관된 모습으로 이어졌다."(申瀅植,『百濟史』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총서 18,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5)

이렇게 일본인들이 먼저 연구를 시작했으니, 그 실적은 역시 한일합방이 되는 해부터 일제시대 만하더라도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역사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몇몇 학자들은 식민사학자가 되어 약간의 연구가 있었지만, 광복이 되었어도 그것은 식민사학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그 영향이 아직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흐르고 있음을 본다.
그나마 우리 나라에서는『삼국사』의 초기기록을 考古學的인 관점에서 연결시킨 것이 1967년에야 金元龍이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그 뒤부터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고무적이긴 하지만, 시작이 늦었을 뿐 아니라, 1971년에 발견된 "武寧王陵 出土의 誌石과「삼국사」내용이 합치됨으로써「삼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어 많은 史料批判을 거쳐 그의 성과가 나타났다."고 하여 백제의 "武寧王"이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한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고증은 일본인 학자의 역할이 컸으며, "1960년도 말 이후 시도된 坂元義種의 大王制 成立에 따른 백제왕권의 확립으로 백제사에 대한 재조명이 잇다르게 되었다."고 했지만, 결국 이런 주장은 이미 그전부터 일관된 식민주의 이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우리 나라 학자는 오히려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백제사 연구는 식민사학자의 보조역할에서 머물다

우리 나라 학자들이 백제의 역사를 연구는 하였으되, 독자성이나, 독보적 연구성과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百濟史 硏究는 古墳·土器·城址 등 考古·美術史 분야에 치우쳐 있고, 佛敎·言語 등의 문화부분에 편중되어 있으며, 문헌은 한정된『삼국사』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에다 더욱 확고한 식민사학의 자리만을 인정해준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1971년 무녕왕릉 발견은 百濟史의 硏究뿐 아니라, 백제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어 양국간의 學問的 交流가 확대되었다. 이로써 백제문화는 國際的 關心의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백제의 고분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서울 지역과 公州一帶의 발굴작업으로부터 …風納里土城 調査…는 … 백제고분에 대한 개괄적인 형태와 특징에 대한 정리가 시도되었다."고 하면서 한강하류유역의 고분을 백제고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급급하였다.
이런 성과를 한반도에 있는 "南·北漢江유역의 積石塚의 分布를 통해「三國史記」의 기록과 연결시켜 백제초기의 領域을 확인할 수 있었음은 考古學과 歷史學의 연결이 아닐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잘못된 연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가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존재했는가? 하는 것부터 조사되어야 한다.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는 그들의 결론으로 말미암아 백제의 국제적 대외관계로서 遼西進出을 통치권이 미치지도 못할, 한반도의 황해 바다를 건너, 전혀 다른 지역에다 백제의 통치영역으로 설정해 놓고 "적극적인 요서진출"이니, "貿易基地나 居留民을 보호하려는 군사활동 등으로 보고 있다."느니, "樂浪·帶方郡을 백제세력으로 오인한 것으로 파악하여 결국 부인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백제의 遼西進出은 분명하지만, 그 도읍지는 慰禮城(위례성)이라고 했으며, 稷山(직산)이라고도 했다. 그곳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에 흐르는 황하유역이다. 바로 거기서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이를 추적해야 할 것이며, 한반도의 그런 유적은 한반도 자체의 거주했던 백성들의 유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申瀅植이 지적했듯이, "백제사 연구에서 우선 관심이 모아진 부분은 百濟建國과 그 전후의 정치적 변화와 領域問題 등이다. 백제의 建國神話를 비롯하여, 국가기원문제는 馬韓과의 관계 및 目支國의 문제 등이 중심과제가 되었다. 그외 백제의 국가발전문제와 그 성립의 역사적배경 등에서 연구성과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目支國의 위치가 종래의 稷山에서 仁川(천관우)이나, 禮山(김정배), 그리고 羅州潘南面(최몽룡) 등지로 바뀌고 있어, 이러한 혼란은 백제사연구의 어려움과 한계성을 나타내 준다."고 하였으며, "漢城時代는 최소한 4개의 都城變化論이 있어 河北慰禮城(中浪川일대)에서 河南慰禮城(몽촌토성)으로, 다시 漢山(二聖山城)에서 漢城(春宮里일대)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으로 백제초기의 정치적 변화를 설명하기도 한다."고도 하였다.
이런 지적 내지 평가는 백제기원이나 건국의 역사적 배경을 한반도에서 찾으려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그것을 한반도에서 벗어나 지금의 중국, 그 산서성 서남부와 섬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탈바꿈이 있지 않는 한, 백제의 역사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이 틀리게 나오고, 역사는 오히려 오리무중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摸索"을 아무리 외쳐본들 성과는 허위·날조의 일제식민사학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河南(하남)의 漢水(한수)와 한반도의 河南市 漢江(한강)의 차이

백제사는 네 시기로 나누는데, 제1기를 前期 漢城시대(BC. 18∼AD. 369), 제2기를 後期 漢城시대(369∼475), 제3기를 熊津시대(475∼538), 제4기를 泗 시대(538∼660)로 보는데, 이것은 지리적으로 보면, 결국 漢城·熊津·泗비(삼水변+比)이다.
그럼 백제가 처음 사람들이 살만한 터전을 찾았다는 곳을 원문에서 찾아보자.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三國史』「百濟本紀」第1 <始祖 溫祚王>)

여기에 나오는 지명은 분명, 漢山(한산)·負兒嶽(부아악)·河南(하남)·漢水(한수)·彌鄒忽(미추홀)·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이라 하였다. 그 뜻은 이렇다.

"드디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에 올라 사람이 살만한 땅을 살펴봤다. 비류왕은 海濱에서 살고자하였다. 열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河南의 땅이 북쪽에는 漢水로 에워싸여 있고, 동쪽에는 높은 산으로 굳게 지키고 있고, 남쪽에는 기름진 들판이 보이며, 서쪽에는 大海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얻기 어려운 전형적인 요새이므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왕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로 가서 사니, 온조왕은 이 河南 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문의 해석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漢水"를 "漢江"으로, "海濱"을 "바닷가"로, "大海"를 "큰 바다"로, "阻"를 "막혀있다"로 번역하여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데서 문제가 발생된다. 분명 "漢水"는 섬서성 파총산(  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長江(大江: 揚子江)으로 들어가는 강이며, "海濱"은 곡식이 많이 나는 유역을 낀 벌판이며, "大海"는 한없이 넓고도 먼 땅 - 曠遠(광원)이라는 뜻이며, "阻"는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터전을 한반도에 있는 "현재 서울 일원의 漢江下流地域이다. 高句麗의 南下로 蓋鹵王 21년(475)에 熊津(公州)으로 서울을 옮길 때까지 500년 가까이 백제의 중심지였다"고 못박고 있는 것은 한반도에 얽어 매놓은 식민사학의 연장선에서 더욱 확고하게 보조역할을 해준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한강유역에다 역사적 의미까지 부여한 역사는 우리 조선의 역사의 부분에는 근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역사적 의미 부여가 될 수 없다.
그럼『唐書(당서)』에서 백제가 어디쯤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新唐書』: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000리 남짓한 瀕海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越州), 남쪽은 왜(倭),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歐陽修(1007∼1072),『新唐書』卷220「列傳」第245 <東夷> "百濟扶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而 , 瀕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舊唐書』: 백제국도 본래는 부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땅으로 京師에서 동쪽으로 6200리,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劉 (887∼946),『舊唐書』卷199「列傳」第149 <東夷> "百濟國本亦扶餘別種也.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이 내용은『삼국사』「지리지」에도 그대로 나온다. 이 越州를 대체로 절강성 細興(세흥) 지방으로 보는 것 같으나, 본디 越은  이며, 이곳은 백월(百 : 百越)이며, "自交 至會稽七八千里" 곧 "교지(交 : 雲南省 西疇縣 서남쪽)에서 회계(會稽)까지 7∼8천 리가 된다."고 한 광주(廣州) 지역이며, 이곳은 "古者江浙 奧之地" 곧 "옛날에는 강소·절강·복건·광동·안남 지역"인 지금의 중국 동남부 지역이다.
여기서 백제의 서쪽 월주(越州)라면, 광동·안남 지역일 것이며, 남쪽은 바로 백월 지역 자체를 가리키며, 북쪽은 섬서성·감숙성 지역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쪽이 신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원문에서 "모두 바다를 건너서 그런 나라로 간다"는 것은 東海·南海라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 아니고, 黃河·揚子江을 건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넓은 유역이 海濱이고, 大海이기도 하다.『舊唐書』에서 말하는 "大海"는 大江이라는 揚子江으로, "小海"는 黃河로 보아야 한다.
이런 예는 많이 있다. 위의 같은 책에서 고구려의 강역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위치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도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며, 서북쪽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닿고, 북쪽은 말갈(靺鞨)과 접하였다. 그 나라의 임금은 평양성인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바로 여기서의 바다도 황하요, 양자강이다. 그 고구려의 도읍지가 장안이라고도 밝혀져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 앞에서 한반도에 고구려·신라·백제가 있었고, 그 뒤로 고려·조선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결국 그런 주장은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식민주의사학의 연장선에서 답보(踏步)한 것뿐이다. 한 발자국도 진보(進步)하지를 못했으며,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보면, 오히려 한참 퇴보(退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종숙(朴鍾淑)은 "한 나라의 영토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에 박은 듯이 그 크기와 모양이 똑같을 수는 없다. 심하면 몇 년만에 판도가 바뀌기도 하지만, 보통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그 판도가 서서히 바뀌게 된다. 백제의 강역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으며, 결국은 한 치의 땅도 제 몫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 말하였다. 이 말의 앞부분에는 같은 의견이지만, "한 치의 땅도 제 몫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역사는 그 강역 위에서 벌어지며, 언제나 그 나라 백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비록 한 때 힘이 모자라 그 강역을 다스리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하여 그 역사와 그 강역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해석에서 그 기준을 올바로 인식하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무리 글을 읽고 역사를 공부한다고 하여도 한문의 해석을 문학적으로 풀이한다면, 결코 그 뿌리 있는 역사라는 정답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수수께끼의 역사 내지는 전설로서만 존재하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반드시 학문적으로 조리있게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숫자에 있어서, 九 또는 萬을 그저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말대로 일단 먼저 그 낱말에 충실하게 새겨야 한다. 九→9로, 萬→1,0000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都를 그저 "도읍"으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것은 "천자가 있던 곳[天子所居]"이다. 또 治를 그저 "다스린다"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것은 "천자가 있던 곳[所都處: 天子所居]"이거나, "고을의 행정부가 있는 곳[州郡所駐]"이다.
그리고 명산대천을 기준할 때는 海를 물바다로, 大海를 큰 바다로 인식한다거나, 水나 江 또는 河를 그저 강[가람]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통상 江은 長江(揚子江)으로, 河는 黃河로 인식되지만, 사료의 앞·뒤 내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곧 江이 황하일수도 있고, 長江일수도 있으며, 河가 長江일수도 있고, 황하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하나 양자강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여진 지 100년도 되지 못하는 1900년±10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황하(黃河)가 한하(漢河)라면 어찌 알아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지리학에서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동서와 남북의 방향을 나침의의 방향과는 다른 東京·西京으로 있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단지 1°의 오차가 있다면, 경주 첨성대(瞻星臺)에서 하늘의 무슨 별을 관측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도에도 그런 오차가 있다면, 해[太陽]지는 방향으로도 맞지 않고, 과학적으로 계산된 나침의로도 맞지 않는다면,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서울 길을 과거보러 갈 때에 나침반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어디를 어떻게 찾아갈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이라 하여 과학적 사고를 너무 얕봐서는 안될 것이다.
또 길이나 거리의 상황에 대해서 유심히 볼 것은, 阻는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며, 距는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또 廣(광)은 너비나 그저 길이라는 글이 아니라, 동서(東西) - 가로의 길이이고, 輪(륜)· (무)는 남북(南北) - 세로의 길이를 말한다. 그리고 길이의 단위에서 1자(尺)를 약 20.81㎝(指尺)를 기준으로 1보(步)는 1.25m로, 1리(里)는 375m로 계산하면 큰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이 기준 단위로서 1자(尺)가 일제시대부터 피트(Ft)에 억지로 맞추어진 30.3㎝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國(국)"이다. 나라의 크기야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사방 300丈이라 하여 가로·세로 220m로 보는가 하면, 1만호(萬戶)도 國이요, 수천의 집[數千家]도 國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에는 國이 붙을 수 없다. 예를들면, 高句麗國이라든가, 百濟國이라든가, 新羅國이라든가, 高麗國이라든가, 朝鮮國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의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조작·날조·변조·개작하면서 붙여놓은 것이다. 조선은 부여나 고조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國이 붙지 않는다. 朝鮮이면 朝鮮이지, 결코 朝鮮國이 아니다. 國이라는 글이 붙은 것은 大韓帝國이나 大韓民國일 뿐이다. 隋·唐·元·明 등의 나라에 隋國·唐國·元國·明國 등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國이 붙지 않고, 그저 隋·唐·元·明 등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國을 붙여서 隋國·唐國·元國·明國·日本國 등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朝鮮)"이란 옛부터 매우 큰 나라요, 동양에서 가장 큰 나라였으며, 천자(天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한자가 빠진 것에 대해선 양해바랍니다. 이 사이트에서 지원이 안되어서 그렇습니다.)

《고구려사》연구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요즘 중화민국에서 고구려사를 그들의 영역으로 하려한다는 말들이 많다. 과연 그들의 역사연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북3성의 지역의 관할권을 확장하여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더 써야 할 것이다.
과연 고구려 강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진정 고구려역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 것인가?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로 보고 고구려사 부분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쉽게 여기고 있는 것이 고구려 땅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찌르고, 또 고구려까지 물리침으로써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광활한 대륙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발해의 역사까지도 제대로 관심 밖의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고구려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고구려의 역사마저 일본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1980년대 말부터 북한과 중국 자료의 획득이 훨씬 쉬어졌고, 만주 지역의 답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가 상당히 개선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 동안에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고구려 역사에 관한 인식이 달라져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상당히 크다고도 하였다.
이런 견해차이가 크다고 하더라도 오종철(吳鍾哲)은 "高句麗國의 주된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永定河·桑干河 이북과 내몽고자치구 일부, 그리고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전부와, 한반도 중·북부, 그리고 몽고 동부와 러시아 공화국 극동의 남부 일부까지였다."고 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상당히 확장시키고 있으며, "고구려의 강역 대부분이 현재 중국쪽으로 편입되었다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 왕조로 인식되거나, 되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이 경영했던 강역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왕 15년에「평양」(안학궁지; 이병도)천도를 결행한 지 159년이 지난 평원왕 28년에「長安城」(지금 평양: 한반도; 이병도)이 그 핵심인 都城이었으며, 역대 왕과 왕비의 능침이 반도내로 몰려 와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건립한 선행 왕조 중의 하나라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병도의 학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이론에 지나지 않는, 작은 학자로서의 새로운 시각의 차이일 뿐이다.
특히 노태돈이 주장한 이론에서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면서도 관심의 대상은 무엇보다도『三國史』「高句麗本紀」의 초반 부분의 기사의 신빙성에 관한 것이며, 고구려의 국가구조와 정치체제, 대외관계의 성격,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 등에 관한 논의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삼국사』자체에 대한 초반 부분의 기사이므로, 고구려라 하여 백제나 신라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돈(盧泰敦)은『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에서 이런 지적을 하였다.

"구체적인 문헌비판의 방법은 인접국 사서와의 대비를 통한 검토다. 주로 중국측 사서의 기록을 기준으로 해서 이와의 상충 여부가 판단의 잣대가 되었다. 이에는『삼국사기』가 늦은 시기에 편찬된 것인데 비해 중국측 자료는 당대(當代)의 것이거나 인접 시기에 편찬된 것이라는 점, 자국(自國) 사서일 경우 과장과 때로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날조 등이 행해졌을 수 있는 데 비해 제3국인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닌다는 판단 등이 작용하였다. 그러한 방법과 시각에 입각한 그간의 작업 결과를 보면, 고구려본기의 초기 부분 기사는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라 신빙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노태돈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중국측 사서의 기록이 정확한 잣대가 된다는 것이며,『삼국사』는 초기 부분만이 조작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태돈의 이러한 인식은 곧 津田左右吉·池內宏·武田幸南 등이 일부 중국 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된 사실 외의 부분은 전설이나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넘겨져 버렸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데 기인한다고 본다. 물론 철저한 문헌비판에 입각한 의고주의적 검토는 합리성 추구라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노태돈은, 고구려 계루부 왕실의 시조라는 주몽의 출신지에 대한 기록을 세 가지로 말하면서, 하나는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등 5세기 초에 쓰여진 고구려 금석문에서 전하는 북부여출자설(北扶餘出自說)과, 다른 하나는『舊三國史記』와『三國史記』및『三國遺事』등에 전하는 동부여출자설(東扶餘出自說)과,『魏書』고구려전과『周書』 및『隋書』고려전,『梁書』고구려전 등에서 전하는 부여출자설(扶餘出自說)이 있다고 했다.

북부여출자설로 볼 때, 4세기 전반의 고구려가 북진하여 녹산(鹿山) 즉 길림(吉林) 지역을 장악하자, 북부여는 서쪽의 농안(農安)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북옥저 방면의 동부여는 본국과 차단되어 독자적 국가를 영위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부여출자설로 볼 때, 금와왕(金蛙王)의 전설은 해부루의 천도설화와 연결되고, 김알지(金閼智) 설화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든, 두만강 유역에 금와왕 전설과 연관성이 있는 설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미 동부여는 5세기 초에 소멸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연구 내용을 보더라도 노태돈의 글이나, 다른 고구려 역사 내지 강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흑룡강 유역과 난하(난: 삼水변+欒河) 유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 하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라는 것을『後漢書』부터『新唐書』까지만 보자.

A.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000리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은 약수가 있다. 국토이 넓이는 사방 2000리이며, 본래 예의 땅이다.(『後漢書』卷85「東夷列傳」第75 <夫餘國> "夫餘國 在玄 北千里. 南與高句驢,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A'.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경계가 붙어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後漢書』卷85「東夷列傳」第75 <高句驢>  "高句驢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B. 부여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은 약수가 있다. 국토이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三國志』卷30「魏書」第30 <烏桓鮮卑東夷列傳 第30>  "夫餘在長城之北, 去玄 千里, 南與高句麗,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B'.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경계가 붙어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그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三國志』卷30「魏書」第30 <烏桓鮮卑東夷列傳>  "高句麗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C.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밖에 있었다. 그 뒤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宋書』第97「列傳」第57 <蠻夷> "百濟國 本高驢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驢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D. 그 나라(고구려)는 漢나라 때에 현도군에 있었다. 요동의 동쪽에 있으며, 요동에서 1000리쯤 떨어져 있다. 漢나라·魏나라 때에는 남쪽으로 조선·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붙어있었다. …고구려의 국토는 사방 약 2000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흘러나온다.(『梁書』권54「列傳」第48 <諸夷>  "高句驪者 …其國漢之玄 郡也. 在遼東之東, 去遼東千里. 漢魏世,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句驪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E. (고구려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 책성, 남쪽으로 소해에 이르고, 북쪽으로 예전의 부여에 이르며, … 나라는 동서의 길이가 2000리,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나 된다.(『魏書』卷100「列傳」第88 <高句麗>  "高句麗者… 云, 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其地東西二千里, 南北一千餘里.")
E'. 물길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옛날의 숙신 지역이다. … 낙양에서 5000리 떨어져 있다.(『魏書』卷100「列傳」第88 <勿吉國>  "勿吉國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去洛五千里.")

F. 그 지역(고구려)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지나니, 동서의 길이가 2000리요, 남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다.(『周書』卷49「列傳」第41 <異域上>  "高麗者…其地 東至新羅, 西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F'.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이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周書』卷49「列傳」第41 <異域上>  "百濟者…故其地界 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G.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나라는 사방 약 2000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흘러나온다.(『南史』第79「列傳」第69 <夷貊下>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G'.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 밖에 있다. 나라의 동쪽은 큰 바다이고, 남과 북은 고구려·백제와 붙어있다.(『南史』第79「列傳」第69 <夷貊下>  "新羅…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麗百濟接.")

H. 그 나라(고구려)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지나니, 동서의 길이가 2000리요, 남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다.(『北史』卷94「列傳」第82 <高句麗>  "高句麗…其國 東至新羅, 西度遼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一千餘里.")
H'. 그 나라(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이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北史』卷94「列傳」第82 <百濟>  "百濟之國…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I.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낙랑군의 옛땅으로 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닿는다. 동서의 길이가 3100리이고 남북의 길이는 2000리이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高麗者…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I'. 백제는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다.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百濟國…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I″ 신라는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 낙랑의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서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하였다. 크기는 동서의 길이가 1000리, 남북으로 2000리이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新羅國…本弁韓之苗裔,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東西千里. 南北二千里")

J. 고구려는 …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도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며,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닿고, 북쪽으로 말갈과 붙어있다. 그 나라의 도읍지는 평양성인데 장안이라고도 한다. 경사에서 5000리 밖에 있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高麗…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渡遼水與營州接, 北靺鞨.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
J'.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000리쯤 바닷가 북쪽에 있는데, 서쪽은 越州, 남쪽은 왜국,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며,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임금은 동쪽과 서쪽의 두 성에 산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百濟夫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而 , 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王居東西二城.")
J″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낙랑의 땅에 있으니, 가로(동서)로 1000리, 세로(남북)로 3000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을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 북쪽은 고구려이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新羅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의 위치가 결코 한반도 북쪽에 있는 백두산을 중심이 되는 만주벌판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꺼림칙할 것이다. 여기서 거의 공통적으로 고구려의 크기가 사방 2000리라는 것이며, 요동 동쪽 1000리라는 것이다.
먼저 A『後漢書』(25∼219년간)로써는 요동이 기점이 되어 그 남쪽은 조선과 예맥이 있었고, 동쪽에 옥저,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쪽의 朝鮮은 어떤 의미일까? 기점이 되는 요동은 과연 어디일까? 나라의 크기가 사방 2000리라면, 750㎞(1尺을 20.81㎝로 계산)이다. 요동에서 1000리라면, 375㎞이다. 이 요동이 요수(遼水; 遼河)를 지금의 요동반도가 있는 동경 123°선상으로 본다면, 거기서 동쪽으로 백두산 서쪽의 중강진(中江鎭)쯤이 1000리가 된다. 그러면 거기서 동쪽으로 2000리까지가 고구려의 강역이라면, 동경 135°선까지로 루드나야프리스탄(Rudnaya Pristan)이 옥저와의 경계가 된다는 것이며, 그 옥저는 결국 동해 바다 가운데 있게 되는 웃지 못할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옥저가 있는 곳을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동쪽으로 시호테알린산맥(Sikhote Alin Mts.)이 있는 곳으로 붙여 놓거나, 한반도의 원산(元山)이 있는 곳으로 붙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사료의 고구려 강역이 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지금의 한반도 북쪽에 설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져야 한다.『삼국유사』에는 소동파(蘇東坡: 蘇軾: 1036∼1101)가 지은『지장도(指掌圖)』에 "진한(辰韓)의 북쪽에 남흑수(南黑水)·북흑수(北黑水)가 있다. …흑수(黑水)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옥저(沃沮)는 장성(長城)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 장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이 만리장성의 남쪽에 옥저가 있었다는 것을 한반도의 동북쪽 바닷가로 옮겨놓아서는 안된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쯤 되는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의 기련산(祁連山)·랑남산(廊南山)에서 흘러서 장액현을 휘돌아 흐르는 장액하(張掖河)가 곧 흑수(黑水)요, 약수(弱水)가 흐르는 지역이다.
사료 B『三國志』(220∼265년간)에 부여도, 고구려도 그 크기가 사방 2000리라고 하였다. 부여는 현도에서 1000리쯤 되고, 그 남쪽에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에는 선비가 있으며, 북쪽은 약수가 있다고 했다. 통상 현도가 요동이 있는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 동쪽 1000리에 있다는 부여는 A의 고구려의 위치와 중복되므로, 부여의 남쪽에 고구려가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사료에서 부여와 고구려의 기록에서 나타낸 나라들의 상대적 위치가 매우 다르다.

『三國志』로 보면, 고구려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그 북쪽에 약수가 있다는 것이다. 약수는『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약수(弱水)는 장액군(張掖郡) 산단현(刪丹縣)에 있다."고 했고, 또 "약수는 서해(西海)의 산에서 흐르는데, 서해는 지금의 서녕위(西寧衛) 성 서쪽 300여 리에 있다. … 이것은 부여·읍루의 북쪽 경계를 거쳐서 동해(東海)로 들어간다."고 했다. 장액군은 지금의 중국 대륙의 서쪽인 감숙성에 있다. 바로 그곳에 약수가 있고, 거기에 부여니 고구려니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동쪽으로 1000리라면, 녕하자치구가 있는 오르도스(Ordos; 顎爾多斯) 서쪽의 은천(銀川)과 란주(蘭州)가 있는 황하유역이 되며, 그 동쪽에 고구려 땅이 2000리가 된다는 것이며, 그 동쪽의 하북성 일대에 옥저, 부여의 동쪽이고, 고구려의 북쪽에 읍루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읍루는 곧 오르도스의 동북쪽이 되며, 만리장성 북쪽 화림(和林)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여가 長城, 즉 萬里長城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곧 감숙성 장액군 북쪽의 가유관(嘉 關)·옥문관(玉門關)·돈황(敦煌)의 북쪽이고, 고비사막(Gobi Desert)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사료 C『宋書』(487∼488년간)에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밖에 고구려·백제가 있었다. 그 뒤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가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진평군·진평현에서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평(晉平)"이라는 말은 晉나라의 터전을 말하는 것이므로, 산서성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이 요서라는 것은 1911년 손문(孫文) 이후의 역사가들이 말한 요동반도 북쪽의 요양(遼陽)·심양(瀋陽)이 있는 요하가 기준이 되는 서쪽을 말한 것이며,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이라는 것은 1911년 이전의 역사에서는 녕하자치구가 있는 은천·난주가 있는 남북으로 흐르는 황하의 줄기가 기준이 되는 동쪽인 녕하자치구와 섬서성 지역을 말한다.
사료 D『梁書』(629∼636년간)는 고구려가 漢나라(BC. 206∼AD. 220) 때 현도군에서 魏나라(220∼265) 때 요동의 동쪽으로 옮겨와 요동에서 1000리쯤 된다고 했으며, 그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 요수(遼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220년 이전에는 요수(遼水)의 훨씬 서쪽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遼水는 遼河이다. 遼水와 遼山을 중심으로 遼州(요주)·遼縣(요현)·遼山縣(요산현)·遼東郡(요동군) 등의 이름이 생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遼州가 산서 석양현(昔陽縣)이라 했는데, 遼山縣·箕州·儀州·樂平郡·南遼州·遼東郡·遼陽縣이라고도 불렸으며, 遼를 료(僚: 人변 대신 車)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車)水·료(僚: 人변 대신 車)河·료(僚: 人변 대신 車)陽이라고도 하며, 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水·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河라고도 하며, 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水·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縣이라고도 한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산서성에 있다. 물론 하북에도, 강서에도, 열하에도 이런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디 뿌리는 이보다도 훨씬 서쪽 지역 - 적어도 녕하자치구 서쪽 황하이고, 이보다 서쪽인 약수(弱水)가 요수(遼水)임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료 E『魏書』(386∼550년간)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이고, 동쪽으로 책성(柵城), 남쪽으로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으로 예전의 부여라고 했으며, 나라의 길이가 남북으로 1000여 리나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 숙신 지역에 물길(勿吉)이 있는데, 낙양에서 5000리라고 하였다. 다른 사료들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동쪽에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남쪽이라고 한 것이 특징이며, 이로 보아 고구려가 상당히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쪽의 책성을 요즘의 훈춘(琿春) 일대인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라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었기 때문에 결코 한반도 북부의 훈춘 일대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북쪽에 부여이고, 남쪽에 소해라면, 그 소해는 섬서(陝西) 남쪽, 사천(四川) 지역의 대강(大江: 長江·揚子江)의 줄기인 어느 샛강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이고 낙양에서 5000리쯤 되는 곳은 몽골고원(Mongol Plateau)의 알타이(Altay)가 있는 지역이 물길(勿吉: 靺鞨)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료 F『周書』(557∼581년간) 고구려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요수가 있으며, 남쪽은 백제, 북쪽은 말갈과 붙어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사료 D에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백제가 동서로 450리, 남북이 900여 리라고 하여, 그 크기가 한반도의 상황에 맞도록 짜여져 있다. 그런데 사료 G『南史』(420∼589년간)에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 밖에 있다고 했으니, 아무리 따져봐도 그 거리 5000리로써 결코 한반도에다 맞출 수는 없다. 더구나 남쪽과 북쪽에 고구려·백제와 붙어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오히려 신라의 남쪽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며, 북쪽의 백제와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의 중국 대륙일 수밖에 없다.
사료 H『北史』(386∼618년간)는 사료 F와 다르지 않다. 다만 백제는 동쪽에 신라이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인데, 소해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 소해는 물론 사료 E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백제의 크기는 사료 F와 같은 설명이다.
사료 I『舊唐書』(618∼907년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군의 옛땅으로 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는데, 크기가 동서로 3100리이고, 남북으로 2000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라고 한 것이 마치 한반도 북부가 낙랑군이고, 고구려라는 것으로 심어놓은 것 같다. 그런데 백제가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다는 말은 한반도의 여건으로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며, 동북쪽에 신라가 있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른다는 말은 한반도의 여건에 매우 근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어서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고 한 말은 그 바다를 한강(漢江)으로 본다면 모르되, 그것을 바다라고도 할 수 없고, 게다가 신라의 크기는 동서로 1000리, 남북으로 2000리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결국 지금의 중국 대륙을 말한 것이다.
사료 J『新唐書』는 앞에서 설명한 사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이한 것은 고구려의 도읍지가 평양성인데 장안(長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고, 신라의 동쪽은 장인국(長人國)에 닿는다고 했으니, 이 또한 한반도의 여건에 전혀 맞지 않는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신라의 동쪽은 울릉도 독도가 있는 파도 이는 동해 바다이다. 아마도 이 장인국이라는 것이 한반도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료를 검증해 보았을 때, 결코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거나, 그곳을 중심으로 만주벌판이라는 곳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 훨씬 서쪽으로 5000리나 6200리 서쪽으로 옮긴 곳이라야 설명이 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도읍이 평양이고, 그곳이 장안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곧 고구려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태돈이 말하는 고구려의 강역(疆域)이나, 오종철(吳鍾哲)의『다시찾은 고구려정사(正史)』든, 구자일(具滋一)의『고구려발해지리사』든 이들 또한 약간의 역사전개의 발전은 있었을지라도 고구려의 강역을 비정(比定)에는 옳다고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강역의 뿌리에 접근하기에는 아직도 멀다는 것이며, 그들이 연구하여 제시한 고구려의 지도는 마치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서, 강역의 문제만큼은,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발해사》연구는 어디까지인가?   

요즘 중국이란 나라에서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다는 동북공정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발해역사는 어떻겠는가? 이것은 중국의 한국사 왜곡문제를 고친다고 하면서도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발해사를 얼마만큼 연구하고, 어떤 성격으로 알고 았는가? 한번 보자.

발해사만큼 우리 나라의 역사 가운데서도 늦게 연구가 시작된 것도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 나라일까? 할 정도로 연구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나라 학자들의 마음가짐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연구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이런 지적을 할 수 있는 것도 발해를 연구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발해를 인근에 두고 있는 나라들은 한결같이 자기 나라의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中國(중국)은 발해를 唐代(당대) 하나의 地方封建政權(지방봉건정권)으로 파악하고, 蘇聯(소련: 러시아)는 중국이나 주변국과는 상관없고, 그들은 단지 말갈족의 국가로서 발해를 이해함으로써 소련 영내에 여기저기에 보이는 발해 관련 유적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발해를 조선의 역사에서 빼내어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변국들의 연구자세가 우리와는 다르다. 이미 일본에서는 "滿鮮史觀의 일환으로서 만주지역에서 발생한 고대왕국으로서 주변국, 특히 중국이나 한반도의 역사 주체와는 상이한 독립된 역사 주체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朝貢國으로서의 입장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포함한 그 북부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했음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연구는 단연코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히 연구되어 1940년 이전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자료를 축적하였으며, 그 뒤로도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이론적 배경을 삼고자 대외관계인 유민(遺民)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하였다.
반면에 지금의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 나라보다는 일찍 연구가 되었지만, 일본보다는 훨씬 미치지 못하며, 좀은 느긋한 느낌을 받으며, 그래도 상당히 일찍부터 연구되어 많은 자료가 축적되어있다.
그런데 막상 그 역사의 주체인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가? 일제식민주의 시대에는 일본인의 감시와 통제 때문에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1965년 이전까지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연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1980년에 和龍 龍頭山에서 定孝公主 무덤과 묘비 및 벽화가 발견되어 (발해) 연구에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리하여 1980년대에 들어와서 발해사 연구의 분량이 상당히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송기호(宋基豪)나 한규철(韓圭哲) 자신도 발해에 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발해를 연구하는 공간을 언급한 말을 찾아보면, "발해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동북부(만주)와 소련 연해주 및 북한 북부 지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발해사도 자연히 중국, 소련, 한국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며, 송기호는 류득공(柳得恭: 1749∼?)이 지은『渤海考(발해고)』를 번역하면서 류득공이 31살(1778년) 때 지은 시『二十一都懷古詩(이십일도회고시)』를 쓸 때만 하여도 "주제가 한반도 안에만 국한되었고, 더구나 한강 이남의 역사에 중점을 두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반면에『발해고』와『사군지』는 한강 이북의 역사로 중심이 기울면서 북방의 역사에 중점을 둔 역사서이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발해를 끼운 대씨가 고구려인이고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고 했으면서도 그가 그 본문의 해설인 각주에는 한결같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에 지명을 대비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발해에 대한 강역이나 역사문화 내지 고고학적 접근이 한반도의 북부를 포함한 만주 일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제식민 사학(詐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로 류득공이 한반도와 만주 지방을 발해로 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지리에 관한 고찰[地理考]에서『新唐書(신당서)』『遼史(료사)』를 참고로 했으며, 거기에 숙신족(肅愼族)이 살던 곳이니, 예맥족(濊貊族)이 살던 곳이니, 옥저(沃沮)·부여(扶餘)·읍루(손手변+邑婁)·솔빈부(率賓部)·불녈부(拂涅部)·철리부(鐵利部)·월희부(越喜部) 땅이라는 말을 했으면서도 "숭산(崇山)·위수(물水변+爲水)·옥저(沃沮)·승평(昇平)·환도(桓都)·부여(扶餘)" 등등이 "어느 주(州)에 속했는지 알 수 없다거나, 의문스럽다."고 한 것은 분명 류득공 자신이 표현한 글이 아니라고 본다. 어찌 류득공이 하남성 登封縣의 숭산을 모르고, 산서성 영제현(永濟縣)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들어가는 규수(계집女+爲水) 내지는 호남 녕향현(寧鄕縣) 대위산(大물水변+爲山)에서 발원하여 상수(湘水)로 들어가는 위수(물水변+爲水)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더구나 옥저·부여·승평·환도를 모른다니, 이 어찌 될 말인가?! 이런 표현은 김부식(金富軾)의『삼국사』의 지명을 모른다고 했던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아무리 학자들마다 발해가 극동 지역에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인정한다면, 그 고구려의 강역이 어딘가를 따져야 할 것이며, 그들의 민족 구성의 원천을 따져야 할 것이다.
"발해왕국은 말갈의 粟末部人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소련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건립되었던 정권으로서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도합 229년간 지속되었다."고 하였다.
왕승례(王承禮)의 발해에 관한 인식이 이미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역사전개에 발전을 엿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발해가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이라고 하였으면서도, 그들이 중국 동북부 내지 소련 연해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갈족이 그곳에서 터전을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진정 말갈(靺鞨)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그는 "수·당 시기의 말갈은, 周·秦으로부터 西漢에 이르기까지 肅愼이라 불렸고, 東漢시기에는 읍(손手변+邑)婁라 불렸다. 그리고 魏·晉시기에는 肅愼과 읍婁의 명칭이 함께 나타나며, 南北朝시기에는 勿吉이라 불렸다."고 하였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길(勿吉)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옛날의 숙신(肅愼) 지역이다. … 낙양에서 50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역시 "숙신 = 물길"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한복판에 산이 있는데, 그 산을 불함산(不咸山)이라 하며, 그 산을 중심으로 숙신이란 나라가 있다."고 했다. 이 숙신이 곧 조선이요, 그 조선산은 곧 불함산이요, 이 불함산이 설산(雪山)이요, 백산(白山)이며, 백두산(白頭山)이며, 천산(天山)이며, 한탱그리산(汗騰格里山 : Hantengeri Mt.; 해발 6995m)이라고 한다. 여기서 Hantengeri의 tengeri는 단군(壇君 : 檀君)을 뜻하며, 이것은 곧 박달임금(檀君王儉) 이전의 제사장(祭司長)을 기리키는 말이다.
『史記(사기)』「五帝本紀(오제본기)」에 虞(우)임금이 "남무교지,…북산융발식신.(남쪽으로 교지(交 )를, … 북쪽으로 산융(山戎)·발(發)·식신(息愼)을 다스렸다.)"고 했다.
이 식신(息愼)이 무엇인가?
정현(鄭玄)은 이에 대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식신을 숙신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쪽에 사는 이족(夷族)이다.)"고 하였다. 역시 "식신 = 숙신"임을 말했다.
그러나 이런 부족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졌던 이름인데, 숙신(肅愼)이라는 이름은 春秋戰國에 불렸던 것이며, 뒷날에 읍루(손手변+邑婁: 漢魏代)·물길(勿吉: 南北朝時代)·말갈(靺鞨: 隋唐 이후)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이들이 10세기 때 고려와 송(宋)나라가 여진이라 했고, 생여진(生女眞)·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며, 숙여진은 거란의 지배권 안에서 생활한 반면에, 생여진은 거란의 지배권 밖에서 흩어져 살았으며, 동북 방면의 여진을 동여진(東女眞) 또는 동번(東蕃)이라 했고, 서북 방면의 여진을 서여진(西女眞) 또는 서번(西蕃)이라고 하였다.
『晉書(진서)』「四夷傳(사이전)」에서도 "肅愼氏一名 婁 在不咸山北.(숙신씨를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 "숙신 = 읍루"이다.
숙신이 부여이고, 그곳은 감숙성의 만리장성의 서쪽 끝부분이 있는 지역에 있었으니, 발해 또한 그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물론 그곳이 옛 고구려 땅이었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에는 고구려 북쪽에 있었던 숙신(肅愼)을 물길(勿吉)이라 했으니, 읍루( 婁)와도 같다.
이 물길은 만주어(滿洲語)로는 "烏稽(오계)·窩集(와집)·아집(阿集)"으로도 번역되는데, "山野密林"이라는 뜻이라고 했지만, 우리말의 "물[水]"을 "勿(물)"로. "길[道·路]"을 "길(吉)"로도 이두로써 바꿔 쓰기도 하므로, "강물이 많이 흐르는 지역"을 뜻하며, 이것은 "만주(滿洲)" 곧 "강물이 많이 흐르는[滿]" "강이나 호수로 둘러싸인 지역[洲]"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 만주(滿洲)의 만(滿)은 두만강(頭滿江←滿江)의 만(滿)과 같은 지역을 뜻하며, 이곳은 섬서성 북부·녕하자치구 북부로서 은천(銀川)·포두(包頭)·하곡(河曲) 사이의 황하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곳을 흐르는 황하가 바로 두만강이다.
두만이니, 물길이니 하는 말뜻이 이러하므로, 왕승례(王承禮)가 지은『발해의 역사』에서 고고학적으로 접근시킨 이론은 그들이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에 발해를 묶어두고, 그들의 지방봉건정권으로 격하시켜 그들의 역사 속으로 넣으려는 의도는 잘못된 주장임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新唐書(신당서)』「渤海傳(발해전)」에, "숙신의 옛 땅에다 상경(上京)으로 삼아 룡천부(龍泉府)라 하였다."고 한 곳을 "상경룡천부는 현재의 흑룡강성 寧安縣 渤海鎭에 해당한다."는 말은 다시 검증되어야 할 과제이다. 결코 그곳이 상경일 수 없다.
말하자면,『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길림성(吉林省) 녕안현(寧安縣) 동남쪽"이라고 하였지만, "회녕부가 상경(會寧府爲上京)"이라고도 했으므로, 이 회녕부는 숙신 지역인 회녕주(會寧州)요, 회녕현(會寧縣)이요, 회주(會州)이며, 감숙성 정원현(靖遠縣) 동북쪽에서 서녕현(西寧縣)까지의 지역이다. 상경(上京)의 上은 공간적으로 위쪽·북쪽을 뜻하기도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먼저·지난·이른 때[先·前·已]를 말하므로, 도읍을 먼저 세웠던 곳일 것이다.
그리고 동경남원부(東京南原府)는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했는데, 길림성 혼춘현(琿春縣) 부근이라고 했지만, 경주(慶州)가 있는 곳이므로, 파림(巴林)서북쪽의 객라무륜하(喀喇木倫河) 부근일 것이다.
그리고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남경이 조선의 함경도 경성(鏡城)이라고 했지만, 경성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이 남해부는 옥저(沃沮)땅에 있었고, "옥저(沃沮)는 장성(長城)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 장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이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다는 옥저는 곧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쯤 되는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의 기련산(祁連山)·랑남산(廊南山)에서 흘러서 장액현을 휘돌아 흐르는 장액하(張掖河)가 곧 흑수(黑水)요, 약수(弱水)가 흐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서경압록부(西京鴨 府)는 서경이 조선의 평양 서쪽의 록주(祿:示대신 물水변州)라고 하였지만, 정확한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 관할에 있는 풍주(豊州)가 평양 서쪽이라 했으니, 이곳은 내몽고 오르도스(鄂爾多斯) 우익(右翼) 땅인 오원현(五原縣) 부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흥주(興州)가 있는 곳이며, 흥주는 흥경(興慶)이요, 흥경(興慶)이 흥경(興京)이니, 이곳은 화림지역인 호화호특(呼和浩特)이다.
이렇게 오경(五京)이 있는 지역의 중심은 내몽고자치구의 중심부가 되는 중경이 이라는 흥경인 호화호특 지역이 된다.
그래서 발해사를 보는 눈이 한반도를 벗어나야 제대로 보일 것이다. 비록 석정정민(石井正敏)이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 당의 세력도 몰아내어 간신히 한반도를 통일하였다고 막 생각하려는 참에, 당의 속박을 벗어난 말갈인을 중심으로 하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땅에서 일어났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라가 새로이 일어난 발해에 위협을 느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주장하는 이론은 상당한 부분을 납득할 수는 있지만, "신라가 간신히 한반도를 통일하였다"는 논리는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통일한 王氏의 고려시대에는 발해"라는 논지도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심어놓으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원 대륙을 통일하였던 것이며, 그 북쪽 -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말갈인으로 취급받던 고구려의 유민(遺民)이요, 그들이 발해를 세웠던 것이며, 그 말갈인 또한 시대에 따라 물길이니, 식신이니, 읍루니, 여진이니 하면서 다르게 불려진 이름이며, 우리 조선 민족의 하나였던 배달민족인 것이다.

《한국열국사연구》가 말한 샐러드 그릇은 ?  
                                                      
우리는 고대역사를 연구하면서 여러번 딜레마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딜레마란 연구를 아니 할 수도 없고, 계속 연구하자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순조롭게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체험을 수 차례 겪기도 했었다. 그런 딜레마에서 해쳐나올 수 있는 묘책/방법이 이제는 나에게/우리에게 발견되었다. 그것이 조선의 강역의 위치다.
그 조선의 강역을 지금의 중국대륙 자체에 놓고 보면 한결같이 술술 풀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역사/유물/유적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강역이 먼저 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주는 역사연구서의 하나인『한국열국사연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열국사연구』의 저자 윤내현은 그 머리말에서『용비어천가』의 구절을 맨 앞에다 인용해 놓았다. 그만큼 뿌리 있는 역사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 "아래ㅏ"는 현대의 "ㅏ"로 처리하였음)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새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우리 역사를 두고서 지적한 윤내현의 시각은, "한국사 가운데 가장 연구가 부진한 부분은 고대사로서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이다. 이 시대는 한국사의 뿌리가 되는 부분이다."(윤내현,『한국열국사』(지식산업사, 1998), p.3)고 제대로 본 것 같다. 역시 위의 노래를 인용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체계가 올바로 서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연구의 초점을 한국 고대사의 체계를 바로잡는 데 맞추어져 있다고 하였으며, 그 비유를 여러 종류의 재료로써 샐러드를 만들 듯이 세계 여러 민족이 모여 자신들의 가치관과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윤내현,『한국열국사』(지식산업사, 1998), p.4) 이것은 학자답게 좋은 비유로써 역사를 전개하고자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토록 훌륭한 비유로써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된다는 그 말이면 충분할 텐데, 구태여『한국열국사연구』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비판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분명『한국열국사연구』의 논리에 함정(陷穽)이 있다. 그 함정은 자만(自慢)이요, 초기 인식의 부정확이다. 그 초기 인식은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았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식민사관이다. 윤내현의 이론에 식민사관으로 일관되었다고 한다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는 하바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를 수학했던 사람이고, 그 대학에서 인류학과 객원교수를 지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사관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주눅들 것이며, 그 앞에서 역사에 관한 한 명함도,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런 학식 높은데도 불구하고『한국열국사연구』전개의「여는 글」에서도 맨 첫 장에 "열국시대 한민족의 지배지역"을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그 활동 무대의 중심이 한반도 서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식민사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로 들고 싶다. 그 중심 반경을 2000㎞으로 표시했으며, 무려 2800㎞쯤 되는 광서성 남부의 邕寧縣(옹녕현)까지 긴 화살표가 표시되어있다.
그러면서 그 뒤로 한결같이 철저하게 고조선의 역사 무대는 흑룡강 이남, 요하 이동의 한반도로 국한시켜 놓았다. 낙랑·대방은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 옆에다 옮겨 놓긴 했지만, 그것은 고구려 이전의 짧은 순간으로 이해될 수 있게 그려놓았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맨 첫줄에 나오고 있다.
"열국사는 고조선의 뒤를 이어 한반도와 지금의 遼河 동쪽의 만주에 한민족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던 시기의 역사이다."(윤내현,『한국열국사』(지식산업사, 1998), p.11)고 단정하고 있는 윤내현의 주장은 "지난날 고구려나 백제·신라를 한국사에 처음으로 출현한 국가로 상정하여 국가 기원 문제를 논했던 것도 고조선사와 열국시대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결과였다."(윤내현,『한국열국사』(지식산업사, 1998), pp.13∼14)고 지적한 것에 이미 자신에게 모순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국시대를 연구한 최초의 연구가로 자리하고 싶은 뜻에서 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고조선사와 열국시대사라면 분명 우리가 배달민족이요, 동이족이라는 말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로서 전개했어야 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書經》에 '…東夷에서는 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三國志》卷30, <烏丸鮮卑東夷傳>. "書稱 …東夷有肅愼之貢 皆曠世而至 其遐遠也如此.")는 내용이 있다."

그는 이렇게 겨우 한마디 "東夷"만을 인용하는 데 그쳤으며, 그 뒤로도 몇 번의 언급은 있으나, 그들의 활동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다. 그는 많은 史書들을 훑어본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그러나『中國歷史地圖集』(第1冊)에도 분명하게 九夷(東夷)의 활동 지역이 회수(淮水: 淮河) 서쪽까지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夏·商(殷)·周가 대륙에서 흥망성쇠를 할 때에 어느 민족 때문이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사료를 빼고서 그 많은 책들을 섭렵한들,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천 리에 있고,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거나,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 리에 있는데 각각 그 땅은 사방으로 2천 리이다."(《後漢書》卷85, <東夷列傳> "夫餘國 在玄 北千里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地方二千里")고 인용한데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나라는 모두 고조선의 후예들이다. 고조선이 아사달이요, 왕검성(王儉城)이요, 평양(平壤·平陽)에서 도읍하였다. 平陽(평양)이 말 그대로 아사달[朝陽]이며, 산서성 림분현(臨汾縣)이요, 옛날 요(堯)나라의 도읍지이며, 平壤(평양)이면, 그곳이 장안(長安)이요, 호경(鎬京)이요, 서경(西京)라고『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밝혀 놓고 있다.
부여의 북쪽에 있는 약수(弱水)를 윤내현은『한국열국사연구』에서, "지난날 일부학자들은 松花江으로 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黑龍江이라는 데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고 하여 동북삼성에 있었다는 데는 변함이 없고 오직 북쪽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약수는『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장액군(張掖郡) 산단현(刪丹縣)에 있다."고 했고, 또 "약수는 서해(西海)의 산에서 흐르는데, 서해는 지금의 서녕위(西寧衛) 성 서쪽 300여 리에 있다. …이것은 부여·읍루의 북쪽 경계를 거쳐서 동해(東海)로 들어간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弱水: 在張掖郡刪丹縣 … 弱水自西海之山 西海今西寧衛城西三百餘里 … 歷夫餘 婁之北境而歸於東海")고 했다.
여기서 서해는 청해(靑海)이다. 이 동쪽 서녕위가 있다. 장액군에 있는 약수를 흑수(黑水: 黑河)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돈황(敦煌)이 있다고도 했다. 이곳은 감숙성 최북단이요, 신강성 동쪽이다. 이곳이 부여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중국 대륙 서쪽에서도 서쪽을 말한다.『한국열국사연구』에서 주장하는 위치는 전혀 근거없이 일본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송화강에서 북쪽으로는 넓혀지긴 했어도 결국 동쪽의 극이며, 실제 내가 지적하는 곳은 그보다 1만 리나 되는 서쪽의 극이다. 극과 극의 차이다.
이것이 고조선의 위치를 밝힌 곳이므로, 그 후대에 적은『명사(明史)』「조선전」에서 "한(漢)나라 이전에는 朝鮮이라 하였다.(漢以前曰朝鮮)"는 말과 잘 연계된다. 그래서 고조선은 곧 이런 강역의 범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漢: BC. 206∼AD. 220)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이 한(漢)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漢나라의 위치가 어디인가? 열국(列國)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므로, 漢나라가 있었던 곳에서 열국[十國]이든 백국(百國)이든 찾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섬서성 중심에서 반경 몇 백㎞, 아니면 몇 천㎞가 될 것이다. 바로 열국시대는 그곳에서 흥망을 이루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결코 한반도 중심에서 조선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이제부터라도 그 역사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삽목(揷木)으로 옮겨놓은 땅에 분재(盆裁)되었으니, 본지(本地)로 그 역사를 옮겨 놓으면, 그 삽목된 땅이나 본지 모두 원상복구를 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사신론》에 반박한다  

이 글은 좀 진부한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에 비판해본다.

우리 나라 역사책 가운데서 가장 권위있고 정평나 있는 책은 어느 대학에서도 교재로 쓰이고 있는, 많은 책도 있지만, 아마도, 이기백(李基白)이 지은『韓國史新論』일 것이다.
이기백은 이병도(李丙燾)와 더불어 우리 조선사를 주도해온 거두였다. 그들이 지은『한국사』로써 우리 젊은 학도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가르쳤다.
여기서 이기백은『한국사신론』이라 하여 학계에 좋은 반향을 많이 얻은 바 있다. 그 책이 각 대학에서 교과서로 채택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처음 논조가 서장(序章)에《韓國史의 새로운 理解》라는 데서 <主體性의 認識>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인상적이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토록 좋은 반향을 일으킨『한국사신론』에 대하여 아직까지 그 이상의 발전이나, 어떤 반론도 제기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에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한국사신론』이 거의 가치 없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곧 이런 역사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을 달리하여 조선사 - 한국사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이기백의『한국사신론』가운데 그 서장에서 주장하는《한국사의 새로운 이해》가 얼마만큼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 논리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병도나 변태섭(邊太燮)·한우근(韓佑劤) 등의 한국 역사에 관한 논조도 마찬가지다. 요즈음이라 하여 변화된 내용은 거의 없다.
끝내 이기백은《韓國史의 새로운 理解》라는 차원에서 식민사학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논리를 펴려고 했지만, <主體性의 認識>에서 "半島的 性格論"은 잘못된 논리임을 필자는 지적해둔다.

半島的 性格論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반도적 성격 내용은 참으로 황당하다. 그들은 한민족의 기백을 까뭉개기에 충분한 논리를 전개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주장은 누구에게나 감명 깊을 것이다.
이기백의 주장도 이 바탕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主體性의 認識> 가운데서 "半島的 性格論"이다. 그는 "소위 事大主義는 韓國의 면할 길 없는 운명이라는 주장으로 기울게 된다."는 말로써 일부 日本學者들의 주장을 일축하려고 하면서, "日本의 溫情的인 支配를 받음으로써 韓國은 半島史的인 性格을 지양할 때를 얻었다는 것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면할 수 없는 선천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는 것이다."고 한 것이 그의 반박하고 있는 큰 줄거리이다.
이것은 반박하는 논리라 할 수 없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선천척인 운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인가?
결국은 이기백 자신의 생각일 뿐이며, "地理的 決定論을 가지고 歷史를 해석하려는 이론이 우리는 承服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半島的 性格論을 반박한 것 같지만, 그 반도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모순을 낳고있다. 다시 말하면, 이기백의 이론은 그 반도적 성격론을 반박한다는 것이 朝鮮史를 韓半島에 묶여진 역사에서 전개한 논리이며, 그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흔히 事大主義라는 술어로 요약되어온 韓國史의 대외적 성격에 있어서도 그 결정적 요인을 地理的 條件에서 찾으려고 함은 잘못인 것이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가 결론 내린 이 말 자체가 조선사 -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라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日本人들은 겨우 1935년부터 "半島的 宿命論"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1935년에 도엽암길(稻葉岩吉)·조산희일(鳥山喜一)이, 1940년에 삼품창영(三品彰英)이, 1950년에 화전청(和田淸)·암정대혜(岩井大慧)가, 1951년에 사방박(四方博)이라는 학자에 의해 한일합방의 타당성을 꾸미면서 주장된 이론이다.
이기백은 이런 논리가 부적당함을 알았는지 1990년에『新修版 韓國史新論』을 펴냈다. 거기에는 <主體性의 認識>을 <近代 韓國史學의 전통>으로, "半島的 性格論"을 "植民主義史觀의 청산"으로 고쳤지만, 그 기본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업이라고 지적하면서 "식민주의사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이었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정의는 그의 역사이론의 발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론의 본질은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새로운 식민주의사관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전개한 논리에서, "그들(식민주의사관: 필자)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 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 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하는 지적에서 신민주의사관이 주장하는 "한국이 대륙에 붙어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고려 이후로 보충설명으로써 반도사관에서 약간은 빗겨가고 있지만,『신수판 한국사신론』이 한반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함을 볼 때, 역시 그는 한국사 - 조선사 이론에 한계에 다달았을 뿐이다.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라는 이기백의 주장은 옳지만, 그 내용은 식민주의사관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한반도가 조선임을 인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등식의 역사인식이 곧 일제식민사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주장 - 정체성(停滯性) 이론·당파적(黨派的) 민족성·모방적 문화라는 것들은 모두 한반도에 묶어둔 한국사 전개의 보조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라는 것은 지리적 형태가 대륙에 붙은 반도라고 강요함으로써 독립성·자율성을 부정·부인하는 일제식민사관은 조금도 변화가 없다. 그런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변함이 없는 사실에서 조선이라는 무대가 고려 이후라고 한들, 우리의 역사 속에는 한반도가 한국사 - 조선사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적이 없다. 바로 이런 사실을 이기백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백이 가장 싫어하는 사관이 일제어용식민주의사관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 자신이 일제어용학자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했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럽다.
이기백은 일제어용학자들이 조선사를 한반도에 얽어 매놓는 당위성을 명분으로 내세우고자 한 말에 지나지 않은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事大主義論에 대하여

이기백의 事大主義論을 반박한 발상은 地理的 宿命을 주장하는 데 대한 강력한 반박이론으로 제시한 것 같다.
그는 "설사 백보를 양보해서 半島는 大陸에 대하여 무력적으로 劣勢를 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렇다고 韓國은 그러한 武力에 대하여 항상 事大主義的 태도를 취하여 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이 주장에서 살펴보면, 이기백은 朝鮮史가 韓半島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그대로 日本人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 되어 버렸다. 또 "무력에 의하여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하여 왔다고 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韓半島에 귀속된 조선사에서만이 가능한 표현이다. 이것은 이기백의 가장 잘못된 인식이다. 그것은 이기백 자신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에서 전개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기백의 事大主義 반박 논리는 겨우 이렇다.
"만일 事大主義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韓國史上에 있었다면, 그것은 異民族의 무력적 침략의 所産인 경우보다는 오히려 先進文化에 대한 동경심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中國에 대한 慕華思想이 그러한 예임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와 같다."고 하였다.
이기백은 매우 정당한 논리로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사대주의의 발상이 "선진문화의 동경심"으로 풀었다는 것이다.
조선이 선진국이고 문화국인데, 더 이상 누구에게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영향이 조선 역사에 조금은 미쳤을지라도 동경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둘째, 사대주의의 숙명은 中國에 대한 慕華思想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백의 역사 인식이나 지식의 한계로 여겨진다. 中國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것부터 알고 논리가 전개되어야 한다. 그는 그저 중국 대륙이라는 곳을 조선과 분리하여 다른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조선사를 배제하여 역사를 전개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中國은 朝鮮의 지도자들이 활동한 중심 지역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저 서울이란 뜻으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화사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기백의 사대주의론은 지리적 환경의 반도적 성격에서 벗어나려고는 했을망정 조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데서 그의 학문의 논리는 상실된 것이다.
그는『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이 "事大主義論"을 빼기는 했지만, "植民主義史觀의 청산"에 용해시킨 논리의 발전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종전에 주장했던 "事大主義論"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없으므로, 그의 이론은 "事大主義論"에 회귀되어 다시 동조하고 있는 잘못을 저질렀다.

韓國史의 主體性에 대하여

이기백은 역사의 주체성을 논하면서, "異民族의 정치적 지배는 그 民族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펼치는『韓國史新論』에서 한국역사의 主體性에 대해서는 모순에 가득 차있다.

"이를테면, 樂浪文化는 아무리 古朝鮮의 옛 땅에서 번영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韓國文化일 수 없다. 그것은 中國의 文化인 것이요, 中國史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그 樂浪文化에 대하여 일으킨 韓國民族의 反應은 바로 韓國史의 일부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日本의 植民政策 자체는 日本史의 일부일지언정 韓國史는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겪은 韓國民族의 苦悶과 反應은 곧 韓國史가 될 것이다."

이것은, 樂浪文化는 한국문화가 아니고, 中國文化요, 中國史라는 것이며, 단지 韓民族의 反應이 韓國史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를 日本 植民政策으로 비유했다. 日本 植民史는 韓國史가 아니며, 그 속에 있는 韓民族의 反應이 韓國史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며, 모순의 논리이다.
樂浪의 위치가 古朝鮮 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고조선 땅이 어디라는 말인가? 대체로 동북삼성(東北三省)이 있고 시라무렌강 이동의 만주벌판을 포함한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이라야 만이 이런 말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뒷받침으로 고고학(考古學)이 있지만, 이 또한 잘못 입혀진 첫단추에서 그 결과도 마찬가지가 되고 있다. 고조선의 위치 비정(比定)에 대하여 두 가지로 범위를 정한 것이 있는데, 그 사례를 보자.
"하나는 문화의 영향과 교류지역의 범위, 또 하나는 古朝鮮의 활동핵심지역(영역으로서 현대의 강역의 의미와는 다르다.)의 범위 등으로 단계적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선은 한반도의 문화와 동질성 내지는 동일계통문화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지역을 보자. 즉 서쪽으로는 하북성의 동북부 平란(삼水변+欒)·平泉·承德을 포함하는 란(삼水변+欒)河線의 이동, 서북쪽으로는 英金河·老合河의 이남지역, 동북쪽으로는 吉林·長春을 포함하는 第二松花江과 飮馬河의 이남 지역을 구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획안 지역은 통치영역이라고 할 수 없는 단순한 문화의 교류 내지는 영향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古朝鮮은 비파형동검을 산출하는 夏家店上層文化 시기부터 일정한 영역과 체제를 갖춘 고대국가의 확실한 선으로 본다면, 古朝鮮의 핵심영역은 遼河 본류를 중심으로 하고, 서쪽으로는 大凌河에서 동쪽으로 遼東半島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明刀錢이 발견되는 下限線인 淸川江 - 鴨綠江지역은 비파형동검을 출토하는 고분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공백지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였다는 이 고조선의 강역에 논리적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맹점은 지명의 고찰이 포함되지 않았다. 같은 지명이 한반도에도, 지금의 중국대륙에도 숱하게 많다. 그 많은 지명가운데서 유독 대한민국 한반도에 국한된 것으로 풀이한 논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요동이면 요동이지, 요동반도는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이다. 요동이 한반도 북부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20세기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 요동 지역을 포함하여 섬서성과 하남성이 낙랑 지역이요, 그 樂浪은 中國의 중심부에 있었다. 고조선의 도읍이 아사달이요 평양이라 했다. 그 평양이 장안이라고 했다. 장안은 지금 서안(西安)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중국문화니, 중국사니 하는 말은 매우매우 잘못된 주장이다. 조선사 자체가 중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기백은 日本 植民政策을 거들먹거렸지만, 일본 식민정책은 한반도에 국한된 지역사의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조선사의 지배는 아니다. 그들은 조선사 말살의 명분을 쌓기 위하여 그 논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기백의 한국사의 주체성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그는 "표면에 나타난 현상들의 밑에 가로놓인 근원을 파헤쳐 보는 批判的인 眼目이 요구되는 것이다."고 역사의 안목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을 했으면서도, 막상 이기백 자신은 그런 비판적 안목을 갖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의 주체성을 찾으려면, "韓國史의 對外關係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접촉한 異民族에 대하여 취해온 政策이나 態度,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게 한 要因에 있는 것이다."고 한 것은 한국이라는 본질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려는 억측만 벌여놓았다. 특히 "이 民族的인 反應이 바로 그 民族史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민족의 반응이란 무엇인가? 허공에 뜬 몸부림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그 역사의 주체가 주역이었는가? 아니면 지배되었는가?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땅의 역사요, 그 나라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그 지리적 중심의 中原의 朝鮮史에서 이기백은 한반도에 옮겨놓은 조선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민족에 대해 정책·태도 등이 역사의 주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영토를 벗어나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 역사의 주체성을 강조했던 그가『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 그는 한국사의 주체성이란 주장을 없애고, "近代史學의 傳統"과 "傳統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내용으로 자신의 이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논지는 "民族主義史學·社會經濟史學·實證史學"이 "일제 어용사가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하여 한국학자들 자신이 쌓아올린 근대사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성장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사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여 주었으며, 사회경제사학은 전통적인 양반사회의 개혁을 정당화하여 주었으며, 또 실증사학은 한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키는 데 공헌하였다."고 그 역할이 기여한 공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논리이고, 그렇게 발전된 한국사라면 참으로 바람직한 역사관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사를 전개한 논리는 한반도가 조선임을 고착화하고 말았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였다거나, 혹은 또 우리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한 가지 사실로 해서 높이 평가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될 수가 없다. …전통의 비판적인 계승이 필요하다. 민족적 입장에서 …여러 사실을 독자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다분히 전자에 대하여 재야(在野)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태도를 비판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후자에 대해서는 이기백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강단(講壇) 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인식에 경고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기백 자신의 역사관이 가장 옳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에서 주장하는 <韓國史의 體系的 認識>에서 논리의 공동(空洞)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한국사와 그 체계화는 본질부터

이기백은『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 그가 종래에 주장하던 <韓國史와 民族性>과 <韓國史의 體系化>를 <韓國史의 體系的 認識>으로 대체하였다.
그는 한국인의 黨派性이나, 文化的 獨創性이나, 民族性에 대하여 일본식민사학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일본식민사학에 굴복이나 한 듯이 그런 비판 의식이 삭제되고, 더 이상의 주장이 겨우 "人間 중심의 이해·普遍性과 特殊性·韓國史의 時代區分"으로 탈바꿈해버렸다.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 한국사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를 전개한 이기백의 학문은 더 이상 한국사에 유효하지 않으며, 한국사 전개에 발전되지 않는 저해요인으로 작용될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韓國史와 民族性>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사 본질이 韓半島에 국한된 역사의 주장이며, 그나마 반도의 역사마저 한 가지도 밝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선 본토의 中國 - 中原 역사를 왜곡시켰다.
더구나 새로운 이론으로 부각시킨 "人間 중심의 이해"에서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의 역사 연구를 포기한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한국사는 한국인의 역사임에는 분명하지만, 한국의 역사이지, 협의로 인간이 중심된 한국인의 역사는 잘못된 논리라 하겠다.
나라[國家] 땅이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가 없는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역사가 아니다. 그 좋은 본보기로 이스라엘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을 적에는 성경(聖經: Bible)으로,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2000년이나 방황했던 그들이 그들의 역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1968년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여 나라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나라엔 일제시대가 있었지만, 이 때 조선이 당한 고통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역사는 온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정체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정체기가 역사전개의 주역이 될 수 없으며, 한반도가 조선사 - 한국사의 주역이 될 수 없다.
나라가 있는 역사라야 건강한 역사 - 논리 정연한 역사이다. 나라는 영토(땅)·주권·국민(백성·인간)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라에는 인간이 내재되어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이기백이 주장하는 인간중심의 역사로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역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땅은 확장·수복·병탄·합병 등으로 역사의 형성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으로 작용되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도할 뿐이다. 그래서 제정분리니 일치니 하는 역사적 유산이 땅[山河]에서부터 비롯되므로, 결코 땅과 인간을 분리할 수 없으며, 인권·권리·책임·자유라는 종교·철학 등의 형이상학적 학문이 역사 속에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백이 진정으로 한국사 - 조선사를 밝혀서 전개하였다면, 그가 펴낸『한국사신론』의 분량이 450쪽이든, 610쪽이든, 그 가운데서 단 한 마디의 "東夷"라는 낱말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이기백은 어느 민족인가? 누구의 사주로, 어느 나라를 위하여 쓴 글인가?
우리의 역사에서 東夷의 역사를 빼고 나면, 무슨 역사가 이루어지겠는가?!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줄기와 잎은 어떻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에도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하였다.
東夷를 밝히고, 中國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조선의 역사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의 본질을 말한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를 말할 때에 <일본서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열도가 유사이래 일본인 것으로 알고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일본서기>가 내용에서 얼마만큼 진실과 거짓이 포함되어있는지를 한번 보자.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그 일본의 역사의 시작을 말이다.

허구의 역사가 시작되다

『日本書紀』를 번역한 성은구(成殷九: 1906∼1988년)는 한국고대사를 연구한 사람이었는데, 그 책을 번역하여『일본서기』를 재평가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日本書紀』를 연구한 학자를 탄압했다고 밝혀 놓았다.
그 학자는 早稻田(조도전: 와세다) 대학의 교수 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 쓰다사우기찌; 1873∼1961년)이었으며, 1940년(昭和 15) 3월 8일에 기소되어, 1942년(昭和 17) 5월 21일에 비공개 법정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 담당 재판장은 中西要一(중서요일: 나까니시요이찌)이었으며, 그에 대한 판결은 형량이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였다.

"… 仲哀天皇 이전의 歷代에 대하여서는 그 계보에 관한 재료가 존재한 형적이 없고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거의 전하여 있지 않다는 등, 황공하게도 神武天皇으로부터 仲哀天皇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講說을 감히 함으로써 皇室의 존엄을 모독하는 문서를 저작하고, 이를 피고인 岩波茂雄(이와나미시게오; 1881∼1946)으로 하여금 昭和 14년 6월경, 그리고 같은 해 10월경 각 100부, 같은 해 12월 10부를 발행케 하여 …"(成殷九,「解題」『日本書紀』(고려원, 1993), p.12에서 인용한 것임.)

성은구는 "津田左右吉에 대한 이런 단죄는 당시 일본사회의 광기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古事記》《日本書紀》의 두 책은 국가적 聖典으로서 神聖不可侵의 典籍으로 되어 있어 절대로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의 연구의 제일 큰 업적은 記紀의 神話傳說은 불행하게도 민간에 전하여 내려온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점이다. 그리고 민간 傳承도 다소 들어 있을 터이지만, 말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어느 시기에 어떤 지식인, 특히 朝廷의 지식인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으로 논증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는(成殷九,「解題」『日本書紀』(고려원, 1993), p.13) 것을 지적해 두었다.
이 말은 분명 1939년(昭和 14) 전부터《日本書紀》가 明治國家의 이른바 國體觀念에 밀착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에 어떤 지식인의 노력(?)이 일본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백제사를 포함한 고대 역사의 연구가 일본보다도 미진했던 이유를 津田左右吉의 연구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형식(申瀅植)의 변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더구나 津田左右吉 이후 일본인의 연구성과는「三國史記」초기 기록의 불신에 따른 歪曲된 百濟史의 先入觀으로(津田左右吉,「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8, 1921), pp.128∼132) 백제사의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백제 초기 사실의 부인은 대체로 近肖古王(346∼375) 이후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일본인 연구의 일관된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申瀅植,『百濟史』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총서 18,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5)
이런 말들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도 서글프게 한다. 일본인이 1921년(大正 10)에 우리의 역사를 부인했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나,《일본서기》가 일본의 聖典으로 되었다 하여 우리 조선의 역사에 영향이 미쳐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학자의 도리나 자세가 아니다. 津田은 일본인이면서도《日本書紀》가 천황의 존재를 상당부분 부정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태도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다.
성은구의 또 다른 지적은 "《魏志》倭人傳에 卑彌呼(히미고)라 되어 있는 것을 神功皇后라고 想定하고 年代를 결정하는 기축으로 한 것 같다."는 것이다.(申瀅植,『百濟史』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총서 18,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6) 결국 卑彌呼가 神功皇后이 아님 것을 기라고 하였으니, 거기서 이미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임의로 그들의 편의에 따라 "卑彌呼 = 神功皇后"라는 등식으로 역사를 날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日本書紀』를 번역하여 출판한 의의를 밝히면서 "고대의 한일관계를 기록하고 있는《일본서기》를 통해 일본 역사의 근원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천명함과 동시에, 1) 4세기 후반에 일본이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 2)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 3)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한반도 경영설 등 허구에 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역사관을 토대로 서로 유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고려원, 1993),「序文」에서.)
이 말은 곧 『일본서기』는 거짓에 가득 차 있는 책이며, 거짓의 기록은 가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日本書紀』는 大陸史에다 列島史를 짜 맞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日本書紀』는 기본적으로는 中國 大陸史이며, 거기다가 지금의 日本列島의 역사를 약간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다.
『日本書紀』가 중국 대륙사, 곧 조선의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역사라는 것인지, 아닌지를 간략하나마 그 증거를 찾아보자.
첫째, 지금 일본에서 쓰는 한자가 옛날에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쓴 말과 같은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反切을 썼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 예는 이렇다.
"선(嘆의 입口대신불火)火也 音而善反" 곧 "선(嘆의 입口대신불火)은 불이며, 소리는 연(이+션 → ㅇ+ㅕㄴ)이다."고 했다. 이 공경하다·불기운  은『康熙字典』에서는 "人善切·忍善切音 " 곧 "연"이라고 했고, "呼 切·許旱切·虛汗切音漢" 곧 "한"이라고도 했다.
"롱(雨아래龍)此云於箇美 音力丁反" 곧 "롱(雨아래龍)은 오가미(於箇美)라 하며, 소리는 롱(력+동 → ㄹ+ㅗㅇ)이다."고 했다.『康熙字典』에서는 "丁"의 소리에 대해 "丁當當東" 곧 "동"으로 난다고 했으니, 우레소리  은 "盧東切音籠" 곧 "롱"이라 했다.
"尿毛   此云愈磨理 音乃弔反" 곧 "尿毛   은 유마리(愈磨理)라 하며, 소리는 뇨(내+죠 → ㄴ+ㅛ)이다."고 했다.『康熙字典』에서는 尿요, "女巧切" 곧 "뇨"라 하였다.
" 此云之伎 音烏含反" 곧 " 은 시기(之伎)라 하며, 소리는 암(오+함 → ㅇ+ㅏㅁ)이다."고 했다.『康熙字典』에서는 "烏含切·恩含切音 " 곧 "암"이라 하였다. //    
여기서 "오가미(於箇美)·유마리(愈磨理)·시기(之伎)"라는 말은 본디 일본열도에서 쓰던 말이고, "연(이+션 → ㅇ+ㅕㄴ)·롱(력+동 → ㄹ+ㅗㅇ)·뇨(내+죠 → ㄴ+ㅛ)·암(오+함 → ㅇ+ㅏㅁ)"은 지금의 중국 대륙의 남부에 있었던 일본에서 쓰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한자를 반절로 표현하여 읽었다는 것이 입성(入聲) 漢字도 마찬가지로 읽었을 것에서 알 수 있으며, 입성은 조선사람의 발음방식이다. 이것은 곧 일본에서도 한자의 음을 우리 나라 조선 사람이 소리내던 방식으로 소리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日本書紀』의 편찬자의 주무 책임자가 조선사람이거나 조선도래인(朝鮮渡來人)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日本書紀』의 번역자 성은구가 지적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인 학자 금택장삼랑(金澤庄三郞)·전몽수(田蒙秀)씨가 연구한 결과에 人體의 장소와 난 물건과의 연결을 붙인 것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神(保食神: 보식신)의 머리[頭]에는 소[牛]와 말[馬]이 나고, 정수리[ :   ; 두개골]에는 조[粟]가 나 있었다. 눈썹[眉] 위에는 누에[蠶]가 나고, 눈[眼]에는 뉘[稗]가 났다. 배[腹]에는 벼[稻], 음부(陰部)에는 보리[麥]와 콩[大豆]·팥[小豆]이 났다. 天熊神(천웅신)은 보고할 때에 이것들을 빠짐없이 지참하여 天照大神(천조대신)에게 獻上(헌상)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神代上」(고려원, 1993), p.42  "保食神… 唯有其神之頂. 化爲牛馬.  上生粟. 眉上生蠶. 眼中生稗. 腹中生稻. 陰生麥及大小豆. 天熊人悉取持去而奉進之.")

여기서 頭·頂·眉·眼·腹·陰部에서 牛·馬·粟·蠶·稗∥·麥·大豆·小豆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난 장소와 물건 사이에는 조선어 - 한국어라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대응이다. 이들 한국어를 로마자로 쓰면, 頭[마라: mara, 마리: mari]와 馬[말: mar], 盧+項(工업은 글)[자히: chahi; 째(次): chai]와 粟[cho], 眼[눈: nun]과 稗[뉘: nui; 쌀 속에 섞인 벼 알갱이], 腹[배: pai]과 稻[벼: pi ], 女陰[보지: p ti]과 小豆[팥: pat] 등이다. 이것은『古事記』의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日本書紀』의 편찬자 가운데는 조선 - 韓國渡來人이 중요 主務者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무대가 한반도를 포함한 드넓은 중국대륙이니, 이 역시『日本書紀』의 무대가 일본열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월국(越國)에 있었고, 중국 동남부 절강성에서 광동성 지역이다.

일본열도에는 지금의 중국 동남부에 있던 지명이 많다. 그것은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이것은 본디 일본이라는 나라가 중국 동남부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40년(110년)… 이에 日本武尊[일본무존: 야마도 다게루노 미고도]은 '蝦夷(하이)의 흉악한 사람들은 빠짐없이 죄에 伏하였다. 오직 信濃國[신농국: 시나노구니]이나, 越國[월국: 고시노구니]만이 아직도 소수가 敎化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7「景行天皇」(고려원, 1993), p.184  "四十年… 於是, 日本武尊曰, 蝦夷凶首, 咸伏其辜. 唯信濃國越國, 頗未從化.")
"원년(192년) 윤11월의 을묘 초하루와 무오(4일)에 越國이 백조 네 마리를 바쳤다. … 越國 사람이 대답하되, … 그때 蒲見別王(포견별왕: 가마미와게노 미고; 天皇의 배다른 아우]은 越國 사람에게 … 그래서 越의 사람은 參上하여 그 경위를 天皇에게 말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8「仲哀天皇」(고려원, 1993), p.195  "元年…閏十一月乙卯朔戊午, 越國貢白鳥四隻, … 越人答曰 … 謂越人曰 … 爰越人參赴之請焉.")
"40년(110년) …여기에서 日本武尊은 上總(상총: 가미쓰후사]에서 돌리어 陸奧國[육오국: 마치노구노구니]에 들어갔다. 그때 큰 거울을 임금의 배에 걸고 바닷길을 따라 葦浦[위포: 아시노우라]를 돌아 玉浦를 가로질러 건너서 蝦夷의 경계에 이르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7「景行天皇」(고려원, 1993), p.184  "四十年… 爰日本武尊 則從上總轉 入陸奧國. 時大鏡懸於王船, 從海路廻於葦浦. 橫渡玉浦, 至蝦夷境.")

여기서 越國이 지금의 일본열도의 중남부인 信濃山(신농산) 長野·中野[나가노] 지역이며, 陸奧國은 그 동쪽의 福島縣[복도현: 후쿠시마겐]이 있는 지역이다. 陸은 숫자의 바꿈에서 본디 百일 것이다. 그리고 奧(오)는 그 모양이 비슷하지만, 본디  (월)을 바꾼 것일 것이다. 이  은 곧 越이라고『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백월(百 ·百越)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그 지방이 福島縣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이 島는 洲요, 州이다. "섬 →시마"라는 것으로, 福島 = 福州이며, 이곳은 福建省(복건성) 지역을 말한다. 이곳이 곧 백월(百 ·百越)은 "自交 至會稽七八千里" 곧 "교지(交 : 雲南省 西疇縣 서남쪽)에서 회계(會稽)까지 7∼8천 리가 된다."고 했고, "古者江浙 奧之地" 곧 "옛날에는 강소·절강·복건·광동·안남 지역"이라 하였으니, 중국 대륙 동남방 지역이다. 이곳은 역시 백제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은 백제와 그 경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투거나 협상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41년(497년) 춘3월에 紀角宿 [기각숙이: 기노쓰누노스구네]를 百濟에 보내어 처음으로 國郡의 경계를 나누고 빠짐없이 고루 조사하여 향토의 산물을 기록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1「仁德天皇」(고려원, 1993), p.261  " 一年春三月, 遣紀角宿 於百濟, 始分國郡疆場, 俱錄鄕土所出.")
"그때 백제의 임금은 일본의 여러 장수가 하찮은 일로 사이가 나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韓子宿 [한자숙이: 가라고노스구네]들이 있는 곳에 보내어, '나라의 境界를 보이고자 한다. 청컨대, 나와 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韓子宿 들은 고삐[ ]를 나란히 하고 떠났다. 내[河]에 이르렀을 때 大磐宿 [대반숙이: 오이와노스구네]는 밀에게 냇물을 먹였다. 그때 韓子宿 는 뒤에서 大磐宿 의 鞍 [안궤: 구라보네] 뒤쪽의 멍에[橫木]를 화살로 맞추었다. 大磐宿 는 놀아 뒤를 돌아보면서 韓子宿 를 쏘아 떨어뜨리니, 내[河]의 中流에서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신하는 이전부터 앞을 다투다가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 있었는데, 백제의 왕궁에 이르지도 못하고 돌아와 버렸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4「雄略天皇」(고려원, 1993), p.315  "夏五月 …於是百濟王, 聞日本諸將, 椽小事有隙 乃使人於韓子宿 等曰, 欲觀國堺. 請垂降臨. 是以 韓子宿 等   而往. 及至於河, 大磐宿  飮馬於河. 是時 韓子宿 , 從後而射大磐宿 鞍 後橋. 大磐宿 愕然反視, 射墜韓子宿 . 於中流而死. 是三臣由前相競, 行亂於道, 不及百濟王宮而却還矣")

이 말은 일본열도에서는 전혀 필요도, 소용도 없는 말이다. 불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열도와 한반도 전체가 백제이더라 해도, 國郡[나라와 지방]의 경계를 나눌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영해(領海)를 주장한다 하여 그런 현상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이미 바다로써 경계가 이루어져 있는데, 경계가 없다고 하여 경계를 나누어 그 토산물을 기록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중국 대륙이여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韓子宿 들이 나라의 경계 - 백제와 일본의 경계를 백제인에게 보이겠다고 했으니, 그들이 한반도에 와서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인가? 그들이 백제의 왕궁에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하니, 배를 타고 현해탄을 오가면서 한 행위는 아닐 것이다. 만약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로 왔다면, 신라를 거치지 않고 백제로 바로 갔다는 말인데, 그것은 전혀 가능하지도 않다.
이미 신라가 방해하지나 않았는지? 그런 방해를 이겨낼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53년(365년)에 新羅가 조공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 天皇은 竹葉瀨{죽엽뢰: 다가하세]의 아우 田道[다지]를 파견하여, 詔勅을 내리기를, '만약 新羅가 방해하거든 거병하여 공격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병을 주었다. 新羅는 군사를 일으켜 방어하였다. 新羅人은 매일 싸움을 걸어왔다. 田道는 요새를 튼튼히 하고 출격하지 않았다. … 그래서 田道는 연이어 정병으로 그 좌측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군사는 궤주(潰走)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놓아 난입하여 수백 인을 참살하였다. 그 때 네 고을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이끌고 돌아왔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1「仁德天皇」(고려원, 1993), p.264  "五十三年 新羅不朝貢. 夏五月 … 且重遣竹葉瀨之弟田道. 則詔之曰, 若新羅距者, 擧兵擊之. 仍授精兵. 新羅起兵而距之. 爰新羅人, 日日挑戰. 田道固塞而不出. … 於是田道連精騎擊其左. 新羅軍潰之. 因縱兵乘之, 殺數百人. 卽虜四邑之人民而歸焉.")
"9년(465) 3월에 천황은 스스로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 신라는 원래 西方의 땅에 있다. … 내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대마도[對馬]의 바깥으로 떨치자, 신라는 몰래 뒤를 밟아 캐며 고구려의 조공을 방해하여 가로막고 백제의 성(城)을 병탄(倂呑)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4「雄略天皇」(고려원, 1993), p.314  "九年…三月 天皇欲親伐新羅. … 新羅自居西土. … 逮乎朕之王天下, 投身對馬之外, 竄跡 羅之表, 阻高麗之貢, 呑百濟之城.")
"8년(600년) 봄2월에 신라와 임나(任那)와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천황은 임나를 구하려 했다. 이 해 境部臣[경부신: 사가이베노오미]을 대장군에, 穗積臣[수적신: 호쯔미노오미]을 부장군으로 삼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를 도와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장군들은 직접 신라를 목표로 하고,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략하였다. 신라의 임금은 두려워서 白旗를 들고, 장군의 휘하에 와서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의 6城을 할양하고 항복을 원하였다. …장군들이 신라에서 귀환하자, 신라는 또 임나를 침략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2「推古天皇」(고려원, 1993), p.338  "八年春二月, 新羅與任那相攻. 天皇欲救任那. 是歲 命境部臣爲大將軍. 以穗積臣爲副將軍. ( 闕名)則將萬餘衆, 爲任那擊新羅. 於是 直指新羅, 以泛海往之. 乃到于新羅, 攻五城而拔. 於是 新羅王, 惶之擧白旗, 到于將軍麾下而立. 割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六城, 以請服. … 將軍等至自新羅. 卽新羅亦侵任那." )
"31년(623년)… 이 해 신라가 임나를 쳐서 임나는 신라에 복종하였다. 이에 천황은 신라를 토벌하려고 대신들과 의논하고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들었다. … 中臣連國은 '임나는 본디 우리 나라의 內官家[내관가: 우치쯔미야게(貢納國)]이었는데, 신라가 그것을 빼앗았다. 군세를 정비하여 신라를 치고, 임나를 도로 찾아서 백제에게 복속시키자. 그리하는 것이 신라에 속하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田中臣은 '그것은 옳지 않다. 백제는 반복(反覆)을 많이 하는 나라로, 잠깐 사이에 이쪽을 속인다. 저쪽의 말은 다 신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백제에 임나를 부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2「推古天皇」(고려원, 1993), p.357  " 一年…是歲 新羅伐任那. 任那附新羅. 於是 天皇將計新羅. 謀及大臣, 詢于群卿. … 中臣連國曰, 任那是元我內官家. 今新羅人伐而有之. 請戒戎旅, 征伐新羅, 以取任那, 附百濟. 寧非益有于新羅乎. 中田臣曰, 不然. 百濟是多反覆之國. 道路之間詐之. 凡彼所請皆非之. 故不可附百濟. 則不果征焉.")

이 내용들은 모두 일본이 임나를 도와 신라를 공격한 것들이다. 신라가 방해하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는 말은 일본열도에서는 이런 상황은 불가능하다. 군사를 하루아침에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군사를 이동하려면 배가 있어야 하는데, 신라가 방해한다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배로써 이동한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곧 그 지역에 함께 신라와 백제와 일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신라가 서방에 있는 나라[西土]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서쪽에 있는 나라라면, 일본열도가 일본이라면 지금의 한반도가 그 서쪽이 된다. 그러나 그 일본이 지금의 열도가 아닌 중국 대륙 동남부에 있었다고 앞에서도 언급하였으므로, 서쪽에 신라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은 그 동쪽의 절강성 쪽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면은 백제는 이미 신라보다도 더 서쪽에 위치하게 되며, 임나는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 있게 되며, 그곳은 아마도 강서성·호남성·호북성 지역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의 6城"을 신라가 일본에 할양했다는 것은 도로 임나에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2년(663년) 봄 2월 을유가 초하루인데, 병술(2일)에, … 또 신라 사람이 백제 남부의 네 고을을 불태우고, 安德(안덕) 등의 요지를 점령하였다. 避城(피성)은 賊地에 가깝고, 세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田來津[전래진: 다구쓰]의 의견대로 다시 州柔[주유: 쓰누]로 돌아가게 되었다. … 3월에 前軍 장군 上毛野君稚子[상모야군치자: 가미쓰게노노 기미와가고] …를 보내어 2만7000명을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 6월에 上毛野君稚子 등은 신라의 沙鼻岐奴江[사비기노강: 사비기누에] 2城을 함락시켰다. … 가을 8월 임오가 초하루인데, 갑오(3일)에 신라는 백제왕이 스스로 良將을 斬하였다는 것을 알고, 즉시 백제에 침입하여 먼저 州柔를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백제왕은 적의 계략을 이미 알아차리고 장군들에게, '… 나는 몸소 白村(백촌)까지 가서 그곳에서 구원군을 맞이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 9월 신해가 초하루인데, 정사(7일)에 백제의 州柔城은 드디어 唐나라에 항복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7「天智天皇」(고려원, 1993), p.445  "二年春二月乙酉朔丙戌, … 新羅人燒燔百濟南畔四州. 幷取安德等要地. 於是 避城去賊近. 故勢不能居. 乃還居於州柔. 如田來津之所計. … 三月 遣前將軍上毛野君稚子… 率二萬七千人, 打新羅. 六月 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 取新羅沙鼻岐奴江二城. …秋八月壬午朔甲午, 新羅以百濟王斬其良將, 謀直入國先取州柔. 於是 百濟知賊所計, 謂諸將曰, …我欲自往待饗白村.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의 무대는 모두 백제이다. 이 백제가 또한 한반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앞에서도 백제의 강역이 대충 언급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굳이 여기서 더 밝힌다면, 白村이니 白江이니 하는 것이다. 村→縣→州이므로 白州임을 알 수 있다. 이 白州는 白水 유역에 있을 것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白江水: 在湖南祁陽縣東六十里 亦稱白水."라 하였다. 곧 호남성 남부의 기양현 동쪽 60리에 白水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강을 지금은 祁水(기수)라고도 한다. 또 하나는 "안덕(安德)"이라는 지명이다. 이것은 글자를 앞뒤로 바꿔 공주(公州: 熊津) 남쪽에 德安이 있는 것으로 하였지만,『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安德縣이 "산동성 릉현(陵縣)"와 "호북성 경계"에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州柔城이 당나라에 함락되었다면, 이곳은 결코 한반도에 있는 지명일 수 없다. 州柔는 州縣과 柔縣의 합성어이다. 州縣은 "邢丘(형구)·安昌(안창)·武德(무덕)"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동남쪽 40리에 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柔縣은 "산동성 옛 기주부(沂州府) 경계"에 있다고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7「天智天皇」(고려원, 1993), p.444에 "州柔[쓰누]"를 " 留城(소류성)"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전라북도 북쪽의 군산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그려놓은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나(任那)는 강서성·호남성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임나라는 나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그저 부정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임나는 중국 대륙의 남부에 있었으며, 그것도 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 나라가 결코 일본의 일부이거나, 속국이 된 적도 없다.

"7년(207년) 가을 7월에 고구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함께 와서 알현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0「應神天皇」(고려원, 1993), p.230  "九年秋七月, 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 竝來朝.")
"2년(646년) 2월 갑오일이 초하루인데, 무신(15일)… 고구려·백제·임나·신라가 각각 사자를 보내어 調賦[조부: 미쓰기]를 헌상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5「孝德天皇」(고려원, 1993), p.403  "大化二年李月甲午朔戊申… 高麗百濟任那新羅,  遣使, 貢獻調賦.")
"이 해(2년: 30년)에 임나인 蘇那曷叱智[소나갈질지: 소나가시치]가 '우리 나라로 돌아갑니다.'고 했다. … 蘇那曷叱智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곧 붉은 비단 100필을 가지고 가게 하여 임나왕에게 주었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아가버렸다. 이 두 나라의 증오심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6「垂仁天皇」(고려원, 1993), p.151  "二年…是歲 任那人蘇那曷叱智, 欲歸于國. … 故敦賞蘇那曷叱智. 仍齎赤絹一百匹, 賜任那王. 然新羅人遮之於道而奪焉. 其二國之怨, 始起於是時也.")
"大化 원년(645년) …병자(10일)에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각 사자를 보내어 調[미쓰기]를 헌상하였다. 백제의 調 사자는 임나의 사자것까지 겸하여 調를 헌상하였다. …중간에 임나국을 백제에 부속시켰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5「孝德天皇」(고려원, 1993), p.403  "大化元年…丙子 高麗百濟新羅,  遣使進調. 百濟調使, 兼領任那使, 進任那調. … 中間以任那國, 屬賜百濟.")

이 기록으로 보면, 임나는 30년부터 646년까지 그 이름이 나온다. 고구려·신라·백제와 더불어 임나도 일본에 알현하러 가기도 하였으며, 調賦를 바쳤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임나를 좌지우지하고 백제에 귀속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마치 일본에 귀속되어 있는 양하였다. 이 기록대로라면 616년간이나 존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나라를 그렇게 쉽게 주고받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통치의 권력 속성으로 볼 때 불가능한 말이다. 그것도 대한해협이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서로 나누는 협상을 한다는 것은 한반도에 얽어매어 놓은 역사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任那라는 말은 고구려 광개토왕비(414년에 건립)에 나온다. "任那加羅"라는 말은 처음이다.『宋書』(448년 찬술)의「倭國傳」에는 元嘉 2∼20년(425∼443) 사이에 倭國王珍(反正)이 송나라에 入貢하여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自稱하였다는 것이 보이고, 元嘉 28년(451)에 송나라가 倭國王濟에게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를 加受하였다는 것이 보이고, 大明 6년∼昇明 2년(462∼478) 사이에 倭國王武(雄略)가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自稱하고, 이를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렸던 바, 송나라에서는 武(雄略)을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이라고 인정해주었다. 단 백제가 빠졌다는 것과 倭國王이 아니라, 倭王일 뿐이다.
그리고『三國史』의「列傳」에 强首(650년경의 사람)가 한 말로서, "臣本任那加良人"이라는 말과,『眞鏡大師塔碑』(924년에 건립)에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任那王族."이라는 글이 있다. 역시 이들은 임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광개토왕비문에 나온 것으로서 임나의 존재는 辛卯年부터 24년간(391∼414)에 지나지 않는다.

『日本書紀』는 한일합방이 되자 그 왜정시대에 다시 만들어졌다

『日本書紀』는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대체로 우리가 아는 것은『古事記』(712년: 天皇家系의 神話)와『日本書紀』(720년: 日本正史)이다.
내가『日本書紀』를 의심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 쓰다 사우기찌; 1873∼1961)이 1942년(昭和 17) 5월 21일에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문서를 출판"(일본 출판법 제26조 제1항)을 했다는 죄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과 이어서 5월 31일에 일본 국내에서는 내각총리대신 東條英機[동조영기: 도오조오 히데끼; 1884∼1948]가 각 국무대신과 위원을 소집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문교정책과 인구정책의 答申을 심의하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그것은 매우 사실을 파헤친 연구자의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내용에는 성은구의 지적대로 "말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어느 시기에 어떤 지식인, 특히 朝廷의 지식인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으로 논증한 점"이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解題」(고려원, 1993), p.13) 바로 여기에 커다란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日本書紀』의 본문에 "韓國"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韓國"이란 무엇인가?
그저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韓族의 나라"라는 뜻일 수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三韓의 나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너무도 설득력이 없다.
그 다음은 바로 "大韓帝國"이요, "大韓民國"이다. 여기서 "韓國"이라는 이름이 "大韓民國"이 아님은 명약관화하다면, "大韓帝國"일 것이다. 이 大韓帝國은 "1897년"에 년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임금을 황제(皇帝)라고 한 이후부터 한일합방이 된 1910까지의 14년간의 이름이다.
그렇다면『日本書紀』의 날조는 빨라도 1897년, 늦어도 1910년부터 아무리 늦어도 津田左右吉가『日本書紀』를 연구하여 발표한 1921년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0∼14년간 날조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41년(241년)… 大  尊[대초료존: 오우사자기노미고도]은 倭直[왜직: 야마도노아다이]의 할아버지 麻呂[마려: 마로]에게, '倭의 屯田[미다]이 본디 山守의 땅이라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나는 모른다. 아우 吾子籠[오자롱: 아고고]만은 알고있다.'고 하였다. 당시 吾子籠은 韓國에 파견되어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大  尊은  宇宿 [어우숙이: 오우노스구네]에게 말하여, '너가 직접 韓國에 가서 吾子籠을 불러오너라. 밤낮을 쉬지 말고 어서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즉시 淡路洲[담로주: 아와지시마]의 보자기 80명을 지명하여 水手[수수: 가고; 노꾼]로 하였다. 그래서  宇는 韓國에 가서 즉시 吾子籠을 데리고 왔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1「應神天皇」(고려원, 1993), p.245  "大  尊問倭直祖麻呂曰 倭屯田者, 元謂山守地, 是如何. 對言, 臣之不知. 唯臣弟吾子籠知也. 適是時, 吾子籠遣於韓國而未還. 爰大  尊, 謂 宇曰, 爾躬往於韓國, 以喚吾子籠. 其兼日夜而急往. 乃差淡路之海人八十爲水手. 爰 宇往于韓國, 卽率吾子籠來之.")
"6년(462년) 8월 …천황은 … 그 때, 西漢才伎歡因知利[서한재기환인지리: 가후치노아냐노데히도간인치리]가 천황의 곁에 있다가 나아가 상주하기를, '우리들보다 유능한 韓國에 많이 있다. 불러다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4「雄略天皇」(고려원, 1993), p.309  "六年…八月…天皇… 於是 西漢才伎歡因知利在側. 乃進而奏曰, 巧於奴者, 多在韓國. 可召而使.")
"원년…7월… 누군가가 '近江의 將 壹伎史韓國[일기사한국: 이기노후비도가라구니]의 군세다.'고 말하였다. 財들은 高安城에서 산을 내려와 衛我河[위아하: 에가노가와]를 건너 韓國과 川의 서쪽에서 싸웠으나, 財의 군병 수가 적어서 韓國의 軍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韓國이 이르러 그 계획을 듣고 鹽籠[염롱: 시오고]을 죽이려 하였다. …韓國은 전장을 떠나 홀로 도주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8「天武天皇」(고려원, 1993), p.477  "元年…七月…有人曰, 近江將壹伎史韓國之師也. 財等自高安城 降以衛我河, 與韓國戰于河西. 財等衆少不能距. …爰韓國到之, 密聞其謀, 以將殺鹽籠. … 韓國離軍獨逃也.")

여기 나오는 韓國은 매우 혼돈스럽다.  앞의 보기에 나오는 韓國은 분명 나라 이름을 가리키는데, 뒤에 나오는 것은 나라 이름을 나타내기도 하고, 사람 이름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사람의 이름으로 나온 韓國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지명 내지 나라 이름으로 나온 韓國, 그것은 大韓帝國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1897년 이후의 일이므로, 그 뒤에 만들어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의 고을을 일본에 이끌고 귀화하였다?

"14년(214년) 봄 2월에 백제왕이 縫衣工女[공의공녀: 기누누이오미나]인 眞毛津[진모진: 마게쓰]을 보냈다. 이것이 지금의 來目衣縫[래목의봉: 구메노기누누이]의 시조다. 이 해에 弓月君[궁월군: 유쓰기노기미]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상주하기를, '나는 우리 나라의 인부 120縣을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다 加羅國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 가즈라기노소쓰비고]을 파견하여 弓月의 인부를 加羅에서 불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0「應神天皇」(고려원, 1993), p.240  " 七年春二月戊午朔, 遣阿知使主都加使主於吳, 令求縫工女. 爰阿知使主等, 渡高麗國, 欲達于吳. 則至高麗, 更不知道路. 乞知道者於高麗. 高麗王乃副久禮波久禮志二人 爲導者. 由是得通吳.")

弓月君이 백제에서 왔는데 120고을의 인원을 이끌고 귀화하려했다는 것이다. 일본열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면 가능하지만,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그것도 신라인이 방해했기 때문에 가라국에 머물고 있었다는 말은 일본열도의 사건은 더욱 아니다.
설사 일본열도가 일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사람들이 오고간 나라의 땅을 딛고 다녔으므로, 그런 사실이 가능한 지를 알아보면 알 것이다.

"37년(237년) 봄 2월의 무오 초하루에 阿知使主[아지사주: 아치노오미]〈加使主[도가사주: 쓰가노오미]를 吳에 파견하여 縫工女를 구하려했다. 그래서 阿知使主 등은 고구려를 거쳐서 吳에 이르려고 하였다. 즉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吳에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길을 아는 자를 고구려에 요청하였다. 고구려왕은 久禮波[구례파: 구레하]와 久禮志[구례지: 구레시] 두 사람으로 하여 길 안내자로 하였다. 이에 따라 吳에 이를 수가 있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0「應神天皇」(고려원, 1993), p.240  " 七年春二月戊午朔, 遣阿知使主都加使主於吳, 令求縫工女. 爰阿知使主等, 渡高麗國, 欲達于吳. 則至高麗, 更不知道路. 乞知道者於高麗. 高麗王乃副久禮波久禮志二人 爲導者. 由是得通吳.")

이 말은 섬인 일본열도에서 고구려(원문의 高麗는 高句麗임)를 거쳐 吳나라로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吳나라로 가는 길을 고구려 사람이 안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에 고구려가 있었다면 吳나라로 어떻게 안내할 수가 있겠는가? 결코 없다. 더욱이 일본 사람이 고구려에 도착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렵다. 그들이 신라나 일본 또는 임나와 국제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임나 내지는 백제를 거쳐서 길 안내를 요구하였다면, 그나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열도에서 한반도에 고구려가 있었다면, 거기까지 뱃길이 매우 험한데 그 북쪽으로 뱃길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남쪽의 吳나라까지 길을 안내한다는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의 중국대륙에서나 가능한 표현이다. 다만 고구려가 과연 신라 땅의 경계에 있는 吳나라까지 안내자를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연 국경이란 개념이 지금의 선(線)으로 그어진 경계선 개념일까? 하는데 관한 인식에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것이다.

당(唐)나라는 서쪽에, 일본은 동쪽에 있는 나라였다

나라의 위치가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면 모르지만, 그것도 우리 나라의 이웃에 있는 일본이 동쪽에 있고, 당나라가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6년(608년) 신미는 초하루인데, 신사(11일)에 唐(隋)의 객 裵世淸(배세청)은 돌아갔다. 즉시 다시 小野妹子臣[소야매자신: 오우노마이고노오미]을 大使로 하고, 吉士雄成[길사웅성: 기치시오나리]을 副使로 하고, 鞍作福利[안작복리: 구라쯔후꾸기꾸]를 통역관으로 하여 唐의 객에 수행시켰다. 천황은 唐의 皇帝에게 인사말을 보내면서, '동쪽의 天皇이 삼가 서쪽의 皇帝에게 아뢴다.'고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2「推古天皇」(고려원, 1993), p.348  "十六年…九月辛未朔…辛巳… 唐客裵世淸罷歸. 則復以小野妹子臣爲大使. 吉士雄成爲小使. 福利爲通事. 副于唐客而遣之. 爰天皇聘唐帝. 其辭曰, 東天皇敬白西皇帝.")
"26년(618년) 가을 8월 계유 초하루에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그리고 '수(隋)의 양제(煬帝)는 30만의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깨졌다. 그러므로 사로잡힌 정공(貞公)·보통(普通) 2명과 북·나팔·쇠뇌·자갈돌 등 10가지밖에도 토산물과 낙타 1마리를 바쳐왔다.'고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2「推古天皇」(고려원, 1993), p.354  "卄六年秋八月癸酉朔, 高麗遣使貢方物. 因以言, 隋煬帝, 興 萬衆攻我. 返之爲我所破. 故貢獻 虜貞公普通二人, 及鼓吹弩抛石之類十物, 幷土物駱駝一匹.")

고구려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것은 그 국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수(隋)나라는 고구려를 네 번이나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4년이 지나자 마침내 618년에는 唐나라에게 망하였다. 실로 고구려의 위력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30만 군사라면 인구가 15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2%의 비율에 해당되며, 더구나『삼국사』「고구려본기」에는 隋나라 군사 113만3800명과 대적했으므로, 30만 명의 4배이니, 무려 6000만 명이라는 인구가 된다.(宮崎市定(미야자키 이치시다),『中國史』조병한 역, (역민사, 1997), pp.170∼171에 보면, 後漢 桓帝 永壽 3년(157)의 戶數 1067만, 口數 5648이었고, 魏吳蜀시대(220∼280년)에는 戶數 146만(魏 66만, 吳 52만, 蜀 28만), 口數 767만(魏 443만, 吳 230만, 蜀 94만)이라 하여 1/7로 줄어들었다. 隋(581∼618년)나라는 이들이 통일된 땅이며, 300년이 지났으므로, 그 7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와 대결하여 고구려가 이겼다는 것은 그만한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만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낙타를 바쳤다는 것은 고구려가 사막이 있는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낙타의 용도가 사막에 알맞기 때문이다. 그저 애완용이나 동물원에 가두어서 노리개 감이나 하라고 바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가 거대할 뿐 아니라, 수나라도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의 중국 대륙 동남부에 있는 일본이기에 동쪽에 있는 천황이니, 서쪽에 있는 황제이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서쪽이라면 감숙성·사천성·운남성의 이서일 것이다. 일본열도에 있는 일본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사신이 갈 필요도, 그런 사실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열도의 군사가 중국 대륙의 동이족을 물리쳤단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東夷는 九夷이며, 그들은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어느 역사에도 없다.『中國歷史地圖集』(第1冊)에는 동쪽으로는 회수(淮水) 유역이 한계가 되며, 서쪽으로는 한수(漢水: 沔水)가 흐르는 한중군(漢中郡)이 있는 섬서성 남부와, 파강(巴江)이 흐르는 파군(巴郡)이 있는 사천성 북부 지역에 엄연히 "九夷"가 활동했던 지역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물론 이 위치는 지금의 중화민국 사람들이 지도를 그리면서 남쪽으로 자리매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디는 황하유역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동이에 대하여 일본이 동이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런 말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알아보자.

"40년(110년) 가을 7월…이에 日本武尊[일본무존: 야마도다게루노미고도]은 용감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熊襲[웅습: 구마소]이 이미 평정된 지 아직 몇 년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東夷가 謀叛하였습니다. 완전히 평정될 날이 언제일지 걱정입니다. 오직 이것에만 전력을 다하여 평정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천황은 도끼를 들어 日本武尊에게 주며, '나는, 그 東夷는 식견과 성질이 우악스러워 침범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 그 東夷 중에는 蝦夷[하이: 에미시]가 가장 강력하다. …'고 말하였다. 그러자 日本武尊은 도끼를 받고 절하며, '일찍이 서쪽을 정벌하던 해에, 皇靈의 위력에 힘입어 석자 칼을 쳐들고 熊襲을 토벌하였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고서도 적의 두목을 伏罪케 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2「景行天皇」(고려원, 1993), pp.181∼182  "四十年…秋七月, …於是 日本武尊, 熊誥之曰, 熊襲旣平, 未經幾年, 今更東夷叛之. 何日逮于大平矣. 臣雖勞之, 頓平其亂. 則天皇持斧鉞, 以授日本武尊曰, 朕聞 其東夷也, 識性暴强. … 其東夷之中, 蝦夷是尤强焉. …於是 日本武尊, 乃受斧鉞, 以再拜奏之曰, 嘗西征之年, 賴黃靈之威, 提三尺劒, 擊熊襲國. 未經浹辰, 賊首伏罪.")

熊襲(웅습)은 熊國+襲國의 혼성어로, 國을 縣으로 고치면, 熊縣+襲縣이며, 지금 일본열도의 九州[구주: 큐슈] 남서부 지역에 있다고 하면서 해설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東夷·蝦夷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熊國은 熊海이며, 이곳은『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광동성 신회현(新會縣) 남쪽 20여리에 있다."고 했다. 襲國은 襲州이며, 이곳은 "사천성 경계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그곳은 東夷들이 살던 三韓의 터전이기 때문에『日本書紀』의 해설이 가능해진다.

"9년(209년) 여름 4월… 그때 武內宿 의 아우 甘美內宿 [감미내숙이: 우마시우치노스구네]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讒言하여, '武內宿 는 늘 천하를 바라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 筑柴[축시: 쓰구시; 九州]에서 비밀히 모의하여, <홀로 筑柴를 분할하고, 三韓을 誘致하여 자기에게 따르게 하고, 그 위에 천하를 지배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武內宿 를 죽이게 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0「應神天皇」(고려원, 1993), p.232  "九年夏四月…時武內宿 弟甘美內宿 , 欲廢兄, 卽讒言于天皇, 武內宿 常有望天下之情. 今聞 在筑柴而密謀之曰, 獨裂筑柴, 招三韓令朝於己, 遂將有天下. 於是 天皇則遣使, 以令殺武內宿 .")

이 三韓이 어딘가? 弁韓(卞韓)·辰韓(秦韓)·馬韓이 아닌가!
그리고 筑柴[축시: 쓰구시; 九州]로서 지금 일본열도의 남부에 있는 큐슈[九州]의 북쪽 지방을 말하고 있으나, 이곳에다 어찌 三韓을 誘致할 수 있겠는가?
筑柴는 筑縣+柴縣의 합성어로『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筑縣은 호북성 경계에 있다."고 했으며, 이곳에는 筑水가 있다. 이 강을 "南河(남하)·粉靑河(분청하)"라고도 하는데, 호북성 房縣(방현)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谷城(곡성)이 있는 漢水(한수)로 들어간다. 이 房縣이 房州(방주)이다. 그리고 柴縣은 "산동성 泰安縣(태안현) 남쪽"이라고 하였지만, "호북성 潛江縣(잠강현)에 柴市(시시)"가 있다.
그러나 筑柴國이라 하여 九州라고 하였으므로, 이곳은 "복건성 龍巖縣(룡암현) 남쪽 50리 九州鄕(구주향)", "강서성 會昌縣(회창현)에 九州鎭(구주진)"이 있다. 이 구주향과 구주진을 아울러 가리킬 것이다.
변한(卞韓)이 지금의 중국 대륙 남방에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그곳이라야 三韓을 유치할 것이라는 말이라도 다음의 기록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9년(368년) 봄 3월에 荒田別[황전별: 아라다와게]과 鹿我別[녹아별: 가가와게]을 장군으로 삼고, 久 [구저: 구데이] 등과 함께 군세를 정비하여 바다를 건너 卓淳國[탁순국: 도구준]에 이르러 新羅를 습격하려 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군사들이 적어서 신라를 격파할 수 없다. 다시 沙白[사백: 사하구]·蓋盧[개로: 가후로]를 받들어서 增軍할 것을 요청하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木羅斤資[목라근자: 모구라곤시]와 沙沙奴 [사사노궤: 사사나고](이 두 사람의 성은 모른다. 단 木羅斤資는 백제인이다)에게 명하여 정병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파견하였다. 함께 卓淳國에 모여서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比自 [비자발: 히시호]·南加羅· 國[록국: 도구노구니]·安羅[안라: 아라]·多羅(다라)·卓淳·加羅의 7國을 평정하였다. 그로부터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고해진: 고게쓰]에 이르러 南蠻[남만]의  彌多禮[침미다례: 도무다레]를 도륙(屠戮)하여 百濟에 주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9「神功天皇」(고려원, 1993), p.226  "四九年春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 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 (是二人, 不知其姓也. 但木羅斤資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 南加羅 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 彌多禮, 以賜百濟.")
"8년(397년) 봄 3월에 백제인이 와서 조근(朝覲)했다.(《백제기》에, '아화왕(阿花王)이 귀국(응신천황)에 결례하였다. 그래서 우리  彌多禮(침미다례)·峴南(현남)·支侵(지침)·谷那(곡나)∇韓(동한)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直支(직지)를 중앙조정[天朝]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호의를 닦게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0「應神天皇」(고려원, 1993), p.230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 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23년(480년) 여름 4월 … 末多王은 무기를 주고, 아울러 筑柴國[축시국: 쓰구시노구니]의 군사 500명을 파견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보냈다. 이가 東城王이다. 이 해에 백제의 調賦가 보통 때보다 많았다. 筑柴의 安致臣·馬飼臣들은 배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14「雄略天皇」(고려원, 1993), p.324  "卄三年夏四月… 仍賜兵器, 幷遣筑柴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柴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12년(641년) 겨울 10월… 이달에 천황은 백제궁에 옮겼다. 13년 겨울 10월 기축이 초하루인데, 정유(9일)에 천황은 백제궁에서 죽었다. 병오(18일)에 국의 북쪽에 빈소를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이른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3「舒明天皇」(고려원, 1993), p.376  "十二年冬十月… 是月, 徙於百濟宮. 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酉, 天皇崩于百濟宮. 丙午殯於宮北. 是爲百濟大殯.")

이 글은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 탁순국에서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며, 7國을 평정하였다는 것이다. 이 7國을 성은구는 比自발(불火+本)을 慶南 昌寧의 옛이름, 南加羅를 金海, 탁(碌돌석1대신 입口)國을 慶山, 安羅를 咸安, 多羅를 陜川, 卓淳을 大邱, 加羅를 高靈, 古奚津을 康津, 심(沈에 물水변 대신 마음心변)彌多禮를 耽羅로 비정하였지만,(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9「神功天皇」(고려원, 1993), p.222) 이것은 한결같이 한반도에 두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될 수 없다.
게다가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南蠻을 공격하여 백제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濟州道가 南蠻이니, 野蠻國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南蠻은 광서성·귀주성·운남성·월남 지방을 가리키므로, 백제가 다스린 지역의 관할로 그 지역을 넘겨주었다는 말로써는 가능할 것이다.
그 지명을 다시 보면, "康津"은 "道康〕武·陽武·金陵·耽津♀音·鰲山"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한 곳 "道武(도무)"를『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道武鎭 今直隸廣宗縣治" 곧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이라 했다. 그 남쪽에 "심彌多禮"가 있다는 것은 심彌→頭無, 多禮→達→山 곧 頭無山이요, 이것은 복건성 룡계현(龍溪縣)에 있는 圓山(원산)이다.
"支侵"은 "支침(물水변+尋)"으로『삼국사』「지리지」에 나온 지명으로 볼 수 있으며, 이곳은 "본시 지삼촌(只 村)으로 지금의 예산군(禮山郡) 대흥면(大興面)"이라고 하면서 "차령산맥(車嶺山脈) 서북방"인 것으로 보았지만, 한반도의 충청도에서는 찾아서는 안 될 곳이며, "峴南(현남)"을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북도와 전라남도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峴의 남쪽"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峴은 "峴山" 또는 "峴首山"이며,『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峴山은 하남 신양현(信陽縣) 남쪽 70리, 강소 단도현(丹徒縣) 동남쪽 5리, 절강 동양현(東陽縣) 남쪽 8리, 절강 오흥현(吳興縣) 남쪽 5리, 절강 장흥현(長興縣) 서쪽 60리, 호북 양양현(襄陽縣) 남쪽 9리에 각각 있다. 특히 양양현에 있는 것을 峴首山(현수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谷那(곡나)"를 이병도(李丙燾)·鮎貝房之進(점패방지진)의 견해를 따라 한반도의 "예성강 유역"으로 보았다.(金聖昊,『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原』(지문사, 1986), p.101 및 朴鍾淑,『百濟·百濟人·百濟文化』(지문사, 1988), p.39) 이 谷那는『日本書紀』에 "52년(371년) 가을 9월에, … '나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다. 그 발원지는 谷那[곡나: 고구나]의 철산(鐵山)에서 나온다. 그 거리는 7일을 가도 도착할 수 없는 멀고 먼 곳이다.'고 했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9「神功天皇」(고려원, 1993), p.226  "五十二年秋九月, …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이렇게도 먼 곳을 절대로 예성강으로 볼 수 없다. 이곳은 鐵山이 있는 谷那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철산은 강소 동산현(銅山縣) 동북쪽, 복건 선유현(仙遊縣) 동쪽 7리, 호북 대야현(大冶縣), 감숙 휘현(徽縣) 남쪽 30리, 사천 영현(榮縣) 서쪽 80리, 사천 달현(達縣) 서북쪽 20리에 각각 있다고 했다. 서쪽이라면 아마도 사천성을 두고 비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백제왕이 筑柴國의 군사를 동원하여 百濟를 지키게 했다는 것은 그 筑柴國이 곧 백제가 관할한 영지(領地)였음을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筑柴國를 비롯한 大坂[대판: 오오사카]·奈良[내량: 나라] 등이 百濟의 관할 땅이기 때문에 日本 舒明天皇이 죽어서는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죽었고, 백제궁에다가 빈소를 차리기도 했던 것이다.

"5년(649년) 2월에 大唐(대당)에 보내는 押使[압사: 스베쓰가이] 大錦上 高向史玄理[고향사현리: 다가무구노후비도겐히]… 등은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몇 달에 걸쳐 新羅道(신라도: 北道)를 지나서 萊州(래주: 산동반도 북쪽)에 이르렀으며, 드디어 서울[京: 長安]에 이르러, 天子(唐의 高宗)을 보았다."(成殷九 譯註,『日本書紀』卷25「孝德天皇」(고려원, 1993), p.436  "五年二月, 遣大唐押使大錦上高向史玄理… 等, 分乘二船. 留連數月. 取新羅道, 泊于萊州. 遂到于京, 奉覲天子.")

일본열도에서 보내는 사신이 唐나라로 가는데, 新羅를 거쳐서 간다는 것이 한반도의 상황으로는 맞지 않는다. 그것도 신라를 지나 산동반도에 있는 萊州에 이른다는 것은 혹시 百濟를 거쳐서 그곳에 이른다면 모르지만, 더욱 가는 길이 맞지 않는다.
일본은 복건성 지역에서 중국 대륙의 東海로 하여 萊州로 가면, 강소성·하북성·산서성 등 그곳이 신라였다면, 가능한 말이 된다. 그리고 배를 타고 당나라 장안에 도착했으니, 이 길은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간 것이다. 섬서성 장안(長安)보다 그 동쪽에 있는 낙양(洛陽)이 신라의 서울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에 줄인다.
任那는 九州에서 2000리 떨어진 곳이고, 신라와 백제와 일본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그리고 일본은 복건성을 중심으로 중국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나라였으며,『日本書紀』가 곧 그곳의 역사를 말한 것이지, 일본열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거짓으로 꾸며진 역사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임나일본부설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인정하는 차원은 한반도에 국한하여 연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대륙에 놓고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임나가 신라에 복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중국대륙 안에서 백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이『日本書紀』를 통하여 결론지을 수 있다.